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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토리얼] 세 번째 트랙, 비평으로서의 디자인
- 십여 년 전 기억 한 토막. 어느 한여름 밤, 무더위는 생맥주로 이겨내야 한다는 신념으로 뭉친 번개 모임 1차가 끝나자 누군가 신선한 제안을 했다. 2차 대신 공원 벤치에 떨어져 앉아 호젓하게 아이스크림을 먹자. 편의점에서 각자 최애 아이스크림을 골라 근처 보라매공원에 들어섰다. 정적만 감도는 고요한 밤을 기대했지만, 예상과 전혀 다른 놀라운 풍경. 군중이라고 표현해야 할 만큼 많은 사람이 넓은 공원을 힘차게 걷고 있었다. 넓은 운동장의 트랙을 따라 한 방향으로 줄지어 걷는 군중. 알고 보니 그날 밤의 비현실적 장면은 일상의 풍경이었다.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에 자리한 보라매공원에는 여느 공원의 공간 구성과 다른 특징이 있다. 공원 한가운데 대형 운동장이 있는 것. 한 바퀴 도는 데 600m가 넘는 트랙을 따라 다양한 연령대의 동네 주민들이 날씨에 상관없이 새벽에도, 낮에도, 늦은 밤에도 걷고 뛴다. 낮보다 밤에 더 붐비는 공원. 이 공원 운동장은 원래 공군사관학교의 연병장이었다. 1958년 이곳에 터를 잡은 공군사관학교가 1985년 말 청주로 이전하자 서울시는 부지와 시설물, 수목을 매입하고 보수해 1986년 어린이날 보라매공원(면적 413,352㎡)을 열었다. 이전적지 공원화 사업의 초기 사례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 공원 이름의 ‘보라매’는 대한민국 공군을 상징한다. 명칭뿐 아니라 공원의 여러 공간과 시설도 공군과 공군사관학교의 기억을 잇고 있다. 1960년대 초에 조성한 연병장은 공원의 대형 운동장으로 쓰이고 있고, 당시의 연못도 계속 유지되면서 공원 경관의 주연 역할을 하고 있다. 보라매탑과 성무탑을 비롯한 많은 기념물과 시설이 그대로 남아 있고, 건물 일부도 재활용되고 있다. 보라매공원 초창기에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공간과 시설이 강조되었다. 개원 직후 연못 근처에 작은 동물원이 조성됐고, 1990년대에는 수영장과 롤러스케이트장이 운영됐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 다양한 청소년 시설이 들어서기도 했지만, 점차 전 연령대가 이용하는 공간들이 마련되면서 당대 공원 문화 트렌드를 반영했다. 운동장 트랙을 가득 메운 남녀노소 산책자들과 러너들이 보여주듯, 보라매공원은 체육과 운동 중심의 공원으로 각광받으며 시민들의 건강한 일상을 담아내고 있다.(각주 1) 스타 조경가가 각 잡고 디자인한 공원이 아님에도 보라매공원은 공원의 양과 질이 취약한 동작구, 영등포구, 구로구, 관악구 등 서울 서남권의 멀티플레이어 공원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지난 5월 22일부터 보라매공원에서 2025 서울국제정원박람회가 개최되고 있다. 공군사관학교에서 대형 공원으로 이어진 70년 가까운 장소의 기억 위에 무려 111개의 전시 정원(show garden)이 뿌려졌다. 10월 20일까지 다섯 달 동안 쇼는 계속된다. 서울시 보도자료에 따르면, 개막 열흘 만에 120만 명 넘는 시민이 정원박람회를 찾았다. 방문객 수만 보자면 성공한 축제다. 각각 존재감을 뽐내는 화려한 정원들의 전시장으로 바뀐 보라매공원, 발 디딜 틈이 없다. 요즘 조경가들 모임이나 대학원 세미나에서는 대형 공원과 정원박람회―또는 전시 정원―의 관계를 둘러싼 열띤 토론이 벌어지곤 한다. 정원박람회의 정원들은 공원의 장소성이나 도시(계획)적 맥락과 상관없는 특별한 주제, 형태, 메시지를 전시한다. 전시 정원의 핵심은 일시성이다. 화려한 축제가 끝나고 나면 오랫동안 작동되던 공원의 일상 풍경이 빠르게 회복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번 보라매공원 정원박람회는 반년 가까이 운영되며, 행사가 끝난 뒤에도 전시 정원 대부분이 유지‧관리될 예정이다. 정원의 존치에 지속가능성이나 친환경성 같은 시대정신까지 부여된다. 일시적이어야 할 전시 정원들이 영속되며 공원을 재구성한다면, 공원을 체계적으로 재편하는 마스터플랜이 선행됐어야 한다. 첼시 가든쇼로 유명한 영국왕립원예협회(RHS) 정원박람회들의 설계 지침서를 보면 체계적 철거 계획과 철거 후 자재 재활용 계획이 중요한 심사 항목 중 하나다. 알록달록한 정원들로 가득 찬 이번 호 지면에서 2025 서울국제정원박람회 초청정원인 ‘세 번째 트랙’에 특별한 주목을 해주시길. 박승진(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작업은 공원 속 전시 정원의 한계, 즉 공원의 장소성이나 도시적 맥락과 무관하게 전시되는 정원 형식과 메시지의 난맥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다. 그는 운동장 둘레를 걷고 뛰는 보라매공원 특유의 공원 문화를 그대로 수용했다. 빠르게 걷거나 뛰는 첫 번째 트랙과 보통 속도로 걷는 두 번째 트랙 안쪽에 ‘아주 느리게(largo)’ 걷는 세 번째 트랙을 삽입했다. 원래 있던 느티나무와 이팝나무 몇 그루 사이에 날렵한 트랙을 끼워 넣고 도시 주변 야산에서 만날 수 있는 관목과 풀을 심은 게 전부다. 화려한 형태도, 잔뜩 힘준 메시지도 없다. 박승진은 이렇게 말한다. “공원을 방문한 이들이 아주아주 천천히 이 길을 걷기를 바란다.” 박승진의 ‘세 번째 트랙’은 서울형(?) 정원박람회에 대한 예리한 비평이기도 하다. 글이 아닌 디자인으로 쓴 비평. 그는 박람회에 초청된 뒤 “가장 큰 부담과 고민은 쇼 가든, 즉 전시 정원이 공원에 계속 남는다는 점”이었다고 말한다. “일시적인 정원이라면 마음껏 형태와 주제, 메시지를 펼칠 수 있겠지만, 계속 유지되는 작품이라면 그건 공원 설계의 일부분이어야 한다.” ‘세 번째 트랙’은 마치 공원의 그 자리에 오랫동안 있었던 것 같은 작은 흔적이자, 그 장소의 일상이 더 풍성하게 확장되기를 바라는 소망이다. **각주 정리 1. 보라매공원의 조성 과정과 변화, 도시계획적 의의에 대해 더 상세히 알아보고자 한다면, ‘도시경관연구회 보라’가 서울시 공공 기록물을 토대로 작성한 다음 논문을 권한다. 서영애, 박희성, 길지혜, 김정화, 이상민, 최혜영, “이전적지 공원으로서 서울 보라매공원의 변화와 의미”, 『한국조경학회지』 51(1), 2023, pp.85~97.

- [웅크린 이야기들] 친절한 들판, 친절한 마음
- 알멘트 슈테트바흐(Allmend Stettbach)는 스위스 취리히의 동쪽 경계에 있는 들판이다. 뜀걸음으로 5분이면 가로지르는 넓은 풀밭 한쪽으로 나무가 드문드문 자라는 거친 언덕이 자리한다. 다소 생경한 이곳의 풍경은 1980년대 취리히산에 터널을 뚫으면서 파낸 40만㎥의 흙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처음 만들어졌다. 지하 깊은 곳에서 꺼낸 흙은 척박하고 예산은 적었기에 조경가는 이곳에 통상적인 공원의 이미지를 구현하지 않기로 한다. 대신 연접한 기찻길의 소음을 막는 언덕을 만들고 몇 그루의 선구 식물을 심은 것이 계획의 전부다. 그리고 한 해에 두 번 풀을 베고 10년에 한 번 생물 조사를 하며 자연이 스스로 자리를 찾게 두기로 한다. 프로젝트가 실행된 당시에는 투박한 결과물을 두고 냉소적인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4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도시에서 보기 드문 초지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보호지역이 되었다. 독일어 알멘트(allmend)는 공유지(common)(또는 common land)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보호구역인 이곳 역시 모두가 공유하는 땅으로, 누구나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강아지와 산책을 하거나, 장난감 자동차를 가지고 놀거나, 산악자전거를 타거나, 양궁 연습을 해도 된다. 홀로 언덕 위에 앉아 지는 해를 보며 시를 쓰거나 이상한 춤을 춰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행동은 이 들판이 천이의 초기 단계에 머무르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듯하다. 종종 홀로 이곳을 찾는다. 매번 같은 경로로 반시간 정도 걸으며 관찰하고 기록한다. 지난여름에는 열기를 피해 줄기 끝에 모여 마치 하얀 꽃무리처럼 보이는 달팽이들을 보았고, 가을비가 오기 시작할 즈음에는 비를 피해 꽃 속에 숨은 작은 벌과 축축한 풀밭에 아랑곳하지 않고 둘만의 저녁 소풍을 즐기는 연인을 보았다. 화려하고 복잡한 계획이나 시설물 없이도, 척박한 불모지에서 공유지가 된 이 들판은 도시의 모든 존재를 차별 없이 반긴다. 자연의 시간을 존중하고 40년 넘는 세월 동안 이곳에서 일어난 작은 변화를 관찰하며 사랑하고 기록해 온 사람들의 친절함 덕분이 아닐까. 어제 새벽, 오래간만에 들판을 다시 찾았다. 이슬일까, 아직 땅에 닿지 못한 채 나무 위에 머물던 지난주의 눈송이가 녹은 것일까, 나뭇가지마다 작은 물방울이 많다. 자세히 보니 작은 물방울 안에도 섬세하고 복잡한 세계가 담겼다. 질척거리는 진흙 길을 걸으며 물방울들을 사진에 담았다. 다음에는 또 어떤 발견을 할지 궁금해하며 걸음을 이어갔다. 2024년 가을 기록. ---- 느린 속도로 걸으며 바라볼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도시에서 숨을 곳을 찾는 수줍은 많은 새나 장마에도 꽃이 피는 길가의 작은 풀들, 더위를 피해 벽돌 사이에 움츠린 달팽이. 이들의 목소리는 결코 크지 않지만, 도시라는 교향악에 꼭 필요한 낮은 음계를 더한다. ‘웅크린 이야기들’은 이미지를 곁들인 글, 또는 글을 곁들인 이미지를 통해 우리 곁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보지 못하는 것, 그러나 결국 보아야만 하는 이 웅크린 존재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신영재는 스위스 취리히 연방공과대학교(ETH) 건축학부 조경학 석사 과정에 재학 중이며 조경설계사무소 초신성의 소장이다.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아름답고 쓸쓸한 것에 관심이 많다.

