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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사물이 보이는 방식은 사물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확연히 드러내 준다
  • 환경과조경 2021년 4월

사무실 입구에서 걸음을 크게 다섯 번 떼면 편집장과 편집주간이 머무는 작업실에 닿는다. 평소에는 조심스럽게 똑똑 문을 두드리고 드나들던 공간인데, 이 달 내내 그 문턱을 노크도 없이 넘어 다녔다. 방 한쪽 벽을 가득 차지하고 있는 책장 때문이었다. 두 팔을 쫙 벌려도 다 안을 수 없는 거대한 책장에는 1호부터 395호까지, 환경과조경이 39년간 꾸준히 취재하고 편집해 엮은 종이 묶음이 가득하다. 이번 호 특집 준비를 위해 한가득 잡지를 끌어안고 들락날락하기를 수십 번, 사무실에 갇혀 운동을 멀리하고 지낸 팔뚝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저려오기 시작했다. 표지와 책등을 들여다보기도 전에 몇 번인가 했던 고민을 다시 되뇌었다. 잡지가 너무 무겁나, 너무 크진 않나.

 

책은 시각 매체로 분류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꽤 여러 감각을 동원해 책을 읽는다. 손끝에 닿는 종이의 질감, 책장을 넘길 때 종이와 종이가 스치며 내는 소리, 손에 쥐었을 때 느껴지는 무게와 두께가 주는 안정감, 나아가서는 종이에서 나는 냄새까지(이번 호 풍경 감각에 소개된 애니메이션 아따맘마135화에서 등장인물 아리가 좋아하는 책의 기준을 냄새로 삼는 에피소드를 다룬다). 따라서 이 감각의 총체를 책임지는 책의 생김새는 그 속을 채우는 콘텐츠만큼이나 중요하다. 박승진 소장(디자인 스튜디오 loci)10년간의 작업 기록을 담은 도큐멘테이션을 펴내며 책의 형태를 일종의 설계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판형이나 종이의 종류 등 책이 지닌 형태를 설계하고자 했다. 어떤 판형이 적절한가, 그 판형을 선택했을 때 두께는 어떻게 변하는가, 그 부피감이 10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표현하기에 적당한가 등 여러 가지 이유가 도큐멘테이션의 외형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조경가의 일과 일상 사이”, 20184월호, p.136)

 

책 디자인에서 가장 먼저 결정되는 부분이 바로 판형이다. 가로와 세로의 길이로 결정되는 책의 크기는 편집 디자인의 기준이 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내용물의 성격을 가늠하게 한다. 판형의 종류는 셀 수 없이 다양하지만, 신국판, 사륙배판, 국배판이 가장 많이 쓰인다(많이 쓰이는 만큼 제작하는 데 드는 비용이 낮다). 그리고 신국판(152×225mm)은 주로 소설과 수필 그리고 시집에, 사륙배판(188×257mm)은 교재와 잡지에, 국배판(210×297mm)은 자료집이나 시각성이 강한 패션지와 사진집에 사용된다. 가방에 넣고 다니며 시시때때로 읽는 책일수록 크기가 작아지고, 서가에 꽂아두고 필요할 때 꺼내보는 종류일수록 커진다. 참고로 문제집이나 두께가 얇아 접기 좋은 주간 신문은 타블로이드판(257×364mm)을 많이 사용한다.

 

환경과조경의 판형은 가로 230mm, 세로 275mm. 국배판보다는 통통해 웬만한 잡지 사이에 꽂으면 책등이 톡 튀어나오고 대신 키가 좀 작다. 넉넉한 크기의 가방이 아니면 넣기 어려워 가지고 다니기는 좀 힘들다.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휴대폰과 태블릿PC와 경쟁해야 하는 시대라, 환경과조경의 판형은 편집위원 회의에서 단골처럼 등장하는 주제다. 수차례의 검토에도 불구하고 좀 더 얇고, 가볍고, 휴대하기 좋은 판형으로 변화를 시도하지 않은 이유는 이미지와 도면을 크고 시원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판형이 작아지면 그만큼 잡지가 두꺼워지고, 글과 이미지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 책 귀퉁이를 강하게 잡아당겨 펼치고 있어야 한다. 온라인 세상이 대체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일까 헤아리다 오래전 대학교 설계실의 풍경을 떠올렸다. 강 주변을 어떻게 설계해야 할지 몰라, 무작정 설계실 책꽂이에서 물과 관련된 콘텐츠가 실린 잡지와 책을 몽땅 꺼내 펼쳐놓으니 눈앞에 작은 전시장이 만들어졌던 그 날을.

 

프랑스의 아동문학가로 활동하며 여러 그림책을 펴낸 페리 노들먼(Perry Nodelman)그림책론에서 사물이 보이는 방식은 사물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확연히 드러내 준다고 말한다. 환경과조경의 형태에도 편집자와 디자이너의 다양한 바람이 담겨있다. 책장에 순서대로 꽂혀 바라만 봐도 흡족한 풍경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바삐 이동하는 지하철이나 버스도 좋지만 몇몇 꼭지는 조용한 방에서 한껏 집중해 읽어줬으면 하는 마음, 가끔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듯 부담 없이 훑어보기에 좋았으면 하는 마음. 그 의도가 잘 실현되어 독자에게까지 닿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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