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인천과 부산, 중국의 상하이와 칭다오, 일본의 요코하마와 나가사키. 이들 도시의 공통점은 도시 여행자에게 외국인 거류지가 만든 ‘이국적인 근대 풍경’의 경험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개항장이라고 불리는 도시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경인데, 서울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외국인이 국가 경계를 넘나들고 거주하려면 국가 간의 합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조선의 경우 1876년 조일수호조규 체결을 시작으로 11개국의 열강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으면서 국경의 빗장이 열렸고, 이후 미국과 영국, 러시아, 독일 등 아홉 국가의 공사관 또는 영사관이 서울 정동 일대에 들어서게 된다. 그런데 중국과 일본 양국은 다른 서구 열강과 달리 정동이 아닌 다른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사실 일본은 조선과 가장 먼저 조약을 체결했지만, 조선 정부는 공사관은 물론 일본인이 도성 안에 주거하는 것조차 불허했기 때문에 일본 공사관은 돈의문 밖에 자리해야 했다. 그러다 임오군란 때 공사관이 화재로 소실되고 일본 측 피해 보상 문제를 다룬 제물포 조약을 맺으면서 비로소 도성 안으로 입성하게 된다. 1896년 현재 신세계 백화점 본점 자리에 영사관을 신축하고 진고개(지금의 충무로2가)와 주동注洞(남산 예장자락 일대)을 중심으로 일본인의 거주가 허가됐다. 남산 북사면에서 시작된 일본인 거류지는 훗날 용산과 이촌까지 확장된다.
반면 중국인이 서울에 정착한 배경은 또 다르다. 그들은 수백 년간 지속한 양국의 관계를 명분으로 가장 먼저 들어와 가장 오래도록 남아있는 부류였다. 19세기 말 서구 열강이 우리나라와 교섭을 시도하는 상황에서 청국은 자신들과의 오랜 관계가 흔들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통적 사대 관계를 강조하면서 한편으로는 군대와 상인을 이용해 조선에 대한 새로운 주도권을 잡고자 했다. 청국 군대가 임오군란 등의 폭동 진압을 돕는 것을 시작으로 한국 정부에 초권력 행세를 했다면, 화상華商은 자국 군대와 결탁해 조선의 국가 재정에 개입하고 상권을 장악하는 역할을 했다.
화상들은 뒷배에 군대를 두고 있어서 조선인 중심의 기존 상권을 파고드는 데 거침이 없었다. 그들은 종로 등 기존 상권을 점거하면서 조선인들과 종종 마찰을 일으켰지만, 결국 중국 공관인 총판조선상무위원공서(總辦朝鮮商務委員公署, 이하 상무공서)를 중심으로 거대한 타운을 형성하게 된다. 1883년 9월 지금의 주한중국대사관 자리에 건립된 상무 공서는 원래 무위대장(武衛大將) 이경하(李景夏)의 집이었으나, 상무공서의 초대 상무위원인 진수당(陳樹棠)이 매입하여 지은 것이다. 그 이전에는 조선 후기에 중국 사신을 접대하고 숙소로 이용했던 남별궁(이후 환구단 자리)에서 영사 업무를 처리했었다.
* 환경과조경 406호(2022년 2월호) 수록본 일부
참고문헌
박희성, “1910~1920년대 경성부 華僑 토지 소유 분포와 변화 양상”, 미발표 논문.
강진아 외, 『개항기 서울에 온 외국인들』, 서울역사편찬원,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