- 사가람 열린 정원
- 사가람과 사천여자고등학교 ‘사가람’은 사천시의 옛 이름으로, ‘물가에 가까운 마을’이라는 뜻이다. 남해안 가까이 위치한 사천시는 작지만 강한 소도시로, 아름다운 자연으로 유명할 뿐 아니라 항공 우주 산업 등 미래 비즈니스가 집중적으로 벌어질 곳이다. 사천여자고등학교(이하 사천여고)는 사천시 구도심 한가운데 있는 미래 여성 실무자를 위한 실업계 특성화 고등학교다. 1966년 설립되어 60년째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경남 지역의 대표적 여성 교육 기관이다. 깊은 세월의 두께만큼 노후화된 운동장은 학생들의 꿈을 키우기엔 한계가 있는 공간이었다. 체육관과 급식소 건물을 증축하면서 버려지게 된 외부 공간도 개선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에너지 넘치는 청소년기 학생들의 다양한 활동을 수용할 수 있는 흥미로운 공간이 절실했다. 이러한 열망을 담아 사천시의 옛 명칭을 딴 ‘사가람 열린 정원’으로 프로젝트 이름을 짓고 지역성을 지닌 새로운 공간의 재탄생을 목표로 추진했다. 첫 디자인 접근은 학생들이 마치 물줄기처럼 자유롭게 흐를 수 있는 열린 공간을 만드는 것이었다. 문정현 이사장(사천여고)은 “학교는 공장이나 감옥이 아니다. 모든 학생들의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자유로운 열린 공간이어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그는 학생들이 꿈을 드높일 수 있도록 한계가 없는 공간과 여러 영감을 주는 열린 공간을 지원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교육 철학을 드러낼 수 있도록 자유롭고 흥미로운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운동장 개선 공사(1단계), 정문 및 주차장 개선 공사(2단계), 운동장 생태정원 조성 공사(3단계)의 세 단계로 나뉘어 기획, 설계, 시공이 5년에 걸쳐 진행되어 2024년 봄에 완공됐다. 사업 전 대상지는 여고의 낭만을 충족시켜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건물을 제외한 대부분의 외부 공간이 운동장과 맞닿은 흙바닥이었다. 진입부는 차량과 보행자가 뒤섞여 혼란했고, 녹지는 활용도가 거의 없을 뿐아니라 관리가 안 된 수목으로 인해 지저분한 인상을 주었다. 사천여고는 학교 철문을 항시 개방해 운동장을 지역 주민과 공유하며 사용하고 있었는데, 시설이 노후해 학생과 주민 모두 이곳을 사용하는 데 많은 불편을 겪고 있었다. 특성화 고등학교인 사천여고는 전문교과와 보통교과 융합 수업이 많다. 수업의 폭이 넓고 활동 중심의 수업이 많아 이러한 수업을 수용할 수 있는 다양한 외부 공간 조성이 시급했다. 특히 사천여고의 자랑인 사회적 협동조합, 영화 스쿨, 특색 있는 여러 동아리 활동과 연계하고 지역 주민과의 공유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을 장기 목표로 삼아 단계별로 외부 공간을 바꾸어 나가는 계획을 세웠다. 황량한 운동장에서 다양한 활동을 담는 광장으로 진입로, 불규칙과 규칙: 정문에서 본관 입구 사이에는 포장되지 않은 도로가 있을 뿐 제대로 된 보행로가 없어서 학생들이 택배 차량 등 차량과의 충돌 위험에 노출되었다. 학생들을 보호하고 쾌적하게 걸을 수 있는 포장도로를 마련하기로 했다. 도로는 4m마다 반복되는 줄무늬 구획을 기본으로 하며, 이 프레임 내에서 밝은 회색에서 검은색으로 연결되는 불규칙한 그라데이션 픽셀 패턴을 통해 보행자와 차량 통행로를 구분했다. 보행로와 차도 사이에 단차를 두지 않아 차량이 없을 때는 보행 공간으로 사용하게 하고, 반드시 보차분리가 필요한 부분에는 간격을 두고 볼라드를 설치했다. 포장 재료로는 일반적으로 쓰는 투수성 인조 화강석을선택했다. 이벤트 광장, 사각으로 만든 사각 광장: 신축된 체육관과 급식소의 전면 공간을 쓸모 있는 이벤트 광장으로 정의했다. 광장의 규모는 약 14.5m×62m로 다양한 활동을 수용하기에 충분하다. 영감을 주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사각형으로 구성된 다양한 정사각 패턴을 만들었다. 여러 가지 정사각 패턴이 다양한 차원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으로 기대된다. 유연한 액체와 같은 공간에 사각형들이 재미있는 방식으로 무작위하게 떠있는 듯한 공간으로 디자인했다. 지역 사회와 소통하는 열린 학교 문이 아닌 길을 인도하는 친구, 철문 없는 학교: 기존의 정문은 무거운 철문이었다. 녹슨 철문은 사람이 직접 열고 닫는 수동식이라 항상 열린 채로 두었기에 주민들은 자유롭게 학교를 출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돈되지 않은 주변 환경 때문에 사람들을 환영하는 밝은 분위기를 내지 못했고, 불법 주차 차량을 막을 수도 없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거운 철문을 철거하고 자동 유압식 볼라드를 설치했다.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는 항상 열려 있고 차량은 선택적으로 출입을 허가할 수 있게 됐다. 학교의 역사를 간직한 모던한 입구: 주어진 조건을 백지화하지 않고 어떤 것을 남기고 어떤 것을 철거해야 할지 평가해 존치 여부를 정했다. 현대적인 분위기로 변신을 꾀했지만 내재된 역사를 지우지 않는 것이 기본 원칙이었다. 이에 따라 학교 정문을 완전히 철거하지 않고 기존 문주 하나와 간판을 남겨 재활용했다. 기존 경비실 역시 입면을 골강판으로 감싸 리모델링해 활용했다. 주차장, 보행에 친절한 진입부: 보행자와의 간섭이 심했던 차량 동선을 정비하고 주차장을 한쪽으로 조성했다. 비상시나 이벤트가 열려 주차 공간 확장이 필요한 경우에만 기존 주차장을 활용하도록 해, 포장 공간은 온전히 학생들의 안전한 등하교 공간이 되도록 했다. 생태 친화형 학교와 열린 공간을 위한 프로세스 빈 운동장에 생명을: 기존 흙바닥을 투수 기능이 있는 인조 화강석 포장도로로 바꾸어 보행의 편의를 꾀하면서도 친환경적 해법을 더하고자 했다. 이용이 적었던 운동장 모서리 공간에는 생태정원을 조성해 빗물을 흡수하도록 했다. 버려진 것과 다름없던 교정 남측 공간에는 교목인 월계수와 교화인 동백꽃 나무가 자라고 있었는데, 수목 주변에 어울리는 식재를 하고 텃밭을 조성해 휴게 공간이자 야외 학습 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열린 프로세스: 주입식 교육과 강박적 교육 공간에서 열린 학습의 터로 거듭나도록 다양한 행동 방식이 유발될 수 있는 열린 공간을 조성하는 데 있어 그 과정 또한 참여형이 될 필요가 있었다. 마지막 단계인 생태정원 조성 사업을 진행하며, 문정석 소장(로컬프로젝트)이 세 차례에 걸쳐 학생과 교직원 참여 워크숍을 진행했다. 이 과정을 통해 1, 2단계로 진행된 외부 공간 개선 사업에 대한 사용자의 의견을 청취하고, 이들의 제안을 반영해 풍부한 공간 조성의 밑바탕을 마련할 수 있었다. 모든 공간이 완성된 뒤, 입구에서 교실까지 이어지는 보행로에는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해 교화인 동백꽃을 새겼다. 이 도색과 강조 패턴 작업을 통해 사람들을 보행 동선으로 인도하고 보행로와 차량 동선을 좀 더 명확하게 분리할 수 있게 했다. 사천 시내에 위치한 사천여고는 오래전부터 방과 후 지역 주민에게 공원 같은 역할을 했던 곳이다. 잠시 쉬고자 이곳을 찾는 주민들을 위해 그늘과 휴게 공간을 마련함으로써 사천여고의 교정이 지역의 공공성을 실현하는 중심지이자 열린 정원으로 자리매김하도록 했다. 앞으로도 이곳에 학생과 지역 주민 모두의 풍부한 추억과 이야기가 쌓이기를 바란다. 박혜리·문정석·연혜진 인터뷰 담의 경계를 허물고, 다양성을 담는 운동장 글 김모아 기자 개선 사업은 노후 시설 보수에 그치기 쉽다. 학교 외부 공간 전반을 새롭게 바꿀 수 있던 동력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박혜리(이하 리) 시작은 사천여자고등학교(이하 사천여고) 외부 공간 개선 사업이 아니었다. 어느 날, 평소 존경하던 어른인 문정현 대표(사천여고 이사장)에게 전화가 왔다. 문 이사장은 경남 지역에서 다양한 사회 공헌 및 문화예술 활동 지원 사업을 펼쳐 지역에서 존경받는 어른이었다. 교육 공간에 대한 남다른 비전이 있는 분이라, 사천여고의 외부 공간이 학생들의 꿈을 키워나가기엔 너무 열악해 체육관과 급식소 증축을 시작으로 점차 개선하기로 했다며 자문을 요청해왔다. 당시 여건상 멀리서 응원하는 마음으로 자문만 해드렸다. 이후 증축된 체육관 앞에 광장을 만들려고 하는데, 그냥 포장 시공 업체 시안으로 공사하는 것이 맞는지 고민이 된다며 다시 도움을 구해왔다. 도면을 보니 일반 도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보도블록 패턴이었다. 순간 오지랖이 발동했다. 나름 학창 시절의 낭만과 추억을 쌓을 수 있는 학교 배경이 이래서는 안 되지 하는 마음에 제한된 공사 금액 안에서 시공할 수 있는 광장 패턴 디자인을 살짝 도와준 일이, 이후 연속된 외부 공간 개선 사업으로 이어져 사가람 열린 정원 프로젝트의 시발점이 됐다. 세 단계로 구분된 프로젝트가 꽤 복잡하게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리 운동장 개선 공사(1단계), 정문 및 주차장 개선 공사(2단계), 운동장 생태정원 조성 공사(3단계)는 사실 편의상 내가 구분한 체계다. 실제로는 연계성 없이 개별로 발주됐다. 만약 통합 프로젝트로 발주됐다면 전체적인 마스터플랜을 세워서 더 효율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 1단계와 2단계 사업은 어댑티브스를 주축으로 진행할 수 있었지만, 3단계 사업의 경우 식물을 다룰 수 있는 전문가와 함께하면 더욱 질 좋은 공간을 만들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섰다. 최근 ‘시흥시 오이도 어촌뉴딜사업’을 함께 진행한 연혜진 소장(민앤그린 조경설계사무소)에게 곧장 연락했다. 또 학교 공간을 재구조화할 경우, 사용자 참여 디자인이 필수이기 때문에 촉진자가 필요했는데, 이 분야에서는 빅바이스몰을 통해 연을 맺었던 문정석 소장(로컬프로젝트 건축사사무소)말고는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두 분과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됐다. 사실 적절한 설계비를 받을 수 있는 프로젝트도 아니었고, 그 돈조차 서울과 사천을 오가는 교통비로 다 소요되는 상황이라 두 분이 참여를 수락해주어서 감사하면서도 미안했다. 문정석(이하 석) 덕분에 프로펠러 비행기를 처음 타봤다. 사천여고가 사천공항에서 가깝다보니 비행기를 주로 이용했는데, 김포와 사천을 오가는 새벽 비행기가 프로펠러 비행기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나 쓰인 줄 알았던 비행기를 코앞에서 보고 직접 타보니 신기했다. 리 처음엔 기체가 너무 작고 흔들림도 심해서 너무 무서웠다(웃음). 학교 공간 설계 시 참여 디자인이 필수 요소가 된 모양이다. 석 2022년 개정된 ‘교육시설법’에 의해 교육 시설의 설계 전에 지역 사회 연계 가능성, 교육 과정 운영 및 교수 학습 방법에 따른 공간 구성, 사용자 참여를 통한 디자인 계획 등에 관한 사전 전략 수립 등이 사전기획의 방식으로 의무화됐다. 사전기획의 주요 내용 중 하나가 사용자 참여를 통한 디자인 계획 및 안전에 관한 사항이다. 이제 전문가나 학교 운영자 몇몇의 의견만으로 학교 공간을 마음대로 바꿀 수 없게 된 것이다. 사용자가 누구인지 명확히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학교 재량에 따라 학생, 학부모, 교사, 지역 주민 등을 설계 워크숍에 참여시키는 게 일반적이다. 사가람 열린 정원 프로젝트를 통해 학생들에게 어떤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었나. 석 담당한 업무가 참여 워크숍이다 보니, 디자인 결과물보다 함께 공간을 만드는 과정을 경험하게 해주는 데 의의를 뒀다. 보통의 학생은 학교를 다니며 자신이 사용하는 공간에 대해 요구하고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걸 모른 채 졸업한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험의 부재는 성인이 되어서까지 영향을 미쳐서, 훗날 자신이 거주 영역에서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무엇인지 모르고 살게 만든다. 자신이 낸 목소리를 전문가들이 실제 공간으로 구현해 주는 과정을 통해, 권리를 행사하는 법을 깨닫게 하고 일종의 민주주의를 체험하게 해주고자 했다. 교감과 교장을 비롯해 부장급 교사와 실무 차원에서 도움을 주고받아야 하는 행정실장이 교직원으로 참여했다. 학생의 경우, 다양한 학년에서 희망하는 학생을 모집하는 게 이상적이겠지만 학업으로 바쁜 이들을 참여시키는 게 쉽지 않다. 임원 학생과 희망하는 학생들이 참여했다. 학교에서 독려를 많이 해서 참여율이 높았고 지역 주민과 졸업생까지 30명 정도가 함께 했다. 함께 학교 지도를 그리고 모형도 만들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연혜진(이하 진) 학생과 교직원은 물론 주민과 졸업생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한 워크숍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워크숍 과정을 보며 이 현장은 설계가 주도하기보다 참여자들이 의견을 마음껏 낼 수 있도록 독려하는 가이드의 역할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그들의 의견이 꼭 공간으로 나타나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는 프로젝트였다. 학교라는 공간은 학생을 보호할 수 있도록 안전에도 귀 기울여야 하는 곳이다. 사가람 열린 정원은 그 이름처럼 ‘열린’ 공간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인다. 리 학교를 두르는 담이 있고 출입은 정문으로만 이루어지기에 완전히 열린 공간은 아니다. 사방에 꽤 넓은 차도가 있기에 안전 측면에서도 담장은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사천여고가 열어둔 건 정문이다. 특성화고인 사천여고는 오후 네 시경이면 학생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 빈 공간이 된다. 그럼 이 운동장을 지역 주민들이 공원처럼 사용한다. 주변에 공원은 물론 쉴 만한 공간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가 일종의 공공 공간 역할을 하는 셈이다. 기존의 정문도 늘 열려 있었지만 불법 주차를 막을 수 없었기에, 자동 볼라드를 설치해 사람은 통과시키고 차량은 통제하는 형태로 바꿨다. 예산의 여유가 있었다면 담장도 손대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특히 대로변 버스정류장을 담장과 연계해 하이브리드한 스트리트 퍼니처로 만들면, 주민과 좀 더 적극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다기능적 담장이 되지 않을까 했다.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해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오히려 많은 주민을 이곳에 오게 해 서로를 감시하게 하는 효과를 내야 한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었다. 석 사천여고가 특성화 학교라 운영 방식이 특이하다. 인문계 고교에서 대학에 진학할 의사가 없는 학생들이 이 학교에서 나흘 정도 수업을 받기도 한다. 개방적인 교육 시스템이다. 그런 점에서 사천여고의 열린 운동장은 학교의 운영 방식과 퍽 잘 어울리는 공간이다. 운동장을 파고드는 형태의 녹지 공간이 독특하다. 흔히 비정형은 정형보다 비효율적인 도형으로 여겨지는 데 어떤 의도로 설계한 공간인가. 리 연역적인 결과로 완성된 공간이다. 워크숍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의견이 안전한 지름길의 필요성이었다. 체육관과 본관 사이를 오가는 학생들은 본능적으로 가장 짧은 경로를 찾고 반드시 운동장을 밟게 된다. 이때 신발에 묻은 모래 때문에 건물 진입부에서 넘어지는 사고가 종종 발생했다고 한다. 운동장을 밟지 않고도 건물 사이를 오갈 수 있는 지름길이 필요했고, 이 지름길을 감싸는 모퉁이 공간을 작은 정원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또 다른 운동장 모퉁이에는 벤치가 하나 있는데, 하교를 함께할 친구를 기다리는 장소로 주로 쓰인다. 많은 학생이 이용하기엔 너무 좁기에 공간을 확장할 필요가 있었다. 기능을 생각하며 그리다보니 운동장을 땅따먹기 하듯 정원이 파고들어가는 모양 자체가 디자인 언어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을 빠져나와 바로 쉴 수 있는 공간, 운동장을 하나의 풍경처럼 바라보며 쉴 수 있는 공간 등을 설정했고 원과 삼각형을 활용해 디자인했다. 대부분의 체육 활동은 체육관에서 이루어지기에 운동장을 크게 유지할 필요가 없었다. 운동장은 원할 때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는 공간으로 쓰게 하고, 각 모서리는 면하고 있는 건물의 성격 혹은 그 장소에 필요한 기능을 첨가한 정원으로 만들었다. 디자인을 실현했다기보다 필요가 디자인을 완성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 같다. 할 수 있다면 밀양의 밀주초등학교처럼 운동장의 더 많은 부분을 정원으로 만들고 싶었다. 이벤트 광장 패턴의 완성도가 인상적이다. 리 나 또한 놀랐다. 광장 패턴을 그렸을 당시 네덜란드에 있었기에 시공 현장을 한참 뒤에나 보게 되었는데, 비교적 완성도 높게 시공되어 있었다. 광장 도면을 그릴 때 패턴을 드러내기 위해 모든 블록을 한 땀 한 땀 실사이즈로 그렸는데, 그리면서도 시공하면 당연히 오차가 생길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도 도면과 거의 똑같은 광장이 완성된 건 담당 주무관과 시공자의 노력 덕분이라 생각한다. 전달한 디자인을 소중히 실현시켜 준 그 노력과 마음에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이때의 감동이 사가람 열린 정원 프로젝트에 본격적으로 빠져들게 한 계기이기도 하다. 현장의 흔적을 남기고 기존 시설을 재활용하는 일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더 많은 노고가 드는 일이다. 때로는 더 많은 비용이 소요된다는 비판을 듣기도 한다. 리 대상지가 황폐했지만 재활용할 수 있는 것이 없을 지 계속해서 살폈다. 그러다 마주한 게 경비실과 문주, 간판이었다. 경비실은 나라장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형태였고 상태가 좋았다. 학생들의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고 기능성을 높일 수 있는 곳으로 위치를 바꾸고 골강판을 둘러 외부 마감만 새로 했다. 문주와 간판도 재활용해 학교에 내재된 역사를 느낄 수 있게 했다. ‘어댑티브스(Adaptives)’는 내가 추구하는 ‘적응적 재사용(adaptive reuse)’이라는 가치를 담은 사명이다. 우리는 부수고 새로 짓는 게 당연한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 걸 백지화해 새로 만드는 게 효율적이고 비용이 적게 든다는 건 지극히 행정적 편의의 관점에 치우쳐 상황을 오독한 것이다. 대상지 분석 과정에서 무엇을 재활용할 수 있는지 꼼꼼히 살피고 알아보면 실제로 과다한 폐기물을 줄일 수 있고, 비용 절감에도 도움이 된다. 적응적 재사용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더 실용적이고 훌륭한 설계법이고, 지속가능한 환경을 실현할 수 있는 앞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기본적 가치라 믿는다. 기존 대상지에 꽤 넉넉한 규모의 녹지가 있었다. 그곳에서 어떤 가능성을 읽었는지 궁금하다. 진 일반적인 학교와 달리 스탠드 대신 넓은 녹지가 있어서 놀랐다. 녹지 안에 있는 수목도 독특했다. 보통은 관리가 편한 눈주목, 향나무를 심기 마련인데 이곳의 녹지에는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배롱나무, 이팝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녹지로 들어갈 수 있는 길만 열어주어도 활용도와 그 가치가 높아질 것으로 기대했다. 가장 반가운 요소는 녹지 뒤 등나무 쉼터였다. 한때는 등나무 쉼터를 곳곳에서 볼 수 있었지만, 구조물이 낡고 지저분해져서 사라지는 추세다. 사천여고의 등나무 쉼터는 최근에 리모델링을 했는지 조적 기둥도 튼튼했고 등나무의 생육 상태도 좋았다. 다만 관리되지 않은 녹지에서 마구잡이로 자란 가이즈카 향나무와 은행나무, 실화백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주차장에서 등나무 쉼터로 이어지는 보행로의 폭이 너무 좁아 활용도도 낮았다. 녹지에 빽빽하게 심긴 나무를 걷어내서 등 나무 쉼터의 존재를 되살렸다. 정돈된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까지 더해 경관적으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실용적인 공간으로 만들었다. 운동장 남측에 조성된 소공원의 경우, 수목들이 조각처럼 서 있는 공간으로 보인다. 진 본래 목서와 가이즈카 향나무, 교화인 동백나무, 교목인 월계수가 있던 공간이다. 식재 설계를 하기보다는 기존의 나무들이 돋보일 수 있는 공간으로 연출하고자 했다. 크게 자라난 목서가 강조되도록 근처에 있던 동백나무를 옮겨 심어주고, 등나무 쉼터를 가리는 몇몇 수목은 제거했다. 학생과 교직원이 느끼는 학교 외부 공간에 대한 인식이 다를 것 같다. 석 학교는 ‘시간’이라는 개념에 지배받는 독특한 사회다. 50분 수업, 10분 쉬는 시간, 1시간 점심시간 등 시간에 맞추어 모든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학생들은 이곳에서 시간관념을 배운다. 이러한 특수성 때문인지 교사는 시간 운용에 방해가 되는 모든 요소를 불편사항으로 여기게 된다. 사천여고 운동장의 지름길 역시, 제시간에 가야 하는 공간에 도달하기 위해 생긴 것이다. 어떤 공간이 생긴다고 하면 교사는 정해진 시간 내에 학생들이 이동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지 생각하게 된다. 학생은 무의식중 내가 저 공간에 쉬는 시간 내에 다녀올 수 있는지, 점심시간에 밥을 먹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게 된다. 지름길이 정형보다는 비정형적 형태를 띠게 된 이유도 다듬어진 모양보다 비정형이 이동 효율이 좋기 때문이다. 교사들은 생각보다 외부 공간에 대한 요구가 크진 않다. 업무 강도가 높다 보니 외부 공간을 즐기기보단 그 시간에 업무를 하려는 의지가 더 커보였다. 관심이 있는 부분은 주차장의 주차 대수와 주차장에서 본관 건물로 이어지는 동선 정도였다. 리 녹지 내 산책로도 일종의 지름길이다. 처음에 녹지를 보존하려고 했었는데 학생들의 의견을 듣고 안에 길을 내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덕분에 이 산책로가 전체 공간을 엮어주는 동선이 되었고 등나무 쉼터의 활용도까지 높아졌다. 외부 공간에 대한 학생들의 요구사항이 꽤 구체적이었던 모양이다. 진 외부 공간에 대한 이해도와 원하는 바가 명확했다. 꽃 터널이 있었으면 좋겠다, 흔들의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친구랑 단둘이 조용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등 구체적인 의견이 제시됐다. 이 내용을 잘 반영하기만 해도 성공이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운동장을 운동하는 학생만 쓸 게 아니라 내향적이고 조용히 즐기고 싶은 학생도 사용할 권리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등나무 쉼터가 있지만 단둘이 소곤소곤 대화 나눌 수 있는 퍼걸러를 놓고, 운동장을 바라보며 조용히 휴식할 수 있는 흔들그네도 놨다. 작지만 아기자기한 요소를 많이 넣어주려고 했다. 학생들이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는 점도 고려했다. 리 재학생 중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학생도 있고,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만 있지 않기에 토론을 하거나 영상을 찍고 영화 상영을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무대가 필요한 활동이 많아서 동백꽃 모양의 무대와 잔디 무대를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실현하지 못한 게 아쉽다. 석 요즘 세대의 학생은 외부에서 창작 활동을 펼치는 경우가 많다. 그런 활동을 지지해 줄 수 있는 환경이 학교에 마련되어야 한다. 공부라는 게 책상에서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학교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학생들이 진로를 찾는 데 도움을 줄 필요가 있다. 교육 방식이 변화하고 학생 수는 감소하고 있는데, 교육 공간은 그에 발맞춰 달라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석 우선 소프트웨어가 바뀌는 속도를 하드웨어가 따라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공공 공간의 질이 민간이 만드는 공간의 질을 따라잡기 힘들다는 점도 엄밀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학교 담장 허물기, 학교 숲, 그린스마트 미래학교 등 학교 공간에 대한 다양한 실험이 이어져 왔다. 그 흐름 속에서 어떤 공간이 살아남았는지 살펴보니 결국 가변성이 가장 중요한 키워드 같다. 아지트 같은 포켓 공간, 생태 정원 등 다양한 공간이 교내에 만들어졌지만 학교 사회의 특수성 때문에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유연하게 쓸 수 있는 여지를 공간에 남겨두는 게 의미가 있지 않나 싶다. 기존 학교 공간 대부분이 하나의 기능에 주목해 만들어졌는데 이제 그 기조가 변화하고 있다는 데 의미가 있다. 더불어 이러한 실험이 가능한 이유는 학생 수 감소로 인해 공간적 잉여가 생겼기 때문이라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리 학교 운동장이 꼭 군대 연병장을 연상시킨다는 이야기가 기억난다.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려 보면, 여고를 다닌 나는 운동장은 거의 쓰지 않았고 대신 학교 옥상에 있던 정원에 자주 갔다. 그래서 사천여고에도 되도록 작더라도 감수성을 기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려고 했던 것 같다. 워크숍을 통해 학생 대부분 산책이나 쉼에 집중된 활동을 선호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방과 후 이곳을 찾는 주민 역시 간단한 기구를 이용해 운동을 하거나 정적인 휴식을 즐겼다. 그래서 사유할 수 있고 아기자기한 활동을 담는 공간을 만드는 데 집중한 것 같다. 현재는 교육 시설 대부분이 폐쇄적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이 사천여고처럼 점차 지역 사회에 열리는 형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진 열린 학교운동장 사업을 진행했을 때 발생했던 문제들이 생각난다. 쓰레기, 소음, 치안 등 여러 문제가 발생했지만, 그 문제점을 해결해나갈 방법을 모색해 학교 운동장을 열린 공간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2018년 ‘디자인프레스’가 진행한 건축 시리즈에서 유현준 건축가 편(각주 1)을 굉장히 공감하면서 읽었다. 학교라는 공간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저층 형태의 건물을 분산해 배치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건물과 건물을 오가며 잠깐이라도 자연스럽게 외부 공간을 이용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나무가 많기로 유명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특히 건물 앞에 있던 커다란 감나무의 그늘을 자주 이용했다. 그곳에서 고무줄 놀이를 하고 친구와 담소를 나눴다. 학교의 외부 공간이 이처럼 운동을 잘하는 학생뿐 아니라 다양한 성향의 학생을 포용하는 다양성 높은 공간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석 장기적인 관점에서 학교 운동장을 지금보다 더 열린 형태로 쓸 필요가 있다고 본다.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학생이 아닌 일반 사람들이 학교 공간에 관심을 갖게 되면, 학교 공간의 사회적 담론화로 이어진다. 관여된 사람이 늘어날수록 자연히 정치인들도 지금보다 학교 공간 환경에 대해 주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학교가 더욱 공공 공간화되어야 학교 공간을 바꿀 수 있는 예산을 끌어올 수도 있지 않을까? 무엇이 답인지는 알 수 없지만, 교실이 밀집되어 있는 학교 건물이 한쪽에 몰려 있고 남은 땅은 운동장으로만 쓰는 현재의 학교 공간 구성은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 리 한 대학에 출강했을 때, 한강변 아파트 단지를 대상지로 삼아 마스터플랜을 그리는 도시설계 수업을 진행한 적이 있다. 그중 한 팀이 학교 시설을 한강 쪽으로 옮겨 한강을 향해 열린 문화 시설로 만들고 휴일에 학교 공간을 시민과 공유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현실적으로는 학교는 교육청 관할이기에 그 위치를 바꾸기 쉽지 않겠지만, 일종의 열린 공공시설로서 학교 외부 공간의 가치를 최대화할 수 있도록, 도시계획과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석 교육 기관의 설계 인허가 권한을 교육청이 갖고 있어서 생기는 문제일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행정과 교육 행정이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더 좋은 학교 공간을 만드는 사례가 생기고 있다. 소수의 성공 사례를 일반화해 모든 공간에 적용하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앞으로 한국의 학교 공간이 점점 더 발전해 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각주 정리 1. 유제이, “유현준 건축가가 생각하는 ‘좋은 학교, 나쁜 학교’”, 디자인프레스 2018년 7월 4일. 글 박혜리 어댑티브스 소장 디자인 책임 어댑티브스(Adaptives Design & Research) 건축 및 도시설계 박혜리 조경 설계 민앤그린(3단계), 우진엘에스디(1단계) 참여 디자인 로컬프로젝트(3단계) 토목 설계 동영이앤지(2단계) 발주 사천여자고등학교 위치 경상남도 사천시 정동면 옥산로 47 면적 2,876㎡ 준공 2024년(3단계), 2023년(2단계), 2022년(1단계) 사진 노경, 어댑티브스 어댑티브스(Adaptives Design & Research)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공간과 환경에 대한 이슈를 디자인과 리서치로 풀어내는 회사다. 도시 공간이 지나온 시간을 담으면서도 어떻게 현재와 미래에 쓸 만한 적응적 (재)사용이 가능할지 고민하고 있다. 박혜리는 네덜란드 로테르담 소재 KCAP의 어소시에이트 파트너로서 2021년부터 서울에 상주하며 한국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다. 최근 어댑티브스를 설립해 색다른 설계 방식과 디자인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네덜란드 공인 건축사이자 도시계획가이며 대한민국 건축사다. 문정석은 건축설계사무소에서 다수의 도심 복합 상업 시설을, 시민단체에서 작은 도시 공간 만들기를 통한 지역 변화를 주민과 기획하고 실천하는 상반된 일을 진행했다. 디자인을 통한 사회 참여, 참여 디자인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하고 있다. 현재 로컬프로젝트 건축사사무소의 소장이다. 연혜진은 가천대학교와 서울시립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종합건축사사무소 건원에서 실무를 경험했다. 현재 민앤그린 조경설계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건축 및 주택 외부 공간, 도시공원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목재친화형 목재도시 조성사업, 선로변 지장수목 관리 가이드라인 수립, 대전 도심구간 경부, 호남선 지하화 개발 방안 연구 용역, 기상관측 환경 개선 사업, 양동구역 제11, 12지구 개방형 녹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업하고 있다.

