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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순간을 믿어요
  • 환경과조경 2021년 12월

붉은 벽돌 건물은 유독 단풍과 함께할 때 더 예쁘다. 노랗고 붉은 잎을 따라 걷다 보니 금세 주신하 교수가 머무는 서울여대 과학관에 닿았다. 요즘 인스타그램 팔로워 늘리는 데 재미를 붙였는데, 그날에는 인터뷰 현장을 찍어 12월호를 예고하는 스토리를 올리겠다고 마음먹은 참이었다(아직 팔로우하지 않았다면 인스타그램에서 @lak_korea를 검색하시길). 멋들어진 사진이 가득 붙은 벽과 책장을 찍다가, 한구석에서 ‘과제 가져가세요’가 적힌 박스 하나를 발견했다. 그 정체는 ‘디자인 노트’ 과제함. 주 교수는 설계에 대한 재미를 붙여주려고, 일주일에 한 번씩 어떤 공간의 사진을 찍고 감상을 적는 과제를 내주었다고 설명했다. 박스 뒤에는 ‘과제 제출하세요’가 쓰여 있단다. 

 

듣자마자 떠올린 생각은 ‘귀찮겠다’. 비슷한 과제를 했던 기억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느티나무, 단풍나무, 벚나무…. 막 조경학과에 입학한 내가 아는 나무의 종류는 열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있을 만큼 적었다. 꽃과 나무를 사랑해 잘 아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나와 비슷했다. 가르치는 이의 입장에서도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수많은 나무의 특징을 일일이 알려주고 외우게 할 순 없다. 스스로 익히되 조금이라도 재미를 느끼게 하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그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게 수목 관찰일기였을 것이다. 교내에 있는 열 개의 나무를 선정하고 관찰한 내용을 일주일마다 글과 그림으로 정리해 제출할 것. 

 

학창 시절을 통틀어 가장 성가셔한 과제였다. 큰 변화가 있으면 좋으련만 성정이 투박한 내게 나무는 매일 푸르고 매일 조용한 존재였다. 그렇게 게으름을 피우다 어느 날 누가 ‘단풍나무 꽃 벌써 졌더라’하면 ‘뭐? 꽃핀 것도 못 봤는데!’ 하고 달려가는 식이었다. 하루는 친구가 돈이라도 빼앗긴 사람처럼 망연히 걸어오기에 물으니, 쭉 관찰해오던 인문학관 앞 가중나무가 밑동만 남은 채 사라졌다고 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잘려 나간 것이다. 뜻하지 않은 사고라 점수를 못 받거나 하진 않았지만 친구는 계속 아쉬운 얼굴이었다. 변화의 순간을 포착하는 일은 긴 시간의 관찰을 동반하기 마련이니 가중나무와 정이 든 모양이었다. 당연한 결과겠지만, 수목 관찰일기가 총점에서 차지하는 부분은 30% 정도였지만 이 과제를 충실히 한 친구들의 학점이 훨씬 높았다. 식물에 대해서도 훨씬 잘 알았다. 역시 재능 중 최고는 끈기다.

 

지난주 토요일에는 일찍부터 지하철에 올랐다. 『환경과조경』 전속 사진작가인 유청오가 참여한 전시 ‘더 튤립The Tulip’이 서울식물원에서 열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집에서부터 장장 한 시간 사십 분이 걸리는 긴 여정에 벌써 지친 나와 달리, 화초 가꾸기를 좋아하는 엄마는 이 기회에 온실도 둘러보자며 잔뜩 신이 난 기색이었다. 온실을 구경하고,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식물문화센터 2층 프로젝트홀에 들어섰다. 꽃을 주제로 한 사진전은 처음이었다. 사실 튤립 하면 놀이공원이나 지역 축제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고등학교 때만 해도 좋아했던 그 꽃밭은 설계를 배우며 유치한 풍경으로 전락해버렸는데, 툭하면 땅의 맥락과 상관없이 조악한 조형물과 함께 사진의 배경처럼 꽃을 심는 게 싫어서였다. 그날 사진을 통해 바라본 튤립은 좀 달랐다. 들여다보면 볼수록 본래의 형태는 사라지고 튤립과는 상관없는 엉뚱한 생각들이 툭툭 튀어 올랐다. 붉은 얼룩이 박힌 튤립은 어항 속을 유영하는 금붕어 같았고, 전체적으로 옅은 분홍빛을 띠는 튤립은 복숭아의 단면을 닮아 있었다. 배가 고팠던 건지 초밥이나 굽지 않은 차돌박이를 떠올리게 하는 것도 있었다. 괜히 미워 보이던 튤립이 각양각색의 얼굴을 가진 생물로 보였다. 이 순간의 어떤 매력에 홀려 유작가는 셔터를 눌렀을까. 오래전 언제나 똑같아 보이는 나무 앞에서 사진기를 들고 망설이던 내 모습이 기억났다. 긴 시간 동안 하나의 피사체를 뷰파인더에 담는 일은 그 대상을 탐구하고 돌보고 영원히 기억하려는 일과도 닿아 있다. 언니네 이발관도 노래하지 않았나. “영원한 것은 없다 생각하지 말아요. 우리 기억 속에 남은 순간을 믿어요.”

 

인터뷰 중 분위기를 환기할 겸 우리는 주 교수의 취미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 “늘 사진기를 가까이 두시네요. 어떤 찰나를 남기는 데 큰 애정이 있는 거 같아요.” “휴대폰을 포함해서 사진기가 총 세 개 있는데, 콤팩트한 사진기는 늘 가방에 넣고 다녀요. 그 순간이 아니면 영원히 못 찍는 장면이 있더라고요.” 갑자기 내 서랍 속에 잠들어 있는 (아날로그에 대한 글을 읽고충동적으로 구매한) 필름 카메라가 가여워졌다. 올해가 가기 전 어디엔가 넣어두었을 필름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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