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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A] 디지털 공원
  • 환경과조경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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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 번쯤 아날로그 붐에 휩쓸리고 싶어지지 않나. 레트로 열풍에 알맹이가 없다는 진단도 있지만, 레코드판이나 카세트테이프, 종이책, 만년필과 같은 것에서 낭만이 느껴진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시류에 탑승해 지난해 봄, 일본 여행을 앞두고 손바닥만 한 필름 카메라를 샀다. 변덕스러운 성정을 고려해 중고로 저렴하게, 작동법이 어려우면 구석에 처박아 놓을 게 빤하니까 반자동 모델로.


피사체야 다양했지만 가장 찍고 싶던 건 나라 사슴공원의 사슴들이었다. 여행 계획을 세우며 블로그로 탐방한 사슴공원은 디즈니가 그린 세계 같았다. 사슴과 노래하고 춤추는 건 무리지만, 그럭저럭 어울려 함께 걸을 수 있다. 사슴이 허락만 한다면 (센베이 모양의 먹이를 대가로) 등허리를 쓰다듬고 사이좋게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게다가 그 배경이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공원이라는 점이 멋졌다. 우거진 나무와 너른 잔디밭도 있지만, 사슴의 발길은 아스팔트 도로나 자판기와 오토바이가 서 있는 상점 앞에도 서슴없이 닿는다. 그 풍경이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는 그럴듯한 예처럼 보였다.


차곡차곡 쌓은 환상은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부서졌다. 도시와 자연이 뒤섞인 유토피아 같은 모습은 상상 그대로였는데 사슴이 달랐다. 그들은 커다란 눈을 착하게 뜨고 다가왔다. 그리고는 먹이를 갈취했다. 150엔을 주고 산 먹이가 순식간에 동이 났다. 이번에는 좀 더 잘해봐야지, 다시 산 먹이를 가방에 숨기고 태연한 척 걷는데 사슴무리의 시선이 나와 일행을 계속 쫒아왔다. 순간 그 크고 예쁜 눈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100미터쯤 걸었을까 또다시 사슴 패거리에게 붙잡혀 주머니와 가방을 수색 당하고(옷 주머니와 가방에 머리를 들이밀고 샅샅이 뒤지는데 반항하면 물리거나 걷어차인다) 다시 빈털터리가 됐다. 기대와는 달랐지만 그래도 그곳에서 카메라 롤을 가장 많이 돌렸다. 어쨌든 동물원 철창 속에서 기운 없이 거니는 사슴보다야 훨씬 진짜다운 사슴을 만난 기분이었으니까.


얼마 전 인터넷에서 이 사슴들이 공원을 탈주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관광객이 줄어 먹을 것이 부족해지자 어쩔 수 없이 도시로 향한 것 같다는 분석이 잇따랐다. 공원에서 장장 2킬로미터를 걸어야 닿을 수 있는 나라 역, 그곳에 쓸쓸히 선 사슴의 눈은 착해 보이지도 섬뜩해 보이지도 않았고 그냥 척척해 보였다. 비슷한 일이 태국에서도 일어났다. 원숭이의 도시라 불리는 롭부리 한복판에서 원숭이 수백 마리가 패싸움을 벌였다. 원인은 역시 관광객 감소로 인한 먹이 부족. 결국 사슴공원도 원숭이의 도시도 우리만 없을 뿐 거대한 관광 산업 시스템으로 동물을 사육하는, 유토피아를 빙자한 동물원이었구나. 어쩌면 가방과 주머니를 헤집던 행동이 갈취가 아닌 구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항상 있을 때는 모르다가 없어지면 아쉽다. 문화생활이 삶을 맛깔나게 해주는 조미료 같은 건 줄 알았는데, 막상 미술관이며 도서관이며 공연장이며 죄 문을 닫으니 너무 적적하다. 대안으로 온라인 콘서트나 VR 미술관 등이 등장했지만 영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가상(혹은 증강)현실에는 음악과 예술 작품이 있지만, 스피커에서 소리가 터져 나올 때마다 발밑을 꽝꽝 울리는 진동과 고요한 가운데 이상한 방식으로 집중력을 높여주는 백색소음이 없다. 하나하나 따지다보니 실재하는 진짜 공간에 발을 딛고 서있다는 감각은 내 문화생활을 좌지우지하는 꽤 중요한 요소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개인의 취향이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 가상현실로 즐기는 문화생활을 일상화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될 테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미술관, 도서관, 공연장을 넘어 공원 역시 디지털화되는 날이 올까. 바람, 풀숲, 햇빛,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의 인기척 등 어떤 공간의 감각을 01로 완벽히 구현할 수 있을까. 고민을 이어가다 문득 공원의 생존 여부는 공간이 아닌 역할의 문제라는 결론에 닿았다. 나무와 잔디밭, 광장, 벤치를 보기 좋게 버무린 그림 같은 풍경에 주목한 공원은 언젠가 사슴을 잃은 공원처럼 그 한계를 드러낼 것이다. 코로나 시대 이미 집 안에 갇힌 사람 중 몇몇은 공원 대신 액정 속 동물의 숲’1을 방문하고 있다. 시대의 변화를 고려하며 휴게 기능을 넘어 문화, 복지, 소통 등의 가치를 어떻게 공원에 도입할지 고민”2하는 일이 디지털 공간이 공원을 대체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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