- 2025 서울국제정원박람회, 전시 정원의 기회와 남겨진 과제
- 정원과 공원의 경계와 개념이 희미해진 시대의 틈을 비집고 공원과 정원 사이를 기웃거리는 혼종의 정원이 새롭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2015년 제1회 서울정원박람회를 기점으로 정원 문화 확산과 대중화를 목표로 한국형 전시 정원 모델이 출현했다. 학생, 시민, 기업, 전문가 등 다양한 주체의 참여는 정원 문화 저변의 확대에 일부 기여했으며, 전시 정원은 저년차 조경가의 성장을 위한 관문이자 정원 작가 등용문이 되었다. 최근에는 기업이 기후 위기 대응 전략의 일환으로 브랜드 정체성을 강화하며 시민과의 연결을 꾀하기 위한 기업정원을 조성하기도 한다. 하지만 박람회 종료 후 유지·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 존치 정원, 특별한 차별점이 없는 주제와 유행에 영합한 디자인 전략, 브랜드를 위한 테마파크가 된 정원 등 전시 정원의 한계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2025 서울국제정원박람회는 10주년을 맞아 보라매공원을 시민대정원으로 탈바꿈시키겠다고 선언했다. 40여 년의 역사를 가진 보라매공원은 관악구와 영등포구와 맞닿아 있어 많은 시민들의 일상 공간으로 큰 사랑을 받아온 곳이다. 역대 가장 큰 규모의 대상지인 보라매공원에 그 어느 때보다 많은 111개의 정원이 조성됐다. 특히 올해에는 기업·기관·지자체 정원의 수가 대폭 늘어났는데, 기업정원의 개수가 20개에 달한다. 열 번째 행사라는 의미 있는 숫자를 기념하며 전시 정원 소개를 넘어 서울정원박람회의 방향 재설정을 모색하는 지면을 마련했다. 서울(국제)정원박람회의 가치와 역할을 되짚고 남겨진 과제를 살핀다. 진행 김모아, 금민수, 이수민 사진 유청오 디자인 팽선민 ------ 정원의 세계로, 가든라이팅 _ 이명준 동네 공원 + 정원 = 시민대정원? _ 서영애 도시 ESG 전략으로서 기업정원 _ 이호영 초청정원 세 번째 트랙 _ 박승진 비행사의 정원 _ 마크 크리거 작가정원 금상 | 마지막 식사 _ 김기한 은상 | 영원한 생명의 정원 _ 김윤빈 네스팅 _ 틸 레발트·가르트흐 볼리손 동상 | 워터루츠! _ 알레산드로 트리벨리 제3의 플라타너스 숲 _ 이양희·오세훈 ----- 2025 서울국제정원박람회 작가정원 국제공모 주제 세 번째 자연 규모 5개소(250㎡ 내외/개소당) 지원금 7천만원(개소당) 상금 금상: 1천만원(1팀) 은상: 6백만원(2팀) 동상: 3백만원(2팀) 주최 서울특별시, 서울국제정원박람회 조직위원회 주관 환경과조경, 동아일보 위치 서울시 보라매공원 일대 기간 2025. 5. 22. ~ 10. 20.(박람회 이후 존치)

