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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조경의 상대성 이론
  • 고정희
  • 환경과조경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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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 타워, 포츠담 아인슈타인 파크에 위치한 태양관측소, 에리히 멘델존 설계, 1919~1922 ⒸCoenen

  

#9

에리히 멘델존, 내 건축에 녹색 레이스를 입혀다오

 

미국 유타에 가면 로버트 스미스슨이 만든 달팽이 방파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막 한복판에 소위 저먼 빌리지German Village라고 하는 것이 있다. 독일인들이 사는 마을이 아니라 독일식 다세대주택을 재현해 놓은 일종의 세트장이다. 세트장이지만 영화를 찍으려고 만든 것도 아니다. 2차 세계대전 때 베를린 폭격을 연습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다. 1943년부터 연합군들이 전면전에 돌입하며 카셀, 함부르크와 드레스덴 등의 다른 도시들은 불바다를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베를린의 집들은 어찌 된 일인지 소이탄 공격이 별 효과가 없었다. 특히 19세기 후반부에 노동자들을 위해 튼튼하게 지은 다세대주택들이 폭격에 강했다. 그 시대에 이미 화재 예방을 위해 다양한 건축 기법을 모색해서 지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사실을 연합군들이 미처 모르고 있었다. 집과 집 사이의 벽에는 창문 없는 맨 벽에 돌, 벽돌, 콘크리트 등 비연소성 소재만을 사용했고 최소한 24cm 두께로 지었으며 건축 소재뿐 아니라 건물 배치에서도 불이 서로 옮겨붙지 않도록 적정 거리를 유지하는 등 세심한 화재 예방을 위한 조례가 시행되고 있었다.

궁리 끝에 미국 국방성의 화학전담당자가 당시 미국에 망명 와 있던 독일 출신의 유대인 건축가 에리히 멘델존Eric Mendelsohn(1887~1953)에게 비밀리에 자문을 요청했다. 멘델존은 이에 응했고 거의 원본과 똑같이 건물을 만들어 주었다. 독일식의 튼튼한 가구도 만들어 넣고 침대 시트, 커튼까지 그대로 재현했다고 한다. 유타는 공기가 건조하여 발화 양상이 베를린과 달랐으므로 오일의 성질을 조정한 후, 비 내리는 베를린마냥 물을 뿌려가며 폭격 연습을 했다고 한다. 결국 폭격에 성공했고 모두 세 번을 재건하여 연습을 반복한 후 마지막에 남은 건물 두 채를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어쩌면 다가올 3차 세계대전을 대비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차 세계대전 때 많이 파괴되긴 했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건물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저먼 빌리지가 한때 널리 명성을 떨쳤던 스타 건축가 멘델존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당시 그는 56세였으니 원숙한 경지에 들어 왕성히 활동할 나이였지만 베를린을 떠난 뒤 운도 그를 떠났는지 별로 이렇다 할 작품을 남기지 못했다. 한때 뜻을 같이 했던 미스 반 데어 로에나 발터 그로피우스와는 달리 망명 후에 일이 썩 잘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한창 시절은 1920년대였다. 독일 뿐 아니라 유럽에서 가장 잘 나가는 건축가 중 하나였으며 소위 말하는 유선형 건축Streamline Architecture’의 대표자였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포츠담에 있는 태양관측소 아인슈타인 타워. 1919년부터 1922년 사이에 만들어졌다. 아인슈타인은 여러 번 활동 무대를 옮겼지만 일반 상대성 이론을 개발할 당시에는 베를린 대학교에서 연구하고 있었으며 베를린의 천문학자들에게 자신의 상대성 이론을 한번 검증해 달라고 요청했었다. 그때 천문학과 학과장을 맡고 있던 프로인틀리히 교수는 첼로를 연주하는 천문학자로서 멘델존과 친한 사이였다. 멘델존의 아내도 첼리스트였으므로 서로 잘 알고 지냈다. 프로인틀리히 교수가 어느 날 멘델존에게 상대성 이론을 검증하기에 적합한 태양관측소를 한 번 지어볼 수 있겠느냐는 제안을 해왔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아인슈타인 타워였다.

