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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A] 곰팡이 사투기
  • 환경과조경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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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장마였다. 쏟아지나 싶으면 그치고 우산 없이 나갔다가 봉변을 당하기 일쑤, 비가 오는 둥 마는 둥 하는 미적지근한 날들이 계속되니 집에서 꿉꿉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해를 못 봐 바싹 마르지 못한 빨래를 다시 세탁기에 집어넣다가 악몽 같던 재작년의 겨울을 떠올렸다.

 

그해 겨울은 유독 추웠다. 생전 관심 없던 롱패딩을 찾을 만큼 혹독했는데 그렇다 보니 바깥과 집 안의 온도 차이도 어마어마했다. 결로 현상으로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들이 장마철 빗줄기처럼 진종일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그 물기를 수시로 훔쳐내느라 바닥 귀퉁이에서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끔찍한 검은 점박이가 티브이장 뒤를 잠식하고서야 그 존재를 알게 됐는데 간단한 처방으로 수습하기에는 상황이 심각해진 후였다. 그게 끝이었으면 좋으련만 곰팡이 친구들은 안방 옷장 뒤편, 작은방 책상 아래 등 구석구석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그들이 차지한 공간을 모두 헤아려보니 곰팡이가 주인인 집에 사람이 얹혀살고 있는 꼴이었다.

 

지금이야 덤덤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됐지만 당시에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할 수 있다면 집을 버리고 도망가고 싶었다. 누구나 한 번쯤 저지르는 실수인데 우리 가족은 그 곰팡이를 자력으로 제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곰팡이 퇴치를 위해 한 달간 주말 외출 금지령이 내려졌다. 첫째 주는 거실, 둘째 주는 안방, 셋째 주는 작은방, 마지막 주는 화장실에 불법으로 거주하고 있는 곰팡이들을 쫓아내겠다는 당찬 구상이었다.

 

그런데 첫날부터 계획이 틀어졌다. 벽지를 뜯어내는 데만 세 시간이 걸렸다. 인터넷에서 찾은 꿀팁을 따라 뜨거운 물로 벽지를 적시고 헤라로 긁어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우둘투둘한 콘크리트 벽 표면에 스며든 곰팡이를 닦아낼 때는 락스 냄새를 밀어내기 위해 온 집안의 창을 다 열어야 했다. 엄동설한의 찬바람이 온몸을 싸늘하게 굳혔다. 다음 작업을 진행해야 하는데 이 사태의 근본적 원인인 실내외 온도 차가 해결되지 않으니 드라이기를 동원하고 선풍기 바람을 쐬어도 도통 벽이 마르지 않았다. 다음날 깨끗이 닦아놓은 벽 한구석에 다시 검은 무늬가 생긴 걸 발견했을 때의 심정이란. 이 주째의 일요일을 맞이하고서야 이 머저리 짓을 그만두기 로 했다. 평범한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수소문을 통해 모 신 곰팡이 처리 전문가가 사건 현장을 살피는 눈빛이 어찌나 믿음직스럽던지 꽤 큰 거금을 (조금 손이 떨렸지만) 기꺼이 지불했다.

 

슬프게도 곰팡이는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다시 고개를 디밀었다. 건물이 낡아서 단열 페인트로는 어림없고 단열재로 두꺼운 벽을 치지 않으면 똑같은 문제가 발생할 거라는 전문가의 조언이 귓가에 쟁쟁했다. 대공사를 하기엔 시간적, 공간적, 금전적 여유가 없었다. 결국 또 주말 내내 자발적으로 집에 갇혀 곰팡이를 닦아내고 그 위에 단열 벽지를 발라야 했다. 모서리에 글루건까지 발라 꼼꼼히 마감했다.

 

곰팡이와의 사투를 끝낸 후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벽지는 티 한 점 없이 깨끗하다. 가려진 벽지 뒤에 곰팡이가 가득할지도 모르지만 새하얀 벽을 보고 있으면 그냥 마음이 편안하다. 곰팡이가 있을 수도 있지만 없을 수도 있으니까. 사실 이 글은 곰팡이 사투기가 아니라 항복기인 셈이다. 문제를 바로 마주하고 해결하려는 태도도 좋지만 가끔은 이런 시간도 필요한 것 같다. 물론 그 시간이 끝도 없이 길어지면 안 되겠지만.

 

바다 한 번 보지 못한 여름이 끝나간다. 집 밖을 나설 수 없게 되니 자연스럽게 내가 머무는 환경을 둘러보는 시간이 늘었다. 이런 욕구를 예측한 건지 우연의 일치인지 새롭게 시작된 집을 다루는 예능 프로그램이 부쩍 눈에 띈다. 물건이 잔뜩 쌓인 집을 신박한 정리’(tvN)법으로 제 기능을 발휘하는 공간으로 바꾸거나, 늘 꿈만 꾸던 나의 판타집’(판타지와 집의 합성어, SBS)을 찾아 실제로 살아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떤 의욕이 생긴다. 통장 잔고를 밝히기도 민망한 빈털터리면서 저 집 사억이면 살 만하네하는 분에 넘치는 소리도 하며 월급날을 향해 달려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곰팡이가 있을지도 모르는 집에서의 탈출을 위해! 독자분들도 눅눅한 기분을 재충전의 열기로 말려 뽀송뽀송한 기분으로 새 계절을 맞이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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