- [2025 서울국제정원박람회] 정원의 세계로, 가든라이팅
- 언제부터였을까, 정원이 우리 일상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어릴 적 분재와 꽃꽂이 취미의 유행으로 여성을 중심으로 소비되던 식물이 2010년대 이후 정원박람회라는 대형 이벤트와 SNS 콘텐츠의 주요 소재가 되면서 전국민 모두가 즐기는 밈(meme)이 되었다. 오픈스페이스와 생태 서식지가 환경 오염과 기후 위기 대응의 방편으로 우리 ‘사회’에 들어왔다면, 정원은 우리 감각에 미적 즐거움을 주는 매체(medium)로 우리의 ‘일상’에 향수처럼 퍼졌다. 일반적으로 공원과 오픈스페이스 디자인이 도시, 문화, 생태적 맥락 등을 신중히 고려한 사회적 예술이라면, 정원 디자인은 디자이너의 순수한 창의성으로 자유로운 형식과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자율적(autonomous) 예술 활동이다. 그리하여 우리 문화에서는 정원 디자이너를 종종 정원 ‘작가(author)’라 부른다. 올해 10주년을 맞은 서울정원박람회는 보라매공원이라는 거대한 오픈스페이스를 정원의 세계로 탈바꿈시켜 현재 한국 정원 디자인과 문화의 최전선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디자이너의 자기완결적 창의성이 돋보이는 작가정원과 초청정원, 기업‧기관의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공간 디자인을 통해 구축하는 방식을 엿볼 수 있는 기업‧기관정원, 정원 디자인 교육의 산물인 학생정원 등 다채로운 정원 팔레트가 공원 도처에 펼쳐져 있다. 박람회장 입구에 다다르면서 우리는 서서히, 그러나 강력하게 정원에 가스라이팅, 아니 ‘가든라이팅(gardenlighting)’ 당하며 정원의 세계에 빠져든다. 의미를 경험으로 지난 십여 년 동안 서울(국제)정원박람회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정원 디자인의 미묘한 변화가 관찰된다. 무엇보다 정원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강박이 줄어들고 대신 직관적으로 정원을 경험할 수 있도록 다양한 연출 전략이 펼쳐지고 있다. 거대한 의미를 정원의 구성에 대입하여 설계 설명 없이는 좀처럼 감지하기 힘들었던 형이상학적인 개념들이, 재료의 물성과 시설물의 형태로 공간에 구체화되고 현상학적인 분위기로 연출되면서 우리에게 직관적으로 체험된다. 김윤빈의 ‘영원한 생명의 정원(Garden of Eternal Life)’은 생태계의 순환, 정원의 생태성, 자연과 인간의 관계라는 의미를 원형(circular)의 공간에서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연출했다. 작품의 경계를 구성하는 링 형태의 동선 구조물 하부는 고사목으로 장식된다. 죽은 나무의 단면을 드러내어 방문자에게 목재 분해 과정을 시각적으로 알아채도록 하여 정원의 생태적 작용과 생태계의 순환을 재현하고 있다. 정원의 내부는 숲 경관, 습지 경관, 초지 경관을 조합하여 생태계를 재현한다. 이 중 숲 경관에 마련된 작은 샘에서는 물을 마시며 가볍게 춤을 추는 듯한 새들의 몸짓이 눈앞에 펼쳐진다. 방문객이 내딛는 동선 표면을 내후성 강판의 거친 물성으로 처리하고 돌더미, 쓰러진 나무, 자생종 초지 등의 거칠음과 병치시켜 인간 문명과 야생 자연의 회복력을 체험하도록 한다.(각주 1) 이와 유사하게 틸 레발트(Till Rehwaldt)와 가르트흐 볼라손(Garth Woolison)의 ‘네스팅(Nesting)’은 새의 둥지 형태에서 모티브를 얻어, 공원의 자연 재료를 생태적으로 부식시켜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기능을 하는 거대한 나선형 미로 구조의 둥지 구조물을 만들어 생태계의 사이클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정원 디자인 전략은 조경 이론가 엘리자베스 마이어(Elizabeth K. Meyer)의 이론을 설명하는 적절한 사례가 된다.(각주 2)마이어는2008년에 발표한 에세이 “지속가능한 아름다움(Sustaining Beauty)”에서 지속가능한 디자인을 “경험의 구축(constructing experiences)”으로 설명하고, 그러한 경험이 “우리를 세계와 연결하고, 생각하게 하고, 함께 있도록 만든다”라고 주장했다. 두 정원에서 생태계의 순환이라는 개념은 경관을 매개로 재현되어 방문객에게 하나의 현상으로 경험하게 하고, 그러한 경험이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자율적 형상 정원의 형태 만들기가 이전보다 자유로워졌다. 직선보다는 자유 곡선이 많아졌고 시각을 즐겁게 유희하는 기하학적 패턴이 증가했다. 형태 만들기가 자유로워졌다는 말은 경직되지 않은 비정형적 형태를 만드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무리하게, 직관적 공간 디자인의 원천이 아닌 단순한 디자인 레토릭으로 소비하지 않겠다는 디자인 태도다. 외부적 여건을 참조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결정적(self- determined)인 경관의 형태를 빚어내는 예술가적 접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판단력 비판(Kritik der Urteilskraft)』에서 아름 다움은 개념에 의한 것이 아닌 대상에 대한 “무관심성(disinterestedness)” 의 판단으로 이루어진다고 설명했다.(각주 3)실용적이거나 도덕적인 목적을 비롯한 일체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아름다움을 파악하는 태도. 정원 디자인이 기능과 교훈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공원과 도시 디자인에서 요청되는 다양한 맥락에서는 다소 해방되어 작가 의 마음 가는 대로 순수한 감각적 즐거움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현대 정원의 자율적 형상 추구는 20세기 초중반 모더니스트의 접근법을 닮았다. 모더니즘 조경의 아이콘인 토머스 처치(Thomas Church)와 로렌스 핼프린(Lawrence Halprin)이 함께 디자인한 주택 정원인 ‘도넬 가든(Donnell Garden)’에서 콩팥 모양을 닮은 소위 생물 형태적(biomorphic) 수영장은 건물의 중심축을 느슨하게 풀어헤쳐 배치한 것 같다. 이번 서울국제정원박람회에 조성된 알레산드로 트리벨리(Alessandro Trivelli)의 ‘워터루츠(Waterrooots)!’는 간결하지만 자율적인 형태가 방문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무한과 통로를 상징하는 원형 형태의 금속 재질 링 구조물이 지상 위에 설치되어 있고, 그 아래 지표면에 부정형의 형태가 강조된 서로 다른 크기의 금속 화단 경계가 마치 땅에 새겨진 것처럼 구성되어 있다. 내부에는 식물이, 주변에는 군데군데 암석이 배치되어 있다. 다양한 형상의 화단이 자연스럽게 형성하는 동선을 따라 걸으며 식물을 감상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링 구조물이 하나의 창틀이 되어 하늘을 담고 있어 무한성의 경험으로 이끈다. 예술로서의 정원 정원은 조경 디자인을 예술로 읽히게 한다. 정원은 19세기 사회적 예술인 공원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오랫동안 조경 예술 형식의 하나였다. 제1의 자연인 야생의 자연을 순치해 일군 제2의 자연인 인간의 문명, 여기에 바로 인간의 문화적 욕구를 반영하는 제3의 자연인 정원이 만들어졌다. 정원 디자인은 조경 고유의 업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정원 예술은 조각, 미술, 건축, 원예 등 다양한 분야가 혼성적으로 결합된 다학제적 실천이자 공간, 시간, 생태를 다루는 하나의 ‘확장된 장(expanded field)’ 속에 위치한다.(각주 4)어쩌면 조경은 정원 덕분에 대중에게 보다 친밀하게 예술 장르로 인식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번 서울국제정원박람회의 작품은 유럽의 대지 미술적 접근인 생태 예술의 경향을 보여준다. 미국의 대지 미술이 거대한 규모와 재료의 거친 물성을 강조해 땅을 조각처럼 형식적으로 변경하면서 숭고의 미학을 드러냈다면, 유럽에서 전개된 생태 예술은 자연의 프로세스 기반의 설치 미술적 접근을 통해 생태학적 메시지를 전달해 왔다. 앞서 설명한 ‘영원한 생명의 정원’과 ‘네스팅’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나무의 자연적 분해 프로세스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생태학적 순환을 재현하고 있다. 대부분의 정원이 물성, 형태, 디테일에 대한 탐구를 주로 정원 시설 물의 디자인을 통해 드러낸다. 공원 부지의 평평한 특성 때문인지 지형 을 디자인하는 정원은 드물다. 마이어는 조경을 대중에게 예술로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 “조경 디자인의 근본이자 전제 조건”이라고 하면서 하이퍼네이처(hypernature) 디자인의 필요성을 주장했다.(각주 5)다소 과장되고 증폭된 자연의 특성을 재현하면서 자연처럼 보이는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있다. 김기한의 ‘마지막 식사(The Last Meal)’는 흡사 페트리 접시(petri dish)처럼 보이는 금속 재질의 거대한 원형 수반을 테이블로 형상화하고 내부를 얕은 수공간으로 마련해 개구리밥으로 가득 채워 우리의 농경지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주변에 심은 큰 잎이 도드라지는 머위와 토란이 자잘한 개구리밥의 질감과 대비된다. 농경지 풍경을 원형의 밥상 위에 올린다는 연출 전략은 그 자체로 독특한 예술 작품으로 인식되기에 충분하다. 정원, 환경 가치를 전달하는 매체 정원은 감각적 아름다움과 더불어 환경에 대한 생각을 담아내면서 비 로소 예술로 완성된다. 자율적 형상 만들기와 현상학적 경험의 연출은 방문자에게 환경적 가치라는 교훈을 자연스레 전달한다. 과거의 정원 디자인이 환경적 가치를 텍스트를 통해 교조적으로 주입하려는 경향이 있었다면, 이제는 그러한 교훈이 정원 공간에 구현되어 우리의 감각적 경험을 통해 체화된다. 마이어는 조경의 지속가능한 아름다움은 경관의 겉모습의 성능(performance of appearance)을 통해 완성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성능은 생 태적 기능을 넘어서 사회적·문화적·환경적 가치를 포함한다. 경관의 경험은 우리에게 “환경을 알아보고, 돌아다니고, 궁금해하고, 관심을 가지도록 하면서, 환경 가치를 배우고 가르치는 지속가능한 실천 방식”이 된다.(각주 6)앞서 설명했듯 작가 정원들은 생태학적·환경적 가치를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체험하도록 한다. ‘영원한 생명의 정원’에서 생태계의 순환 은 목재의 분해 과정을 관찰하고 숲, 초지, 습지 경관을 순회하면서 경험되며, ‘마지막 식사’에서 방문객들은 생태적 생명력이 느껴지는 수생 식물이 가득한 테이블 앞에 둘러앉아, 우리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시작할 수 있다. 초청정원인 마크 크리거(Mark Krieger)의 ‘비행사의 정원(Aviators Garden)’은 우리 땅에서 자랄 수 있는 숙근초를 이용해 야생 벌과 조류의 서식 공간을 조성한다. 군데군데 배치된 고목들은 수많은 작은 구멍을 통해 야생벌의 미래 서식처로 기능하는 동시에, 자라나는 나무처럼 연출되어 설치 예술 작품으로 감상된다. 표지판에 적힌 설명을 찾아 읽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생태 서식처의 중요성을 알아챌 수 있다. 브랜드스케이프 기업·기관의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투영된 정원은 대중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면서 공간적 홍보 수단으로 기능한다. 반대로, 정원 디자인을 대중의 이목에 집중시키는 좋은 소재가 바로 유명 기업과 기관의 브랜드이기도 하다. 전자를 브랜드의 정원화로, 후자를 정원의 브랜드화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실로 이번 박람회장의 기업·기관정원은 방문객으로 가득하다. 오픈니스 스튜디오가 디자인한 농심의 ‘인위자연’은 식품 회사인 농심 브 랜드 로고와 식품 제조 과정에서 모티브를 얻어 정원 시설을 디자인한다. 로고의 형태를 한 여러 개의 수반은 캐스케이드로 구성되어 차례대로 물이 흐르며 식품 공정을 떠올리게 하며, 과감히 로고 형태와 색상을 한 조각품은 모빌이 되어 정원 부지 위를 하늘하늘 부유하며 방문객에게 브랜드를 각인시킨다. 국립생태원의 ‘순환하는 원, 생태정원’은 사방으로 뻗은 짐승의 뿔처럼 생긴 고사목들을 툭툭 던져 놓는 단순한 제스처로 기관의 아이덴티티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우리의 산 생태계와 생태공원에서 생물 서식처로 기능하는 고사목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하면서 우리를 단박에 저 멀리 숲 속 어딘가로 데려다 놓는다. 정원화된 공원 이번 서울국제정원박람회는 정원을 매개로 공원을 사용하는 효율적인 방법을 보여준다. 행사를 위해 임시로 여러 유형의 정원을 나열해 설치 한 것이 아니라 방문객이 정원을 누비면서 공원을 구석구석 탐색할 수 있도록 신중히 배치된 기획의 산물이다. 이러한 재기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초청정원인 박승진의 ‘세 번째 트랙(The Third Track)’을 꼽을 수 있다. 디자이너는 공원 운동장 육상 트랙 일부의 내부 영역에 트랙 형태의 선형 정원을 조성했다. 탁 트인 운동장 트랙을 하염없이 뛰다가 템포를 늦추고 싶을 때 슬쩍 경로를 변경해 세 번째 트랙인 숲길로 뛰어들어 자연의 세계를 만끽할 수 있다. 작가, 초청, 기업, 기관, 학생정원들이 공원 곳곳에 배치되면서, 공원은 하나로 통일된 정체성보다는 패치워크식 구성으로 나타난다. 애초에 공원과 정원이 추구해 온 미학은 서로 다르다. 공원이 넓은 잔디밭이 드리워진 풍경화 같은(picturesque) 전원 경관을 닮았다면, 정원은 화려하거 나 자연주의적인 초화류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이질적인 미학적 산물 이 한 데 꿰어진, 이토록 정원화된 공원(gardenized park)은 보라매공원의 아이덴티티를 불가피하게 변경한다. 진화인가 아님 파괴인가. 이 공원이 그간 이용이 뜸했다면 정원박람회는 공원을 재생하는 효과적인 대안으 로 작동될 것이다. 한편으로, 보라매공원은 오랫동안 시민들에게 이용되어 다채로운 기억이 켜켜이 쌓인 양피지(palimpsest)다. 새로운 정원이라 는 화려한 조각보로 누벼진 땅에 기존 보라매공원의 아이덴티티를 신중히 살핀 정원 하나가 눈길을 끈다. 이양희와 오세훈의 ‘제3의 플라타너스 숲’은 보라매공원의 플라타너스 숲을 보존하고 야생 자연의 특성을 연출한 뒤 그 위에 식생 태피스트리라는 레이어를 얹어 대상지의 본래 역사와 경관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화려하거나 새로움이 직관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지만 기존 공원의 풍경과 이질감 없이 어우러진다. 지금 은 축제의 시간이다. 초여름 햇살을 듬뿍 머금은 정원 천지에 시민들과 함께 푹 빠져 걷다가, 문득 축제가 끝나고 난 뒤 보라매공원이 어떤 풍경 일지 궁금해졌다. **각주 정리 1. 인간 문명과 야생 자연의 거친 풍경을 병치하는 방식은 숭고의 미학을 연출한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을 참조할 것. 이명준·배정한, “숭고의 개념에 기초한 포스트 인더스트리얼 공원의 미학적 해석”, 『한국조경학회지』 40(4), 2012, pp.80~81. 2. Elizabeth K. Meyer, “Sustaining Beauty: The Performance of Appearance”, Journal of Landscape Architecture 3(1), 2008, pp.6~23. 3.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역, 『판단력 비판』, 아카넷, 2009. 4. Elizabeth K. Meyer, “Expanded Field of Landscape Architecture”, In G. Thompson, and F. Steiner, eds., Ecological Design and Planning , New York: John Wiley & Sons, 1997, pp. 45~79. 5. 2번 글, p.17. 6. 2번 글, p.20. 이명준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에서 오랫동안 공부하다가 2020년, 안성으로 이사 와 한경국립대학교 친구들과 즐거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 2025 서울국제정원박람회장에 들어서자마자 정원의 마력에 휩쓸렸다. 이건 단순한 축제가 아니라 정원 개벽의 현장이야! 정원 천지가 된 서울의 풍경에 먼저 감탄했고, 곧이어 정원 디자이너들이 나를 어떻게 가든라이팅(gardenlighting)하는지 마법의 레시피가 몹시 궁금해지다가, 정신을 차리고 나니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던 보라매공원은 어디로 갔을까.

- [2025 서울국제정원박람회] 동네 공원 + 정원 = 시민대정원?
- 동네 공원에서 열리는 정원박람회 보라매공원은 여의도공원 1.8배 크기의 대형 공원이다. 위치는 동작구 신대방동이지만, 북문 건너편은 영등포구, 남측 면은 관악구와 닿아 있다. 남서쪽은 구로구로, 서울의 서남부 네 개 구민이 즐겨 이용하는 공원이다. 보라매공원은 1986년 5월 5일 어린이날에 개원했다. 오래된 주거지와 면해 있다 보니 멀리서 찾는 사람보다는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한다. 노년층은 곳곳에서 장기나 바둑을 두고, 겨울에도 나란히 앉아 햇볕을 쬐거나 운동을 한다. 중년층은 자발적으로 모여서 에어로빅이나 체조를 한다. 보라매공원의 상징과도 같은 잔디 마당 주변 순환로에는 계절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이 걷거나 뛴다. 평상시에도 하루 평균 2만 명 이상이 다녀가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작년에 보라매공원이 2025 서울국제정원박람회(이하 정원박람회) 장소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용한 동네 공원에서 서울 시민이 모이는 큰 행사가 열린다는 소식에 기대보다 우려가 앞섰다.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정원박람회를 위해 땀을 쏟았는지 지켜본 데다, 축제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는 시점이라 객관적인 평가를 하기는 어렵다. 이 글은 보라매공원 옆에서 30년 넘게 살며 일한 동네 조경가가 쓴 공원 자랑이자 정원박람회에 대한 짧은 소감이다. 공원, 정원, 운동장, 놀이터 나에게 보라매공원은 아이 셋을 키운 공원이자 정원이자 놀이터다. 큰 아이는 돌 즈음에 동물원의 연못 근처에서 비둘기 모이를 주며 걸음마 연습을 했다. 밥을 잘 안 먹는 아이를 데리고 공원에 가서 김과 흰밥만 싸서 하나씩 먹여주며 해질 때까지 놀다 오곤 했다. 아이들은 보라매공원에서 인라인 스케이트와 자전거를 배웠다. 비행기를 구경하고, 공놀이와 연날리기를 하고, 겨울에는 꽁꽁 언 연못에서 썰매를 탔다. 대학생들과 함께 시립발달장애인복지관 정원에 꽃을 심기도 했다. 세 아이가 다녔던 보라매초등학교에서는 봄과 가을마다 순환로에서 걷기 대회를 했고, 가을 운동회와 축구 대회도 공원에서 했다. 어린이날에는 공원 근처 농심사에서 과자와 라면을 나눠줬다. 어른이 된 아이들은 요즘도 종종 축구나 러닝을 하러 공원에 간다. 우디 앨런의 영화 ‘멜린다와 멜린다’(2004)에서 오랜만에 만난 동창생 세 명이 센트럴파크의 보우(Bow) 브리지에 서서 학창 시절을 회상한다. 뉴욕이 고향인 사람들이 센트럴파크에서 어린 시절을 기억하듯, 도랑에서 가재 잡아본 적 없는 신대방동 아이들은 어릴 때 놀던 보라매공원이 고향이다. 나는 집에서 사무실로 걸어서 출근한다. 날씨 좋은 날은 공원 부지인 와우산을 넘어가서 공원을 가로질러 가기도 하고, 퇴근길에는 순환로를 몇 바퀴 돌기도 한다. 해 질 녘 기분 좋은 바람을 맞으며 공원에서 하루를 정리하는 것은 크게 내세울 것 없는 동네에서 누리는 행복 중 하나다. 나와 같은 사람들로 저녁 시간대에 순환로는 늘 만원이다. *환경과조경447호(2025년 7월호)수록본 일부 서영애는 기술사사무소 이수에서 소장으로 일하고,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에서 겸임교수로 가르치고, 도시경관연구회 보라(BoLA)에서 공부한다. BoLA의 친구들과 2019년 보라매공원에서 ‘공원학개론’ 포럼을 열면서 공원 아카이브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2021년까지 서울시와 서울기록원의 프로젝트로 서울의 공원 기록물을 분석했다. 그 일환으로 보라매공원에 대한 논문 “이전적지 공원으로서 서울 보라매공원의 변화와 의미”(『한국조경학회지』 51(1), 2023)을 함께 쓰고 기록물 온라인 전시(서울기록원 홈페이지)를 했다.

- [2025 서울국제정원박람회] 세 번째 트랙
- 공원은 일과 일상에서 벗어나 걷고, 쉬고, 노는 공간이다. 우리 주변의 크고 작은 공원들을 살펴보면 제각기 조금씩 다른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오랫동안 공군사관학교가 있던 자리에 만들어진 보라매공원은 넓고,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다. 특별한 점은 공원 한가운데에 커다란 운동장(과거 공군사관학교 연병장)이 있고, 그 둘레에 걷고 뛸 수 있는 긴 트랙이 조성되어 있는 점이다. 주민들은 이 공간을 사랑한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걷고, 또 뛴다. 트랙의 전체 길이는 600m에 이른다. 바깥쪽은 걷는 사람들, 안쪽은 뛰는 사람들로 구분하고, 서로 충돌하지 않도록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도록 하고 있다. 설계자는 이러한 특징에 주목했다. 두 개로 구분된 트랙 안쪽에 ‘세 번째 트랙’을 제안했다. 일명 라르고(largo). 라르고는 음악 용어로 ‘아주 느리게’라는 뜻을 갖는다. 세 번째 트랙에서는 서두르지 않기를 바란다. 정원의 길이는 80m 정도. 원래 이곳에 심겨 있는 느티나무와 이팝나무 사이에 트랙을 삽입하고 좌우에 작은 숲을 만들었다. 산딸나무, 산목련, 가침박달, 히어리, 물철쭉, 까마귀밥여름나무, 생강나무, 조팝나무 등등. 여기에 고사리, 눈개승마, 노루오줌 같은 작은 풀들을 더했다. 우리 주변의 야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들이다. 공원을 방문한 이들이 호젓한 산길을 걷듯 천천히 이 길을 걷기를 바란다. 나뭇잎과 꽃, 향기를 천천히 음미하면서 아주 아주 천천히 걷기를 바란다. 이 정원은 박람회 기간이 지나도 철거되지 않고 존치 된다. 설계자는 이번 작업을 완성작으로 보지 않는다. 여건이 되면, 지금의 80m 구간을 좌우로 계속 연장해 서 600m에 이르는 세 번째 정원 트랙이 온전히 완성 되기를 기대하고 제안했다. 어떻게 보면 이 80m 구간 은 전체 구간의 샘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 다. 빠르게 걷거나 뛰는 첫 번째 트랙, 보통의 걸음으 로 걷는 두 번째 트랙에 이어, 숲길을 다른 속도로 천 천히 사색하며 걷는, 세 번째 트랙 전 구간이 곧 완성되기를 희망한다. 설계 박승진 시공 태극조경 면적 500㎡ 박승진은 경관, 도시, 정원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loci 대표소장이다. 통의동 브릭웰 정원, 대구 mrnw 복합문화공간, 서울 목동의 오목공원 등을 설계했다. 조경건축가로서 푸른별 지구, 우리가 살고 있는 곳곳,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즐겁게 작업하고 있다.