완성된 관측소를 보고 아인슈타인은 건물이 상당히 유기적이네라고 평했다고 한다. 결국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뿐 아니라 유기적인 건축이라는 용어까지 만들어 낸 셈이다. 이렇게 상대성 이론이 유기적인 건축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자 베를린과 포츠담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천문대가 준공되었던 1922년에 아인슈타인이 노벨상을 탔고 그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아인슈타인에게 별장을 하나 선사했는데 그 별장이 바로 포츠담근처에 있었다. 그러니 베를린과 포츠담의 시민들이 마치 자신들이 노벨상을 탄 것처럼 흥분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 타워는 구경거리가 되었고 상대성 이론은 화젯거리가 되었다. 후에 포츠담의 칼 푀르스터 설계실에서 근무하던 헤르타 함머바허1는 상대성 이론을 정원의 형태로 한번 풀어보겠다고 기염을 토했으며 그 결과물을 1936년 드레스덴의 정원 박람회에 출품했다. 물론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아인슈타인 타워로 일약 유명해진 멘델존은 곧 스타 건축가가 되었고 한창 때에는 직원 40명을 둔 큰 사무실을 운영했다. 일이 너무 많아 비명을 질렀으며 리하르트 노이트라Richard Neutra, 율리우스 포제너Julius Posener 등의 쟁쟁한 인물들이 그의 사무실에서 견습생으로 일했다. 건축학 외에 경영학도 전공한 덕분인지 멘델존은 경제적으로도 승승가 도를 달려 동료들의 시기와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물론 그의 집과 재산은 나중에 나치에게 남김없이 몰수당하고 만다.

그러나 지금 에리히 멘델존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까닭은 단지 그가 모더니즘의 대표 건축가 중 하나로서 고찰의 대상이 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반복해서 표현했던 그의 정원관 때문이다. 그는 자연과 정원을 사랑한 건축가로 잘 알려져 있다. 건축의 단단함과 뾰족함, 직선과 모남을 식물이 부드럽게 감싸주어야 한다고 거듭 말하기도 했다.

그는 개인 주택도 다수 설계했는데 대부분 정원을 직접 만들었다. 짐작컨대 그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미국의 프랭크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유선형이라고는 하나 그의 건축은 다른 모더니즘 건축들과 마찬가지로 기능적이고 합리적인 입면체로 이루어져 있으며 단 하나의 유연한 곡선으로 마무리 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것이 입면 전체일 수도 있고 담장의 둥근 모서리 일수도 있으며 발코니의 외곽 라인일 수도 있다. 때로는 원형 혹은 반원형의 탑을 부착하기도 했다. 건물 전체가 유기적으로 설계된 아인슈타인 타워는 오히려 예외적이다.

그는 건물이란 아직 벌거벗은 신생아와 다름없다. 녹색의 레이스를 달아 예쁜 옷을 입혀야 비로소 완성이 된다”2라며 식물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했다. 그러나 얼핏 정원을 옹호하는 것 같은 이 말을 곰곰이 뜯어보면 조경가로서 그리 좋아할 일도 아니다. 그는 정원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녹색 레이스로서의 식물을 말하고 있다. 사실 이런 보수적인 견해를 가진 건축가가 멘델존 하나만은 아니다. 거의 모든 건축가들이 갖고 있는 생각일 것이다. 다만 멘델존의 운이 좋지 않아서 제인 브라운의 The Modern Garden이란 책에 여러 번 인용된 덕에 지금 혼자 화살받이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가 어떻게 말했든 사실 그의 건축은, 특히 그의 완벽하고 매끄러운 곡선의 표면은 정원이 다가갈 틈을 내주지 않는 아성과 같다.

 

 

고정희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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