- [2025 서울국제정원박람회] 비행사의 정원
- 전 세계적으로 기후 위기를 겪으면서 생물 다양성을 높이는 동시에 지속가능한 조경 공간을 조성하는 것이 설계의 중요한 비전이 됐다. 2025 서울국제정원박람회는 이를 대상지에 구현할 좋은 기회였다. 이번 프로젝트의 목적은 매력적인 녹지 공간을 제공하며 생물 다양성에 기여하는 정원을 만드는 것이었다. 모든 생명체를 위해 비행사의 정원(Aviators Garden)은 옛 공군사관학교 터였던 대상지의 특성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공군 비행사를 배출했던 공군사관학교를 기리며 인간뿐 아니라 나비와 벌 등 비행사처럼 공중을 누비는 모든 생명체를 수용하는 정원을 연출했다. 야생벌 둥지(Bienenhaus)와 새집 등 생명체를 위한 구조물을 통해 생태계 보호의 중요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풍성한 녹지 공간을 마련해 새와 곤충을 유인하고, 공간 안에서 인간, 동물, 식물이 서로 조화를 꾀하는 화합의 정원을 만들고자 했다. 과정과 결과물 모두 자연환경에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고 언제든 자연의 품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자연친화적 자재를 활용했다. 가령 길의 경계선 에지 재료로 목재를 활용하고, 콘크리트와 플라스틱 소재를 지양해 다양한 생명체의 접근성을 높였다. 조용한 오아시스 비행사의 정원은 주변의 바람을 막아주는 생울타리에 둘러싸인 정원으로, 시민들이 분주한 도시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조용한 오아시스 역할을 한다. 최대 1.5m 높이의 생울타리는 다양한 종류의 관목으로 구성되며 기존 수목을 그대로 보존하는 동시에 정원 경관의 구조적 틀이 된다. 정원을 가로지르는 곡선형 산책로 사이에 서식처 환경을 고려한 다양한 숙근초를 심어 계절별로 색다른 경관을 감상할 수 있게 했다. 숙근초는 이 정원의 핵심적 역할을 하며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사계절의 변화를 뚜렷하게 느낄 수 있는 주도종, 주도종과 조화를 이루며 경관의 깊이를 더하는 동반종, 낮게 깔려 빈자리를 채워주는 피복종, 골고루 분산되며 역동성을 만들어 내는 분산종을 정원에 심었다. 서식처 기반의 식재 디자인 원칙을 바탕으로 구성된 다양한 숙근초 군락은 단순한 조화를 넘어 각 식물의 고유한 특성을 드러내며 건강한 생태계를 구축한다. *환경과조경447호(2025년 7월호)수록본 일부 설계 Mark Krieger 시공 이양희, 오세훈, 김명윤 후원 예건 코디네이터 고정희 마크 크리거(Mark Krieger)는 스위스 동부 응용과학대학교(Ostschweizer Fachhochschule) 조경학과 교수로, 자연주의 정원 디자인을 추구한다. 식물에 대한 관심과 깊은 생태적 통찰, 감각적 디자인을 통해 자연스러운 조화를 꾀하는 식재 공간을 연출한다. 2013 함부르크 정원박람회, 함부르크 도시개발환경부 데크 정원 등 정원박람회 식재 기본계획부터 숙근초 정원까지 다양한 규모와 성격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 [2025 서울국제정원박람회] 마지막 식사
- 최근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 1인당 육류 소비량이 쌀 소비량을 넘어섰다. 오랜 시간 한국인의 식탁을 지탱해 온 쌀보다 고기가 더 많이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지속된다면 지금보다 더 극심한 생태계 파괴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개구리밥을 바라보며 육식 문화와 자연 생태계 변화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정원을 만들고자 했다. 세 가지 구성 요소 연못 테이블: 정원의 중심 요소로, 대가족이 큰 식탁 주변에 둘러 앉아 식사를 하는 모습을 상상하게 하는 테이블로 기능한다. 정원 중앙에 둔 7.6m 지름의 원형 테이블 속 뒤집힌 원뿔 형태의 물을 담는 구조물을 놓았다. 수반에 연결된 수위 조절기를 통해 연못 물의 증발을 최소화하고 범람을 방지한다. 벽돌 포장: 바닥을 붉은 벽돌로 포장해 정원의 투수성을 유지하고 유지·관리를 용이하게 했다. 40㎝ 높이의 벽돌 조적 구조물을 원형으로 쌓아 벤치로 만들고 사색과 모임을 위한 공간으로 기능하게 했다. 식재 공간: 잎이 넓고 키가 큰 식물을 식재해 녹음이 풍성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환경과조경447호(2025년 7월호)수록본 일부 설계 김기한 시공 공간이오 협력 님프가든(식재) 후원 바이루트(개구리밥 지원) 김기한은 인하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카탈루냐공대(UPC)에서 조경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졸업 후 파리에 위치한 MDP(Michel Desvigne Paysagiste), AJOA(Atelier Jacqueline Osty & Associés) 등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으며, 현재는 조경 및 환경과 연계된 공공 설치 작업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 [2025 서울국제정원박람회] 영원한 생명의 정원
- ‘영원한 생명의 정원’은 자연의 순환, 특히 썩음과 분해 과정을 통해 생태계의 근본적 작동 원리를 드러내는 정원이다. 낙엽, 병든 나무 껍질, 버섯, 곤충은 단순하고 하찮은 잔재가 아니라 생명을 지속시키는 연결망의 중심이다. 분해와 순환을 설계의 핵심으로 삼아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변화하고 썩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 죽은 것들에서 생명이 움튼다 정원 경계를 이루는 링은 걷거나 앉을 수 있는 시설인 동시에 하부 목재의 분해를 통해 정원의 생태적 작용을 촉진하고 그 과정을 보여주는 정원의 핵심 요소다. 링 상부, 스틸 데크: 나무의 수피에서 모티브를 얻어 링을 조성했다. 수피는 나무를 외부로부터 보호하지만, 틈이 생기면 침입을 허용하기도 한다. 수피에 자잘하게 남은 침투의 흔적은 굳건해 보이는 나무 줄기 안에서 벌어진 치열한 생명의 역사를 보여준다. 이 흉터들을 패턴으로 형상화하고 데크에 무늬로 표현했다. 링 하부, 나무 더미: 하부에는 나무 분해 과정을 드러내는 조형물을 설치했다. 무너지면서 만들어진 변칙적 구조와 여러 생물이 경쟁적으로 잠식하며 우위를 다투는 모습을 담고자 했다. 경관이 교차하며 풍요로워진다 정원에 숲, 초지, 습지 세 종류의 경관을 엮고자 했다. 지형 변화와 돌담, 로그바 등의 자연적 지물을 통해 다채로운 미기후와 서식처를 조성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생태계는 높은 종 다양성과 회복력으로 도시공원에 새로운 생태적 공간으로 기능할 것이다. *환경과조경447호(2025년 7월호)수록본 일부 설계 김윤빈 시공 뜰1994, 팀 파베르, 김윤빈 김윤빈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조경설계사무소를 거쳐 현재 프리랜서로 활동 중인 조경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다. 자연과 장소를 기반으로 한 경험과 사회적 해법의 디자인으로서의 조경을 추구한다. 설계를 비롯해 분야를 넘나드는 사이드 프로젝트들을 통해 기획자의 관점과 실천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 [2025 서울국제정원박람회] 네스팅
- 보라매공원의 이름에서 영감을 받아 신화 속 새의 기원 이야기를 상상하며 디자인을 구상했다. 정원에서 네스팅(nesting)은 명사가 아닌 동사로 기능한다. 공원 주변에서 재료를 모아 정원을 만들고 정적인 둥지가 아닌 살아 있는 행위로서의 정원을 만들고자 했다. 이는 탄생, 성장, 소멸이라는 생명의 흐름을 반영한다. 곡선 형태의 정원 정원의 형태는 태극 문양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동양의 철학적 개념인 균형과 음양의 역동적 상호 작용을 표현했다. 자연의 생태적 과정과 예술적 개입을 통해 제3의 자연의 본질을 담아내고자 했다. 두 개의 나선을 부드럽게 엮어 정원을 둘러싸게 했으며 주변 도로와의 자연스러운 연결을 꾀했다. 곡선 형태는 음과 양의 변화를 상징한다, 한국 전통 색채인 오방색에서 영감을 받아 식물을 선정했다. 남쪽에는 따뜻한 색감의 식물을, 북쪽에는 시원한 색감의식물을 배치했다. 이런 요소들이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며 자연의 순환을 반영하는 동시에 인간과 자연의 시너지를 느낄 수 있다. *환경과조경447호(2025년 7월호)수록본 일부 설계 Till Rehwaldt, Garth Woolison 공동 설계 He Hao, Mengs Martin, Liu Yanting, Xu Yu, Yu Xihe 시공 공간이오 협력 데코가드닝(식재) 틸 레발트(Till Rehwaldt)는 1993년 레발트 조경설계사무소(Rehwaldt Landschaftsarchitekten)를 설립해 공원, 정원, 도시 오픈스페이스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가르트흐 볼리손(Garth Woolison)은 레발트 조경설계사무소의 프로젝트 매니저로, 2023년부터 체코 프라하의 제4분할 도시 디자인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다.

- [2025 서울국제정원박람회] 워터루츠!
- 워터루츠(Waterrooots)!는 “같은 강에 두 번 발을 들여놓지 말라(You never step twice into the same river)”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에서 영감을 받았다. 삶과 자연의 영원한 역동성, 시간에 따른 자연과 개개인의 변화를 정원에 담고자 했다. 원 원은 중심으로부터 등거리에 있는 점의 집합으로, 서로 다른 공간을 구분하고 통로를 상징한다. 정원에서 원은 외부와 다른 규칙이 적용되는 공간이자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공간이다. 방문객들에게 개별적인 공간이자 성찰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얼음과 정원 알렉산드로 트리벨리는 정원에 빙하를 상징하는 얼음을 설치하고, 얼음이 녹아내리는 모습을 통해 인류의 행동이 기후 변화를 가속화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동시에 녹아내린 얼음이 주변 식물의 생육에 필요한 영양분이 된다는 점도 강조하고자 했다. 이는 자연이 훼손되어도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하는 힘인 회복 탄력성을 의미한다. *환경과조경447호(2025년 7월호)수록본 일부 설계 Alessandro Trivelli 공동 설계 SDARCH Architects with Andrea Sogja, Tommaso Gabba, Martina Gangi 시공 공간이오 협력 그린팜널서리(식재) 알레산드로 트리벨리(Alessandro Trivelli)는 이탈리아 밀라노 공과대학교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공학과 건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5년부터 밀라노 공과대학교 건축디자인학과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SDARCH 트리벨리 & 어소시에이티(Trivelli & Associati)의 파트너이자 설립자이며 건축, 조경, 환경 기술 연구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 [2025 서울국제정원박람회] 제3의 플라타너스 숲
- 제3의 플라타너스 숲은 ‘제3의 자연’을 제1의 자연(원생림)과 제2의 자연(인공 녹지)이 공존하는 가운데 사람의 문화가 깃든 공간으로 구현한 정원이다. 정원 한가운데에 플라타너스가 자리하고 주근부를 과감히 비워 그 여백 사이로 초본 식물을 심었다. 뿌리가 다치지 않는 선에서 본래 저습지에 사는 플라타너스가 대상지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플라타너스의 뿌리 때문이다. 이 뿌리가 건조하고 단압된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무수한 균근균류와 협동해 물과 양분을 옭아맸다. 수관폭 너머로는 수평근, 모근으로 구성된 영역으로 적극적으로 수분과 양분을 찾아다녔다. 따라서 주근의 지하부는 보호되어야 한다. 세근의 영역 지하부에 배수층을 만들고, 지상부로는 숲 바닥 식물을 심기로 했다. 두 가지 접근 두 조경가는 결은 닮되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정원에 접근했다. 한 사람은 풍경을, 다른 한 사람은 식물을 지었다. 정원 속에서 사람이 어디에 머물고 어느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며 어떤 순간에 감각을 멈추는지를 고려해 숙근초를 모든 흐름을 이어주는 풍경으로 삼았다. 숙근초는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는 감각적 배경으로 기능하며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어지는 정원의 본질이 된다. 초본의 태피스트리를 중심으로 한 식재 전략을 세웠다. 숙근초는 살아 있는 생명이자 계절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재료다. 식물 하나하나의 구조와 빛, 그림자, 질감에 몰입하면서 사초류의 흐름, 반복과 대비, 수피의 리듬까지 정원의 가장 낮은 층부터 이야기를 엮어갔다. 시간의 결이 스며든 생명의 직물을 직조해 나갔다. *환경과조경447호(2025년 7월호)수록본 일부 설계 이양희, 오세훈 시공 마이조경, 더퍼레니얼 후원 지이든 이양희는 2021년 스튜디오 천변만화를 설립했고, 다양한 분야 간의 협업을 통한 프로젝트에 관심이 많다. 도시 공간 내 지속가능한 여러해살이풀 식재에 대한 관심을 두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설계에 적용하는 이론의 실무화를 추구한다. 오세훈은 정원디자인 스튜디오 이듬해의 대표로, 정원가이자 식물교육자 및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자연주의 정원 철학과 숙근초 중심의 식재 디자인을 기반으로, 정원 문화의 심화와 확산을 위한 다양한 창작과 교육을 이어가고 있다.

- [2025 서울국제정원박람회] 도시 ESG 전략으로서 기업정원(각주 1)
- 2025 서울국제정원박람회에는 총 20개의 기업정원이 조성되었다. 박람회장인 보라매공원 곳곳에 펼쳐진 이 정원들은 기업의 정체성을 공간으로 시각화한 사례이자, ESG라는 모호하고 부담스러운 과제를 도시 공간에서 어떻게 실천 가능한 형태로 바꿔낼 수 있는지 실험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출발이라 할 수 있다. 참여 기업 대부분이 정원 내에서 브랜드 노출과 이미지 개선을 목적으로 했지만, 몇몇 정원은 분명히 변화의 조짐을 드러냈다. 기업정원의 상업성과 공공성 기업이 정원을 조성하는 목적은 대체로 두 가지다. 하나는 기업 고유의 브랜드나 제품을 정원 안에 배치하거나 시각적으로 연상되도록 만들어,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고 마케팅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기업의 직접적 홍보와 관계없이 순수하게 사회적 기여 차원에서 예산을 투입하는 방식이다. 기부에 가까운 이 형식은 공간에 대한 의도나 개입 없이 예산만 제공하는 방식으로, 브랜드 노출도 제한적이다. 예를 들어. 롯데그룹은 2023년 잠실 롯데월드타워 앞 광장에 ‘베르테르의 정원’을 조성했다. 이 정원은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기념하는 문화 설치물로 기획됐으나, 그 연출 방식과 장소 활용을 통해 롯데그룹의 정체성과 브랜드 경험을 강화하기 위한 전략적 장치로 작용했다. 반면, 일본 자동차 기업 마쓰다는 히로시마 공장 인근에 시민과 함께 장기적으로 숲과 정원을 조성하면서 브랜드 노출 없이 생물 서식처와 생태계 복원을 목표로 하는 기부형 공간을 운영해 왔다. 전자는 브랜드 홍보 전략의 연장선으로 정원을 활용한 사례이고, 후자는 공공성을 두 방식 모두 존재할 수 있지만, 정원이 도심의 공공 공간에 조성되는 이상 그 표현의 수위 조절과 공공성 과의 조율이 필요하다. 지나친 홍보는 도시 경관과 시민 경험을 해치는 요소가 될 수 있고, 반대로 모든 표현을 제거한 채 기계적으로 기부하는 방식은 공공성과 기업의 정체성이 모두 희미해지는 결과를 낳는다. 중요한 것은 그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 일이다. 기업의 참여 동기: 홍보에서 전략적 ESG 실천으로 기업이 정원에 참여하는 이유는 과거에는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 활동의 일환이었다. 홍보 예산을 활용해 사회 공헌 이미지를 구축하고자 했고, 정원은 그 수단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ESG 경영이 강화되면서 정원이 주요한 실천 수단으로 주목받고 있다. 기후 관련 재무정보 공시(TCFD)와 자연 관련 재무정보 공시(TNFD )등 국제 기준이 확대되면서, 기업은 기후 위기 대응뿐 아니라 생물 다양성, 자연 자산에 대한 책임 있는 보호를 요구받고 있다. 이에 따라 과거의 산림 조성이나 기부 중심 참여에서 벗어나 도시 기반의 자연 공간―예컨대 정원과 도시숲―이 ESG 전략의 핵심 수단으로 떠오르고 있다. 기업정원은 이러한 변화 흐름 속에서 낮은 진입 장벽, 빠른 실행 가능성, 시민과의 접점을 바탕으로 실질적인 ESG 공간 실천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올해 서울시가 참여 기업들과 체결한 ‘기업동행정원 조성 업무협약’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두나무는 ‘세컨포레스트: 디지털 치유정원’을 매개로, NFT 기반 기금 조성과 자생 식물 보전을 위한 프로그램 운영 계획을 협약서에 명시했다. 대우건설은 정원을 통해 기후 위기 대응 및 탄소중립 실천을 공간 설계로 구현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AIA생명은 ‘다시 생각하는 건강정원’ 조성 외에도 임직원 식재 참여, ESG 기부금 출연 등을 함께 계획하며, 정원 조성을 브랜드 철학과 연결된 웰니스 전략의 일부로 삼았다. 다른 참여 기업들도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ESG 실천을 정원 조성의 기본 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는 단순한 예산 제공이나 이미지 홍보를 넘어, 기업이 도시 공간에서 실질적인 ESG 실천을 시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환경과조경447호(2025년 7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편집자 주. 이호영의 원고에 편집부가 고른 기업정원의 사진과 설명을 더해 리포트 형식의 지면을 구성했다. 이호영은 조경 분야에서 20년 넘는 실무 경력을 쌓았으며, 현재 HLD 대표로 디자인을 총괄하고 있다. HLD 설립 전에는 조경설계 서안, AECOM, office ma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다. 2018년에 제1회 젊은 조경가상을, 2023년에 서울시장상을 수상했다. 한국조경협회 수석부회장, 서울시 공공조경가로 활동하고 있다.

- [우먼스케이프] 제인 라우던의 풍경
- 정원과 책은 마치 목도리와 장갑처럼 한 세트가 되어 우리의 삶을 포근하게 한다. 글 쓰는 사람 중에 정원을 가꾸는 사람이 적지 않다. 글쟁이가 아니라도 정원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개 책도 좋아한다. 그래서 풍경과 문학은 서로 관계가 깊다. 이 둘을 엮으면 정원 서적이 된다. 정원의 나라 영국의 경우, 정원을 만드는 속도와 정원 서적을 읽고 쓰는 속도가 거의 비례한다는 느낌도 든다. 문학 속에서 풍경이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제인 오스틴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풍경 속을 자주 걷는다. 그녀의 이야기들이 ‘픽처레스크’한 풍경을 배경 삼지 않았다면 리안 감독이 『센스 앤드 센서빌리티』를 영화로 찍고 싶어 했을까? 제인 오스틴 이후에도 샤를로테 브론테의 『제인 에어』와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서 영국의 풍경 묘사는 지속된다. 브론테 자매는 빅토리아 시대에 활동했던 작가다. 브론테 자매 외에도 빅토리아 시대는 출중한 여성 작가를 많이 배출했다. 빅토리아 시대란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 기간, 즉 1837년에서 1901년까지 거의 70년 가까운 기간을 말한다. 빅토리아 여왕이 특별히 통치를 잘했거나 못했기 때문에 그리 불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조선의 성종대, 중종대라고 일컫듯 시대를 구분하기 위한 방법이다. 이 시기에 영국에는 참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산업혁명의 결과로 부강해졌고 과학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했다. 다른 유럽 국가에서 혁명이 일어날 때 영국은 의회 개혁을 통해 혁명의 발발을 막았다. 1870년경부터 영국 제국주의가 최고조에 달해 세계의 패권을 차지했다. 식민지 정책에 기반을 두었던 대영제국이었기에 지금은 부끄러워 하지만 당시 대영제국의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다. 신분 계급에도 변화가 나타나 상공인을 주축으로 중산층이 크게 성장했다. 엔지니어, 건축가, 변호사 등 전문직도 이에 속해 중산층의 직업 구조도 다양해졌다. 이들은 런던을 비롯한 대도시외곽에 소위 빌라라고 불린 고급 주택을 짓고 살았다. 대개 3층 규모에 방이 열 개 정도 있고, 앞뒤로 정원이 딸린 구조였다. 이와 더불어 제인 오스틴의 무대였던 풍경 정원의 시대가 지나가고 도시의 빌라 정원의 시대가 시작됐다. 그런데 빌라 정원 시대와 함께 ‘여성의 정원 시대’가 열렸다고 해도 좋을 듯하다. 이 무렵 또 다른 제인, 제인 웰스 라우던(Jane Wells Loudon)이 나타나 모름지기 여성 정원의 시대를 여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하게 된다. 풍경 정원에서 잠들면 생기는 일 어느 뜨거운 여름날, 17세의 제인은 머릿속이 복잡해 집을 나섰다. 2년 전, 제인이 17세 되던 해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유산으로 빚을 정리하고 나니 남은 것이 별로 없었다. 돈을 벌어 살림에 보태야 함을 깨달았다. 그런데 양갓집 규수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세 가지밖에 없었다. 세밀화를 그리는 것, 모자나 의상을 만드는 일, 그리고 가정교사였다. 그중 가정교사가 가장 흔했지만, 좋은 직업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보수도 형편없었다. 제인은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싶었다. 독서광에 상상력이 풍부했던 제인은 글을 쓰기로 했다. 글쓰기는 돈벌이로 취급하지 않았기에 주변의 시선도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단편 소설 몇 편을 쓰고 시도 쓰고 외국의 이야기를 번역해 책으로 묶었다. 다행히 출판사에서 받아들여 약간의 인세를 받았다. 이제 장편 소설에 도전하고 싶었다. 그런데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영웅 이야기를 쓸까? 그런데 어떤 영웅? 제인이 여태 읽은 이야기 속의 영웅들은 모두 비슷했다. 서로 형제나 되는 듯 비슷하게 잘나고 비슷하게 용감하고 비슷하게 낭만적이었다. 그런 건 내 취향이 아닌데……. 뭐 좋은 아이디어가 없을까? 이런 생각에 잠겨 제인은 집 뒤에 있는 언덕을 올랐다. 거기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아름다웠다. 골짜기 사이로 구불거리는 오솔길과 그 옆을 흐르는 시냇물, 저 멀리 드문드문 보이는 마을들 그리고 아주 먼 곳에 아련히 보이는 높은 산허리. 제인은 풀밭을 지나 큰 떡갈나무 그늘로 향했다.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으니 바람이 솔솔 불어와 땀을 식혀주었다. 그러다 잠이 들었다. 잠이 들면 꿈을 꾸기 마련이다. 눈앞에 문득 젊고 아름다운 신령이 나타났다. 머리엔 꽃으로 엮은 관을 쓰고 아지랑이 같은 날개옷을 떨쳐입었는데 손에는 두루마리를 들고 있었다. 그가 물었다. 너 아이디어를 찾고 있지? 이거 네게 줄게 하면서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이게 미래의 연대기야. 이걸 줄 테니 이야기를 만들어 봐. 왜 미심쩍어? 그러면 주변을 한번 둘러봐. 그제야 제인이 눈을 들어 주변을 살펴보니 전혀 다른 세상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닌가. 2126년의 영국이었다. 무려 3백 년 뒤의 미래로 온 것이다. 제인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 이는 대로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제인은 자신의 공상과학 소설 『미라(The Mummy)』가 그렇게 탄생 했다고 서문에서 밝혔다. 물론 그것도 허구지만 이야기를 전개하는 솜씨가 대단했다. 그때 제인의 나이가 20세였다. 소설은 잘 팔려 바로 이듬해에 재판을 찍었다. 문학적으로 그리 높게 평가받지는 못했지만, 소설 속에 그려낸 미래의 세계와 뛰어난 과학 기술은 감탄을 자아냈다. 그리고 작가의 어린 나이에 비추어 볼 때 사회와 세상에 대한 높은 성찰이 번득이는 점 또한 대단했다. 제목 이 ‘미라’인 것은 소설 속 주인공이 고대 지식을 얻기 위해 이집트의 파라오 케옵스의 미라를 부활 시켰기 때문이다. 케옵스가 깨어 보니 세상은 기술의 경이로 가득했다. 비행선이 하늘을 날고 의사와 변호사, 판사는 모두 로봇이었다. 의료 사고도 없고 법정의 오판도 없었다. 가전제품이 있고 농업에도 기상천외한 기계를 도입해 생산력을 높였다. 그러나 좋은 점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케옵스는 22세기 사회를 지켜보며 인간의 오만, 과학의 오용과 정치적 혼란을 목격했다. 자신의 역할이 시대를 관찰하고 증인이 되어 주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살아 있지 않은 자신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행위임을 성찰한다. 그래서 다시 피라미드로 돌아가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그러나 제인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미라』 덕분에 인생의 2부가 시작됐기 때문이 다. 런던에 존 클라우디우스 라우던(John Claudius Loudon, 1782~1843)이라는 저명한 식물학자 겸 조경 가가 있었다. 제인의 소설이 발표될 무렵 그는 40대 중반이었다. 우연히 소설을 접하고 무척 재미 있게 읽었다. 특히 제인이 발명한 각종 기계에 흥미를 느껴 자신 발행하는 잡지 『가드너스 매거진(Gardener’s Magazine)』에도 소개했다. 그 역시 개량 온실 또는 테양열 난방 시스템을 고안하는 등 기 술 발전에 관심이 많았기에 소울 메이트를 찾은 느낌이었다. 저자를 꼭 만나고 싶었다. 알음알음으로 저자와 식사 약속을 정했다. 소설이 무명으로 발표됐기 때문에 존은 저자가 당연히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약속 장소에 가보니 매력적인 젊은 여성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존은 즐겁게 놀랐고 둘은 서로 첫눈에 반했다. 그때가 2월이었는데 두 사람은 그해 9월에 결혼한다. 그리고 제인은 버밍햄에 있던 아버지의 전원주택을 떠나 남편을 따라 런던의 빌라에 입성했다. 약 4천 제곱미터 크기의 정원이 있었다. 우리도 삽질할 수 있다 남편을 통해 제인은 식물과 정원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접했다. 전원에서 성장하긴 했어도 제인의 머릿속에는 과학과 기술에 대한 생각이 가득해 정원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특유의 지 적 호기심과 긍정의 힘으로 새로운 세계에 접근했다. 결혼하던 해에 남편의 역작 『호르투스 브리 타니쿠스(Hortus britannicus)』가 출판됐다. 브리타니아의 자생 식물, 원예 식물, 도입 식물을 총망라 한 식물 도감이었다. 존은 류머티즘성 열과 관절염으로 오른팔을 못 쓰게 되었다가 결국 절단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오른팔이 없는 관계로 집필을 위해 제도사와 비서를 고용해야 했다. 제인이 그 일을 자청하고 나섰다. 낮에는 정원에서 식물 공부를 하고 저녁이면 서재에 나란히 앉아 책을 쓰는 생활이 지속됐다. 남편의 집필에 대한 집념은 대단했다. 다음으로 ‘브리타니아의 수목’이라는 방대한 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를 도우며 제인의 지식도 날로 늘었고 정원 일에서도 의외로 큰 기쁨을 얻었다. 제인의 과학기술에 관한 관심이 제대로 주인을 만난 것 같았다. 제인은 식물과 정원을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그렇게 8년이 지난 뒤 제인은 『젊은 여성들을 위한 식물학』이라는 책을 냈다. 이 즐거운 학문 을 대중적으로 소개하는 책이라고 덧붙였다. 남편 존의 책은 지극히 전문적이어서 아마추어들은 읽기 어려웠다. 특히 제인은 자기와 같은 세대의 여성들에게 식물학이 얼마나 재미있는 것인지 알 려주고 싶었다. 이어서 여성 정원 잡지 『가드닝 여성지(Ladies Magazine of Gardening)』를 발간하는 등 1858년 만 5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제인은 근 이십 권의 정원 책을 썼는데 모두 실용서였다. 그림도 잘 그렸으므로 책에 넣을 식물 세밀화도 직접 그렸다. 소설 쓰는 것보다 정원 책이 수월하고 재미있었다. 독자들은 제인과 함께 경험을 쌓고 성장해 갔다. 빅토리아 시대에 제인의 책 외에도 정원 서적이 꽤 많이 출판되었는데, 크게 두 개의 흐름으로 이어졌다. 우선 18세기 중반부터 제인이 시작하고 다른 여성들이 부지런히 따라서 쓴 가드닝 가이드 책이 많이 나왔다. 이렇게 여성들의 경험과 지식이 쌓이고 전문성이 커지면서 18세기 후반에는 정원 에세이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급기야는 거트루드 지킬(Gertrude Jekyl, (1843~1932) 같은 거물급 정원 전문가가 탄생하게 됐다. 이 무렵 ‘뉴 우먼(New Woman)’이라는 개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여성상은 정원에서 태어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뉴 우먼이란 곧 삽질하는 능동적인 여성에서부터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원을 장악해 가고 있었는데 사회에서는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정원은 집에 속한 것이므로 사회의 통제를 덜 받았다. 여성의 영역으로 인정받아 남성들도 견 제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원에서의 여성을 “사랑스럽게 꽃을 꽂고 우아하게 풀밭을 거니는” 존재 로 이해했지만, 여성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땅 파고 거름 주고 전정하고 토양을 개량하고 디자인 하고 땀을 흘려가며 능동적으로 일하고 있었다. 제인은 『여성을 위한 실용적 가드닝 지침서』라는 책을 써서 첫 장에 땅 파는 방법부터 자세히 소개했다. 정원 일의 시작은 땅 파기인데 이것이 얼 핏 보기에 여성에게 힘든 작업 같지만 역학의 원리와 운동의 법칙을 잘 이용하면 쉽다고설명했다. 삽을 쥐는 법, 발로 삽날을 땅에 수직으로 박는 법, 손잡이를 지렛대 삼아 흙을 뒤집는 법, 파 낸 땅 덩어리를 삽날로 찍어 펼친 뒤 등으로 평평하게 두드리는 법 등을 설명했다. 이때 삽을 조금 작게 제작하는 것이 좋다고도 조언했다. 제인의 전용 삽 손잡이는 가벼운 버드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정원이라는 내 공간, 내 땅에 대한 여성들의 책임 의식이 싹트면서 정원은 정원 이 상의 것이 되어 갔다. 자신을 구현할 수 있는 곳일 뿐 아니라 지식과 기술을 쌓고 문화적 책임을 지는 곳이었다. 정원 여성들 사이에 네트워크도 만들어졌다. 1880년경이 되면서 정원 서적의 어 조도 달라졌다. 이제 기술은 익혔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고 보면 되겠다. 정원에 관한 토론은 곧 사회, 문화, 정치에 관한 토론으로 이어졌다. 여성들이 쓴 여성을 위한 정원서에서는 여성의 발 언권이 제한되지 않았기에 마음 놓고 의견을 피력할 수 있었다. 정치색을 띠고 ‘뉴 우먼’에 관해 토론하고 정원 스타일도 자유분방하게 변해갔다. 모두 제인 라우던으로 인해 비롯된 일이었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 『신의 정원, 나의 천국』, 『고정희의 바로크 정원 이야기』, 『고정희의 독일 정원 이야기』, 『100장면으로 읽는 조경의 역사』를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기름 사막 위 아이들의 섬] 환대
- 2021년 12월 청소년 보호소 근처 텍사스 공항에 내렸다. 우버를 부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흰 색 밴이 도착했다. 한때 열여덟 개 바퀴가 달린 화물 트럭으로 캐나다-미국-멕시코를 오가던 백인 기사는 고향으로 돌아와 물건 대신 인간을 실었다. “A에서 B로 이동하는 일일 뿐”이라며 그는 별반 다르지 않다고 했다. 우리는 곧 ‘하이웨이 투 헬(highway to hell)’이라 불리는 285번 고속도로에 올라타 하염없이 직선으로 달렸다. 무심히 돌아가는 석유 채굴기 뒤로 소각탑이 맹렬히 열기를 뿜었다. 회갈색 평야엔 텀블위드(tumbleweed)가 바람 따라 앙상하고 둥근 몸을 굴렸다. 고속도로에서 내리자 허허벌판에 홀리데이 인(Holiday Inn) 녹색 간판만이 빛났다. 갈색의 3층짜리 호텔 건물 뒤로 성인 키를 훌쩍 넘는 담장이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이 이어졌다. 저 담장 뒤에 아이들이 있었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을 비자도, 보호자도 없이 넘어온 아이들이. “아이스(Immigration and Customs Enforcement)(미국 이민세관단속국) 시설은 너무 추웠어요. 거기서 만난 다른 아이들과 함께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버스에 올라탔어요. 한참을 가고, 졸다 깨니 밤이더라고요. 여기 도착했을 때 어딘지도 모르겠고, 어둡고 무서웠던 것만 기억나요.” 청소년 보호소의 첫인상을 물었을 때 아이들이 했던 이야기다. 2021년 한 해 동안(각주 1) 미국 국토안보부는 체류 허가도, 보호자도 없이 넘어온 미동반 아동(unaccompanied child) 12만 명을 수용했다. 이는 전년 대비 약 8배 증가한 수치로, 급증의 이유는 두 가지다. 미국 입국이 가능해져서, 그리고 고향을 떠나야만 해서다. 1기 트럼프 정부는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공중 보건을 명분으로 미국-멕시코 국경의 망명 신청자와 이민자들을 추방했다. 이후 들어선 바이든 정부가 미동반 아동에 대해 이 조치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면서, 아이들은 미국 국경을 넘어도 추방되지 않고 보호 절차를 받게 됐다. 미국 입국의 기회가 생긴 중미 지역의 많은 아이들이 살기 어려워진 고향을 떠났다. 그래야만 했다. 중미 3국으로 불리는 과테말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에서는 수년에 걸친 가뭄과 허리케인으로 사람들이 굶어 죽어갔고,(각주 2) 그 와중에 갱단의 강제 징집, 성폭행, 살인이 남은 일상마저 파괴했다. 그렇게 고향을 떠난 아이들 중 12만 명이 미국에 도착했다. 긴 여정에 지친 그들을 맞이한 건 포화 상태에 다다른 수용 시설이었다. 일례로 수용 가능 인원이 250명인 텍사스 도나(Donna)의 한 시설은 4,000명까지 수용해야만 했다. 아이들은 찬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은박 담요를 덮고 잤다. 음식은 엉망이었고, 샤워는 일주일에 한 번뿐이었다. 이곳에서 많은 아이들이 아팠다.(각주 3) 이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바이든 행정부는 긴급 수용 시설을 신설했고 그중 하나가 내가 일하게 된 청소년 보호소였다. 기독교계 비영리 단체가 운영하는 이 보호소는 원예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겨울이 다가오며 온실을 설계할 자원봉사자를 찾았고, 지도 교수였던 게럿 도허티(Gareth Doherty)가 내게 권해주었다. 대학원 졸업 후 방황하던 중이었기에 선뜻 시작했다. 무지로 가벼웠던 마음은 곧 무거운 현실로 가라앉았다. 온두라스에서 미국 국경까지는 약 3,000㎞. 서울에서 울란바토르까지가 겨우 2,000㎞에 불과한데, 그 거리를 아이들은 걷거나 화물 열차에 몰래 올라타며 미국으로 향했다. 그러나 다리엔 갭(Darién Gap)이라는 정글에서 길을 잃어서, 열차에서 떨어져서, 멕시코 북부 사막을 건너다 목이 말라서, 리오그란데 강에 휩쓸려서, 인신매매와 성폭력을 당해서, 많은 아이들이 도착하지 못했다.(각주 4)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죽음은 짝 잃은 신발과 옷가지, 망가진 인형으로 남았고, 살아남은 아이들은 굳은 표정으로 카메라에 담겼다. 그래서 보호소의 아이들이 상실감에 잠겨 있으리라 상상했다. 하지만 첫인상은 슬픈 얼굴이 아닌, 작은 몸이었다. 코디네이터로 일하는 Z가 13세에서 17세 사이 청소년만 머물고 있다고 얘기했지만, 실제로 만난 그들은 기껏해야 열 살이나 됐을까 싶었다. 저 여린 몸으로 어른들도 통과하지 못한 길을 넘어왔다는 게 믿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런 여정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꽤 자주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그저 또래 아이들처럼 친구들이랑 노래도 부르고 축구도 하면서. 무엇이 이 평범한 아이들로 하여금 죽음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어오게 할까. 배고픔과 폭력을 피해 왔다는 거시적 설명은 명료해 보이지만, 실상 아이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가족과 꿈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중미 지역 가난한 농부의 아이들이었고, 고향에 두고 온 형제와 자매, 부모를 걱정했다. 갱단의 폭력에, 기후변화로 알 수 없게 된 농사까지. 살기가 막막해진 많은 가정이 미국에서 친척이나 가족이 보내주는 돈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그래서 빚을 내서라도 밀입국 브로커에게 아이를 부탁하는 부모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이런 이야기를 나눌 때면, 아이들은 가장의 눈을 하고서 의사나 변호사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런 아이들 5백여 명이 머물던 보호소는 본래 오일 산업 노동자를 위한 시설이었다. 광화문광장의 네 배 정도 되는 20에이커 평지에 57개의 기숙사동, 대형 텐트로 만든 다섯 개의 교실, 의료 시설부터 가족 혹은 난민 케이스 담당자와 연락하는 콜센터, 급식실, 축구장, 농구장까지. 많을 때는 약 천 명의 아이들과 비슷한 수의 직원들까지 있어서 작은 마을 같았다. 다만, 단층 조립식 건물 사이로 성인 키를 훌쩍 넘는 갈색 담장과 철조망, 그 위로 한없이 푸른 하늘이 이곳에 갇혀 있음을 상기시켰다. 오직 평면과 직선으로 이루어진, 그림자마저도 날카로운 갈색의 풍경. 나는 그 광활함과 답답함, 황량함에 압도되어 도망치고 싶었다. 종종 저 담장을 넘어 탈출을 감행한 아이들도 있었는데, 주변에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제 발로 돌아온다는 소문이 직원들 사이 농담처럼 돌았다. 집으로 돌아갈 수도, 미국에 속할 수도 없어, 아이들은 기름 사막 위를 부유했다. 이런 사막에서 많은 직원들이 아이들에게 피난처를 만들어주고자 했다. 원예 치료사로 일하는 K는 화단을 만들며 아이들에게 꽃과 흙을 만질 수 있게 했다. 아이들이 좋아했지만, 사막의 겨울은 생각보다 추워 더 이상 야외에서 수업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온실 설계를 부탁했다. 나는 설계를 시작하기 전 아이들이 어떤 공간을 필요로 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교육대학원 교수 V, 교육학 전공 대학원생 P, 원예 치료사 E, 코디네이터 Z와 함께 우선 이곳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디자인 워크숍을 진행했다. 급조한 흰색 모형 위로 십여 명의 아이들이 이곳에서 느낀 것들을 물감과 실을 사용해 풀어놓았다. 그 결과 우리가 배운 건 아이들이 세 가지 공 간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었다. 친구랑 놀 수 있고, 녹색이 많고,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 첫 번 째와 두 번째 조건을 만족하는 축구장은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곳은 다 함께 뛰어놀 수 도 있었고, 인조 잔디에 앉아 삼삼오오 수다를 떨기도 좋았으며, 금요일 밤에는 노래자랑에, 일 요일 아침에는 미사까지. 축구장은 그들에게 성당이자 노래방이었고 자유였다. 그렇다면 마지막,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은? 기숙사에서는 혼자 있을 수 없기에 아이들이 괴로워했다. 두 명이 한 방을, 그리고 네 명이 두 방 사이에 하나뿐인 샤워실과 변기를 함께 사용하는 구조였다. 성인 혼자 누우면 꽉 찰 방은 이층 침대와 작은 책상으로, 유일한 창문은 블라인드로 답답했다. 기숙사 건물은 복도 양쪽으로 스무 개의 방이 붙어 있는 구조였지만 공용 라운지 하나 없었다. 잘 때도 ‘보호’를 이유로 방문을 닫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각주 5)그렇다면 기숙사 외에 홀로 있을 수 있는 공간은 있을까? 모든 시설은 항상 단체로만 사용할 수 있었고, 혼자 사용하기엔 너무 크고 개방되어 있었다. 온실을 만든다 해도 오직 원예 수업을 들을 때만 접근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아이들은 그저 혼자서 울거나 기도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절실히 원했지만, 그곳 어디에도 그런 공간은 없었다. 자신만의 장소가 없다는 것은 인격의 상실과 다름없다. 인류학자 김현경은 『사람, 장소, 환대』 에서 한 인간은 사회가 자리를 내어줄 때 비로소 사람이 된다고 말한다. 환대란 바로 이 자리를 주는 행위이며, 그 자리가 모여 사회가 된다. 즉, 사회란 서로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모인 장소라고 할 수 있다.(각주 6)청소년 보호소는 난민 제도 속에 떠도는 아이들이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는 대기실일 뿐, 누구도 속한 장소가 아니었다. 아이 들은 평균 2주가량 머물렀고, 직원들 또한 3주 간 근처 호텔에서 출퇴근한 뒤 일주일의 휴가 동 안 자신의 장소로 돌아갔다. 사막의 풍경과 갈색 건물이 단지 낯설어서 아이들이 풀과 나무를 찾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곳의 갈색 풍경 속에서는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 이 아니었을까? 그들의 자리가 있던 곳이 언덕 과 강, 야자수와 바나나 나무, 작은 마을과 옥수수 밭이었기에. 그러므로 이 보호소에서 건축과 조경의 역할은 아이들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런 환대의 풍경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영감을 준 것은 아이들이 손수 엮은 우정 팔찌였다. 다양한 색상과 패턴을 엮는 그 팔찌처럼, 중남미 지역에는 기하학 무늬의 다채로운 천을 짜는 문화가 있다. 직선으로 반복되는 기숙사 건물을 씨줄로 삼고, 그 사이 공터마다 크기와 색상이 다른 그늘막과 정원을 날줄처럼 배치해 보호소 전체를 하나의 직조된 풍경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 아래에서 일과를 마친 아이들이 함께, 혹은 홀로 쉴 수 있기를 바랐다. 당시 보호소를 이끌던 A는 이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프로토타입을 만들 기회를 주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가장 많이 통과하는 삼각 형 길목에 작은 마당과 그늘을 만들었다. 2백만 원도 안 되는 예산으로 목재와 그늘막을 사고, 창고에 남아 있던 인조 잔디를 가져왔다. 남는 목재로 삼각형 테이블과 아이들이 뛰놀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었다. 직원들은 땅을 파서 기둥을 올릴 기초를 만들고, 잔디를 깔고, 화단을 놓았다. 우리는 이 공간을 아이들에게 익숙한 색상과 식물, 상징으로 장식하기로 했다. 무엇을 심고 싶냐는 질문에 아이들은 부겐빌리아(Bougainvillea glabra)를 가장 먼저 떠올렸다. ‘종이꽃’으로도불리는 부겐빌리아는 중미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목으로, 종이처럼 얇고 바스라질 듯한 세 장의 포엽이 아주 작은 꽃을 받치고 있다. 연중 열 달 가까이 꽃을 피우며, 복숭아색, 자주색, 빨간색으로 만발하는 포엽이 무척 화사하다. 우리는 화단에 부겐빌리아를 심고, 맞닿아 있는 기숙사 건물에 벽화를 그려 넣었다. 고향의 새와 나무, 국기부터 유명한 피라미드까지 아이들이 스스로를 확인할 수 있는 기호들로 채웠다. 아이들은 이 공간을 작은 광장이라는 의미의 라플라시타(La Placita)라고 불렀다. 어설픈 공간이었지만 만들자마자 직원들과 아이들이 많이 찾았다. 특히 아이들과 개인적으로 대화할 공간이 필요했던 상담사들과 케이스 담당자들이 자주 이곳에 앉아 있었다. 첫 디자인 워크숍이 끝난 뒤, ‘호수에’라는 이 름의 한 소년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아이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자신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줘서 고맙다고. 비록 이 공간이 완성될 즈음에는 자신이 떠나 있을 테지만, 앞으로 이곳에 올 친구들이 좋아할 걸 생각하니 보람이 있다고 했다. 그러곤 건축가가 되고 싶다는 말을 덧붙였 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알고 있었던 아이들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뿐 아니라 다음 사람을 위해 자리를 만들고 있었다.(각주 7) 사실 부유하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이었다. 그저 주어진 단계만 따라가면 인생이 정답처럼 풀 릴 거라 생각했는데, 졸업 후 아무데도 갈 곳이 없었다. 그 막막했던 시절, 그 친구의 꿈이 내게 길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좀 더 해볼 까 싶었다. 어쩌면 여기서 내 길을 찾을 수 있을 까 싶어서. 그런 이기적인 마음으로. **각주 정리 1. 2021 회계연도(FY2021, 2020년 10월 1일~2021년 9월 30일) 동안 미국 보건복지부 산하 난민재정착국은 총 122,731명의 미동반 아동을 보호했다. 이 수치는 전년 대비 약 8배 증가한 것으로, 2020년에는 15,381명의 미동반 아동을 보호했다. 출처: 난민재정착국(acf.gov/orr/about/ucs/facts-and-data) 2. 2021년 3월 세계식량계획(World Food Program)은 이 지역 주민 약 백만 명이 기아 상태임을 선언했다. American Immigration Council, “Rising Border Encounters in 2021: An Over-+view and Analysis”, March 4, 2022. 3. Hilary Andersson and Anne Laurent, “Children Tell of Neglect, Filth and Fear in US Asylum Camps”, BBC News, May 23, 2021. 4. 이러한 여정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독자에게는 뉴욕타임스 기자가 쓴 르포 기사를 읽어보길 권한다. Julie Turkewitz, “A Girl Loses Her Mother in the Jungle, and a Migrant Dream Dies”, New York Times , June 20, 2023. 5.인류학자 김현경은 고프먼의 『수용소』를 요약하며 이와 같이 타인 과 함께 자는 데서 오는 일상적 노출과 감시의 편의를 위해 강요되 는 노출이 “자아의 영토”를 침범하며 인격의 신성함을 오염시키는 것임을 지적한다. 자세한 논의는 ‘4장. 모욕의 의미’ 속 소단원 ‘배 제와 낙인’ 참조.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5. 6.위의 책 ‘1장. 사람과 개념’과 ‘2장. 성원권과 인정투쟁’ 참조 7.빅터 프랭클이 인용한 니체의 문구를 변용했다. 한국어판에는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로 나와있으며, 원문은 “Hat man sein warum? des Lebens, so verträgt man sich fast mit jedem wie?”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청아출판사, 2006, p.123. 강준호는 존재와 제도가 만든 풍경을 읽는 건축가다. UCLA에서 건축과 미술사를 복수전공한 뒤 하버드 디자인대학원(GSD)에서 건축학 석사를 마쳤다. 이후 게럿 도허티(Gareth Doherty) 교수의 비평적 조경 디자인 연구소(Critical Landscapes Design Lab)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며 해안 지역의 기후변화 인식을 조사했다. 현재 건축가로 일하며 좋은 풍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junho_s_kang

- [슬기로운 공원 생활] 브라이언트 공원과 나의 뉴욕 이야기
- 뉴욕 맨해튼의 심장부, 번잡한 거리와 고층 빌딩 사이에 숨 쉬는 초록의 오아시스, 브라이언트 공원(Bryant Park)이 있다. 이곳은 단순한 공원이 아니라, 나의 일상을 채우는 활력소이자 영감의 원천이다. 이 공원이 왜 이렇게 내게 특별한지 그리고 왜 수많은 뉴요커와 관광객이 이곳에서 웃고 쉬고 꿈꾸는 지 이야기하고 싶다. 하지만 글을 쓰기 시작하자마자 깨달았다. 공원의 매력은 단순히 아름다운 잔디나 계절별 이벤트가 아니라 그 안에서 펼쳐지는 사람들의 삶과 에너지에 있다는 것을. 삶의 일부가 된 브라이언트 공원 나는 맨해튼 동남쪽 스튜이타운(Stuytown) 아파트 단지에 살며, 미드타운 40번가에 위치한 필드 오퍼레이션스 사무실까지 거의 매일 걸어서 출퇴근한다. 처음 뉴욕에 왔을 땐 뉴욕시의 공유 자전거인 시티 바이크(Citi Bike)로 출퇴근을 시도했다. 자전거를 타고 맨해튼 거리를 질주하는 상상은 꽤 멋졌지만, 현실은 사용 가능한 자전거를 찾기 위해 10분씩 헤매는 전쟁터였다. 결국 자전거를 그만두고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집에서 매디슨 스퀘어 공원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지하철로 갈아타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뉴욕의 악명 높은 교통 체증, 거리 시위, 지하철 고장 같은 변수로 인해 소요 시간이 25분에서 50분까지 들쑥날쑥했다. 게다가 낡고 냄새 나는 지하철도 감내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분 전환 삼아 사무실까지 걸어가니 40분이 걸렸고 걷기가 가벼운 운동도 된다는 걸 깨달았다. 그 후로 걸어서 출퇴근하는 게 일상이 됐다. 이 루트의 묘미는 뉴욕에서 가장 사랑받는 두 공원, 메디슨 스퀘어 공원과 브라이언트 공원을 자연스럽게 지나친다는 점이다. 출근길엔 메디슨 스퀘어의 아침 햇살을, 퇴근길엔 브라이언트 공원의 활기를 만난다. 점심시간엔 동료들과 공원 벤치에 앉아 점심을 먹으며 사람 구경을 하곤 한다. 이 공원들은 내 일상에 녹아들어 마치 숨 쉬듯 자연스럽게 삶의 일부가 됐다. 브라이언트 공원의 진짜 매력 브라이언트 공원에 앉아 글을 쓰던 중, 문득 깨달았다. 내가 이 공원을 사랑하는 이유는 단순히 벤치에 앉아 사색하거나 커피를 마시는 순간 때문이 아니었다. 이곳의 진짜 매력은 사람들이다. 대학생 시절, 주말이면 별다른 계획 없이 명동으로 향하곤 했다. 커피숍 창가에 앉아 유리창 너머로 몰려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개성 넘치는 젊은이들, 호기심 가득한 외국인 관광객들, 노점 상인의 익살스러운 호객 행위, 신기한 길거리 음식을 맛보는 사람들, 그 모든 장면이 묘한 열망과 활력을 내게 불어넣었다. 브라이언트 공원도 다르지 않았다. 이곳은 연중무휴로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뉴욕 공원 특유의 철제 의자에 앉아 있으면, 5분 만에 피자를 해치우고 떠나는 직장인, 여행에 지친 유럽 가족, 영상 통화로 고향에 소식을 전하는 유학생, 선글라스를 끼고 책을 펼쳤지만 주변만 두리번거리는 사람, 잔디밭에서 럭비공을 던지다 관리인에게 저지당하는 청년들, 초콜릿을 파는 남미 이민자와 그 손을 꼭 잡고 따라다니는 다섯 살쯤 된 아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이력서를 고치는 사람. 이 모든 이들이 짧은 순간 스쳐 지나간다. 그들의 표정과 몸짓에서 나는 내 삶을 돌아보고 기쁨과 슬픔을 공유하며 묘한 위로와 에너지를 얻는다. 누군가는 여유롭게 웃고, 누군가는 열정 넘치는 얼굴로, 누군가는 울상 지으며 지나간다. 나도 그들과 함께 웃고 힘을 내고 슬픔에 공감한다. 이게 나만의 휴식이며 에너지 충전 방식이다. 주변 사람들도 비슷한 이유로 이곳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닐까. *환경과조경447호(2025년 7월호)수록본 일부 이홍인은 서울대학교에서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의 오피스박김, 호주의 맥그리거 콕샐(McGregor Coxall)과 하셀(Hassell), 미국의 하트 하워튼(Hart Howerton)에서 경력을 쌓은 뒤 필드 오퍼레이션스(Field Operations) 뉴욕 오피스에 입사해 BIM 전문가로서 래빗을 실무에 도입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빠르게 발전하는 테크놀로지를 적극 활용하여 실무 효율성을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 내일의 어린이를 위한 매력적인 공원을 만들다
- 어린이들을 위한 정원 축제가 만들어진다면 어떨까. 어린이날을 맞이해 2025 서울어린이정원페스티벌이 5월 5일부터 5월 18일까지 2주간 서울어린이대공원(이하 어린이대공원)에서 진행됐다. 처음 열린 이번 페스티벌은 서울국제정원박람회 연계 행사 중 하나로 어린이의 생태 감수성을 높이고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 정원 문화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마련됐다. 이번 행사의 주제는 ‘정원은 마법사’로 숲과 정원이 얼마나 마법 같은 장소인지 느낄 수 있게 하는 다양한 어린이 특화 정원과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특히 유니세프, GS건설 등 다양한 기관과 기업이 참여해 만든 26개의 특화 정원은 어린이들의 상상력과 감성을 자극했다. 이러한 정원은 어린이들이 또래 친구들을 만나 사회성을 기를 수 있는 커뮤니티이자 직접 흙을 만지며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공간으로, 숲과 정원이 주는 정서적 안정감과 생태 감수성, 더불어 상상력을 선사하는 특별한 경험을 제공할 것이다. 첫 회를 맞이한 서울어린이정원 페스티벌 정원 조성 과정과 함께 향후 페스티벌의 방향성에 대해 손성일 원장(서울시설공단 서울어린이대공원)을 만나 들어보았다. 서울어린이정원페스티벌은 어떻게 탄생했나. 이번 페스티벌을 통해 어린이대공원의 정체성을 명확히 보여주고자 했다. 어린이대공원은 대규모 도시공원이자 어뮤즈파크(amuse park)로, 개원 당시 어린이를 위한 도시공원으로 만들어졌다. 공원 내 휘호석에 적힌 “어린이는 내일의 주인공 착하고 씩씩하며 슬기롭게 자라자”가 그 의미를 잘 보여준다. 시대가 변하면서 대규모 도시공원이 많이 생겨나자 도시공원 간 경쟁이 발생했다. 어린이 감소와 노년층 증가로 인해 어린이대공원의 기능과 목적에 대한 다양한 변화의 요구도 있었지만, 어린이대공원은 여전히 어린이를 위한 어린이 중심이라는 정체성을 지켜오고 있다. 이번 페스티벌은 휘발성이 강한 그간의 어린이날 행사와 비교했을 때 차별이 있다. 다양한 어린이 체험 프로그램과 이벤트뿐만 아니라 지속가능한 어린이 정원을 통해 앞으로 어린이날 대표 콘텐츠로 기능할 수 있다. 이는 어린이대공원의 브랜드 경쟁력과 이미지 제고에 기여할 것이다. 성공적인 행사 개최를 위해 어린이 정원의 순기능에 주목했다. 현시대의 아이들은 조기 사교육, 스마트폰 중독, 기후 변화로 인해 야외 놀이 부족과 자연 결핍 등에 시달린다. 이는 결국 비만과 우울감 증가, 사회성 결여 등 다양한 문제를 아이들에게 초래한다. 정원을 통한 자연에 대한 경험은 이미 여러 학술 논문과 해외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창의력, 생태 감수성, 포용과 사회성 증가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궁극적으로 어린이 정원을 통해 미래 시대의 주역인 어린이들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페스티벌을 기획했다. 어린이대공원은 동물원 등 복합적 놀이 공간을 갖춘 오래된 대형 공원이다. 대규모 공원 계획에 의해서 세운 공원 내 정원을 조성하면서 나름의 기준이 있었을 것 같다. 어린이대공원이 서울숲, 보라매공원과 가장 차별화되는 점은 동물원, 식물원, 놀이공원 등 다양한 시설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설의 다양성과 복합성으로 인해 지역 주민과 방문객, 연령, 시간대별로 이용 행태와 선호 시설이 매우 다양하다. 따라서 누군가는 정원을 매우 선호할 수 있지만, 어떤 이에게는 의미 없는 공간이 될 수 있다. 특정 시설이 가진 기능과 역할이 이용자에게 반드시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양한 시설의 고유한 기능과 역할을 유지하면서 정원의 조성 효과를 극대화할 방법이 무엇일지 고민했다. 다양한 시설을 점이라고 했을 때, 정원을 이를 잇는 선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주동선과 산책로 주변으로 대상지를 선정하고 정원을 만들어 나갔다. 이용자들이 정원을 관람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더라도, 목적지로 이동하거나 단순히 산책하는 동안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즐기고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정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환경과조경447호(2025년 7월호)수록본 일부

- 바람의 정원
- 지난 5월 영국왕립원예협회(RHS)가 주관하는 말번 스프링 페스티벌(Malvern Spring Festival) 쇼가든 부문에서 윤선미·루 웬쥬안(Lu Wenjuan)의 ‘바람의 정원(Garden of the Wind)’이 금메달을 수상했다. 윤선미와 루 웬쥬안은 지난해 RHS 말번 스프링 페스티벌에서 ‘그린 아일랜즈(Green Islands)’로 동메달을 수상한 팀으로 2년 연속 수상의 영광을 안게 됐다. ‘바람의 정원’은 전통적인 동양의 미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틀에 얽매이지는 않는다는 동양 철학을 반영했다. 희망이라는 뜻의 동음이의어 ‘바람’에서 영감을 얻어 정원에 바람이 불면 방문객이 희망과 자신감을 느낄 수 있게 연출했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소리와 바람에 흔들리는 움직임의 모습, 공간 곳곳의 예술 작품 등 다양한 방식으로 바람을 경험할 수 있다. *환경과조경447호(2025년 7월호)수록본 일부

- 정원이 속삭이다
- 지난 5월 현대건설은 영국왕립원예협회(RHS) 플라워쇼 웬트워스 우드하우스(Wentworth Woodhouse) 쇼가든 부문에 성균관대학교와 공동 작업한 ‘정원이 속삭이다(Garden Whispers)’가 진출했다고 밝혔다. 영국 RHS 플라워쇼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적인 정원 박람회로 첼시, 멜버른 등 영국 주요 도시에서 대규모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올해는 최초로 영국 사우스요크셔(South Yorkshire)의 웬트워스 우드하우스에서 개최된다. ‘정원이 속삭이다’는 최혜영 교수(성균관대학교 건설환경공학부)와 최연길 책임(현대건설)이 함께 작업한 작품이다. 다양한 높이로 배치된 하얀색 기둥을 통해 자연의 시적인 풍경으로 초대하는 듯한 모습을 연출한다. 또 바람 결을 따라 리듬감 있게 물결치는 입체적인 실루엣 안쪽에 고요한 휴게 공간과 생동감 넘치는 초화류가 조화를 이룬다. *환경과조경447호(2025년 7월호)수록본 일부

- [기웃거리는 편집자] 상상 속 풍경이 현실이 된다면
- 이 페이지에서 한 페이지만 앞으로 넘기면 새책 지면이 나온다. 이 지면을 편집하다 장기 기억소에 저장된 추억의 장소를 발견했다. 거제도에 위치한 외도 보타니아다. 환경과조경 입사를 도와준 곳이기도 하다. 당시 채용 공고에 적힌 제출 서류 중 ‘필력을 볼 수 있는 A4 3매 이내의 원고’가 있었다. 기명 기사, 에세이, 독후감 혹은 가상의 작품 취재기나 인터뷰를 적으라는 미션이었다. 어떤 걸 쓸지 소재 선정에 고민이 깊었다. 이력서, 자기소개서는 얼추 완성했는데 원고 미션은 한 글자도 작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본 TV 프로그램 속 장면이 원고 작성의 실마리가 되었다. 외도 보타니아를 소개하는 장면을 보고 프로젝트 지면처럼 장소에 대한 설명에 나의 감상을 곁들인 원고를 적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커서만 깜빡이던 한글 파일에 글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외도 보타니아를 소재로 선정할 수 있었던 건 사실 그 즘에 다녀온 여름휴가 덕분이다. 거제도와 부산광역시로 휴가를 떠났는데, 외도 보타니아도 함께 들렸다. 직접 다녀왔으니 생생하게 글을 쓸 수 있었다. 거제도에서 1박을 하고 부산시로 넘어갔는데, 가덕 해저 터널을 이용했다. 가덕 해저 터널은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에서 부산시 강서구를 잇는 터널로, 세계 최초로 파도와 바람, 조류가 심한 외해에 건설됐으며 48m 해저에 위치해 있다.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내비게이션 속 자동차는 바다 위를 달리고 있었다. 눈으로 보기에는 고속도로에 있는 터널과 다를 것 없었지만 해저 터널 중간에 있는 현 위치의 수심을 알려주는 표지판은 내가 지금 바닷속에 있구나를 깨닫게 해주었다. 바닷속을 아무렇지 않게 다닐 수 있는 모습은 초등학생 때 매년 개최되던 과학 상상화 그리기 대회 단골 주제였다. 해조류가 해류에 일렁이고 물고기가 돌아다니는 풍경을 배경으로, 네모난 건물들과 그 안에서 밥을 먹는 가족들, 보글보글 피어오르는 거품들. 한 반에 서너 명은 이 풍경을 그렸다. 또 많이 등장하는 소재는 우주 도시와 날아다니는 대중교통이었다. 그땐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상상 속 풍경이었는데, 해저 터널을 지나고 보니 곧 그때의 상상이 실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상상화 그리기 대회에 참여할 필요가 없어진 직장인이 된 내가 최근 다시 상상의 나래에 불을 지폈다. 넷플릭스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한국 애니메이션 ‘이 별에 필요한’(2025)을 본 것이다. 화성 탐사를 꿈꾸는 우주인 난영과 뮤지션의 꿈을 접어둔 제이가 만나 꿈과 사랑을 향해 나아가는 영화다. 한 줄의 영화 소개 글만 보고도 어떤 내용일지 쉽게 짐작할 수 있겠지만 2050년 서울을 배경으로 전개된 점이 애니메이션을 보게 했다. 세운상가, 을지로와 근방이 주요 무대인데, 홀로그램, 네온 같은 그래픽 디자인과 사이버펑크(각주 1) 스타일에 레트로가 더해진 서울의 모습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특히 공중에 매달려 다니는 지하철은 몇 십 년 전에 그린 상상화의 모습을 구현해주었다.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난영의 화성 탐사를 응원했지만 난영이 꿈을 이루게 되면 강제 이별하게 될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알 것 같아 안쓰러웠다. 하지만 이 안타까움은 난영과 제이보다 과거에 사는 내가 멋모르고 한 동정이었다. 30년 뒤 기술은 두 사람을 헤어질 수 없게 했다. 우주 정거장에는 와이파이가 터져서 (시차가 있지만) 실시간으로 연락이 가능하고, 증강 현실이 도입된 영상 통화 기술 덕분에 제이와 난영은 우주 정거장에서 데이트를 한다. 무사히 지구에 돌아온 난영은 제이와 처음 만났던 장소에서 재회하며 영화는 끝난다. 영화 속 가깝지만 먼 미래의 모습은 잊고 지냈던 상상 속 풍경의 실현성에 대한 기대감을 되살렸다. 기웃거리는 편집자(2023년 6월호)에서 메타버스로 만나는 202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에 대한 이야기를 쓴 적 있다. 정원박람회를 가지 않아도 PC와 모바일로 박람회장을 둘러볼 수 있었다. 2년이 지난 지금, AI의 발달로 사진을 지브리,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타일로 바꿔주기도 하고, 적절하게 명령을 던지면 자료 조사부터 기획서 작성까지 도와준다. 곧 메타버스를 넘어, 가보고 싶었던 나라를 버튼 하나로 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 버튼으로 이탈리아 돌로미티의 알페 디 시우시로 가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푸른 초원 위에 누워있고 싶다. **각주 정리 1.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과 펑크(punk)의 합성어로, 컴퓨터로 대표되는 첨단 기술과 반체제적인 대중문화의 결합, 나아가 기계와 인간의 대등한 융합을 시도하는 데서 비롯된 새로운 형태의 문화적 흐름을 의미한다.

- [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학교의 외부 공간은 운동을 잘하는 학생뿐 아니라 다양한 성향의 학생을 포용하는 다양성 높은 공간으로 거듭나야 한다
- 하나의 주제로 여러 가지 이야깃거리를 엮는 일. 잡지 에디터가 응당 해야 할 일이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래서 정원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읽히는 이번 호 지면을 편집하고 교열을 보며 기분이 좋았다. 그중 정원이라는 이름을 달았지만, 사실 본질이 다른 공간이 있다. 사가람 열린 정원이 바로 그것. 개선 사업을 통해 새로 탈바꿈한 사천여자고등학교는 다양한 성향의 학생을 포용할 뿐 아니라 산책하거나 쉴 곳이 없는 지역 주민들까지 끌어안는 교정을 갖게 됐다. 이때 정원이라는 단어는 그 독특한 성격을 은유한 표현이다. 학교 공간을 소개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가장 최근에 다룬 게 서울문교초등학교 언덕 놀이터, 서울영도초등학교 트리하우스, 서울배봉초등학교 놀이키움, 서울원효초등학교 놀이지붕(모두 2021년 3월호)이다. 어린이 놀이터를 한데 모아 실었던 호였다. 대학 캠퍼스면 모를까 해외와 국내를 막론하고 학교의 교정을 다룬 작품은 찾기 힘들었다. 아마 새 학교를 짓는 경우가 드물며, 학교를 새로 만든다 하더라도 공간 구성 요소와 이를 배치하는 방식이 이미 굳어져 있고, 리모델링할 경우 부분적인 보수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그럴 것이다. 게다가 학교라는 공간은 특수하게도 교육청의 관할 아래에 있다. 2021년 3월, 많은 학교 놀이터를 소개할 수 있던 이유는 교육청이 놀이 중심의 학습 공간 조성의 일환으로 ‘꿈을 담은 놀이터’ 사업을 한창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 놀이터에만 변화가 있던 건 아니다. 몇 년 전부터 학교 공간에 대한 다양한 실험이 벌어지고 있다. 기억에 남는 사업 중 하나가 경기도교육청이 진행한 ‘생태 숲 미래학교’다. 학교 내 숲을 조성해 기후위기와 환경 문제 해결 역량을 길러주겠다는 거창한 목표를 이야기했지만, 교내에 관상을 넘어 교감과 경험이 가능하고 미기후를 조성할 수 있을 만한 규모의 녹지를 만드는 일로 보였다. 수목과 식물이 자라는 작은 공간이 뭐 그렇게 큰 변화를 가져 오겠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게는 충분히 의미 있는 일로 느껴졌다. 부천 송내고등학교의 생태 숲(조경하다열음 설계)은 비가 오면 연못이 되는 빗물정원이 아주 인상적이다. 시험을 망쳤건 친구와 싸웠건 울적해진 당신이 교정을 거닐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빗물에 젖을 뿐인 콘크리트 벽보다는 빗방울을 맞으면 그 무게에 고개를 꺾었다 드는 식물이 더 위로가 되지 않을까. 원래 나와 전혀 다른 존재보다는 조금이라도 닮은 대상에게 자신을 투영하고 애정을 품게 되기 마련이다. 대학교 신입생 시절, 식물에 별 감흥을 보이지 않았던 동기들이 점차 수목을 배워가다 담배꽁초를 회양목에 버리는 아저씨를 목격한 날 함께 분개했던 것처럼. 인터뷰를 마치고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밀주초등학교(스튜디오일공일 설계, 30쪽 참고)에 대해 검색했다. 색다른 운동장의 사진이 늘어져 열심히 마우스 휠을 굴렸다. ‘생태환경 미래학교 운동장’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수식이 아니었다. 운동장의 반절은 놀이터였다. 조합 놀이대도 있지만 독보적인 주인공은 리듬감 있게 흐르는 잔디언덕과 모래사장이다. 언덕을 만든 김에 비탈을 따라 미끄럼틀도 놓았고, 언덕 아래에는 동굴을 연상시키는 터널도 만들었다. 그네를 매단 아름드리나무 아래에는 평상이 있다. 운동장의 남은 반절은 개울이 차지한다. 디딤돌을 밟고 건너다 심심해지면 슬쩍 발을 담글 수도 있다. 벤치를 비롯해 목재 평상까지 앉을 곳이 넘쳐 난다. 축구와 농구 같은 운동은 따로 마련된 풋살장과 실내 체육관에서 할 수 있다. 이곳저곳에 삼삼오오, 하나의 원을 이룰 만큼 큰 무리, 또는 단둘이 모여 저마다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학생과 교직원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학교의 외부 공간은 운동을 잘하는 학생뿐 아니라 다양한 성향의 학생을 포용하는 다양성 높은 공간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연혜진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인간이 아닌 비인간 생명체도 포용하는 공간이라면 더욱 좋을 테다. 그런데 이 공간을 유지‧관리하는 데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겠다 걱정하는 순간 이번엔 문정석의 말이 나를 나무랐다.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학생이 아닌 일반 사람들이 학교 공간에 관심을 갖게 되면, 학교 공간의 사회적 담론화로 이어진다. …… 그런 이유로 학교가 더욱 공공 공간화되어야 학교 공간을 바꿀 수 있는 예산을 끌어올 수도 있지 않을까?”

- [PRODUCT] 지속가능한 도시 정원을 만드는 엠가든 플랜터 모듈
- 최근 정원이 다양한 외부 공간 연출 요소로 활용되고 있다. 이벤트형 팝업 공간을 비롯해 카페 등 상업 공간에서 정원 연출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높은 정원 조성 비용과 긴 공기, 유지·관리 문제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이소플랜의 ‘엠가든(M_GARDEN)’은 이동식 모듈러 시스템 정원 브랜드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모듈화(modular), 이동성(mobile), 관리성(manageable)을 기반으로 간편하게 조성할 수 있는 플랜터 모듈을 만들고 있다. 엠가든의 플랜터 모듈의 장점 중 하나는 이동과 설치가 용이하다는 점이다. 레고 블록처럼 원하는 공간의 형태에 맞춰 쉽게 조합 및 확장, 재배치가 가능하다. 사전 조성 작업 후에도 모듈을 옮길 수 있어 시공과 철거가 편리하다. 조성 이후에도 부분 혹은 전면적인 모듈 교체로 정원의 지속적인 변화를 연출할 수 있다. 조성 이후 유지·관리를 위한 옵션도 제공한다. 정원 조성과 함께 정기적인 유지·관리를 제공하는 정기구독형 서비스인 ‘가드닝 케어 패키지’를 선택하면 초기 비용과 유지·관리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관공서, 예식장, 요양원 등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한 공간에는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또한 가드너와 협업을 통한 플랫폼 시스템을 구축했다. 가드너가 정원 조성 작업 시 엠가든 솔루션을 제공해주거나 의뢰받은 작업을 가드너에게 시공 및 관리를 맡기는 방식으로 B2B 플랫폼 역할을 수행한다. 이처럼 엠가든은 검증된 시장 수요와 차별화된 솔루션을 바탕으로 지속가능한 도시를 위한 조경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TEL. 010-4096-8645 E-MAIL.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