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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OSS] 디자인 상세의 중요성 The Art of Placemaking Is in the Detail
    조경설계는 단순히 계획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개념을 수립하고 프로젝트로 구현하는 것이다. 활용, 점유, 변형이 가능하며, 작동하는 공공 공간과 지나치는 공간이 아니라 머무는 공간을 만들고자 한다. 좋은 공간을 만들기 위해 벤치, 조명, 포장 등 세부적인 부분에 대한 디자인을 연구한다. 연결성과 커뮤니티를 강화하는 사회적 공간 오랜 역사를 지닌 하버드대학교 광장(이하 하버드 광장)은 캠브리지 스트리트 지하도 위에 위치하며 과학 센터, 북부 캠퍼스와 이어져있다. 이용률이 저조하고 황폐한 들판이었던 이 공간을 캠퍼스의 주요 만남의 장소로 변화시켜 학생과 교직원, 방문객, 지역 사회를 연결했다.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될 수 있게 유연한 설계를 적용했다. 빗물을 배수할 수 있도록 굴절시킨 지표면은 시설 장비, 물·온도 관리 시스템을 내장하고 있다. 옻나무와 은행나무 군락은 조용한 휴식 공간을 제공할뿐 아니라 레인 가든으로 활용된다. 정밀하게 설계한 7개 벤치와 독특한 모양의 17개 벤치는 프로그램에 따라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 사람은 정해진 규칙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공간을 만들기 때문에 하나의 방식으로 모든 공간을 설계할 수 없다. 최근까지 벤치는 효율적이지만일률적인 부품과 조립을 통해 생산됐다. 이로 인해 평균적인 인체에 맞춰진 전형적인 벤치가 대량 생산되어 왔다. 이를 탈피하고자 생산 및 연관 모델링 소프트웨어를 활용해 다양한 신체 크기와 유형에 적합한 의자를 제작하고자 한다. *환경과조경431호(2024년 3월호)수록본 일부 글 Stoss Harvard Plaza Team: Stoss, Vanasse Hangen Brustlin, Simpson Gumpertz & Heger, Project Projects, Light THIS!, Thompson Engineering, Pine & Swallow, Vav International, Parallel Development, Building Conservation Associates, Haley & Aldrich, Howeler +Yoon, Irrigation Consultants Client: Harvard University Location: Cambridge, MA, USA Area: 2ac Timeline: 2011~2013 Gerstacker Grove Team: Stoss, Mannik Smith Group, Illuminart Client: University of Michigan Location: Ann Arbor, MI, USA Area: 4ac Timeline: 2013~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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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OSS] 에세이: 일상을 바꾸는 긍정적 변화
    설계는 협동에서 시작된다 스토스의 작업은 대상지와 지역 사회에 기반을 둔다. 프로젝트를 통해 역사, 생태, 용도, 문제점까지 대상지가 가진 특징을 배우고자 한다. 대상지와 그 주변에 살고, 대상지를 지나가며 이용하고, 대상지에 관심을 가진 다양한 사람 및 이해관계자와 좋은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이 성공적인 오픈스페이스를 만드는 핵심 전략이라 생각한다. 해수면과 온도 상승, 심각해지는 악천후, 빈번해지는 홍수 등 점차 예측하기 어렵게 바뀌는 기후에 대응할 수 있는 설계와 정책을 실현할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지자체, 비영리 기관, 시민 모두가 협동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린 인프라와 자연에 기반을 둔 해결책을 확장하는 것도 중요하다. 거리, 오픈스페이스, 건물, 인프라를 사회·경제적으로 공평하게 제공할 뿐 아니라 우수를 집수하고 흡수할 수 있도록 설계해야 한다. 자연과 함께하는 도시계획 도시는 토지 소유권, 상업, 산업, 인프라,네트워크 등 도시 내부 원리에 의해 조성됐다. 그 과정에서 자연은 훼손되고 방치되고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이로 인해 필수적인 환경 기능이 사라지고 기후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동식물의 서식처가 파괴되고 인간의 건강과 복지에도 해로운 상황이 됐다. 도시와 도시 권역이 환경 시스템과 맺고 있는 역학 관계를 활용하면 더 나은 기능을 발휘하는 건강한 장소를 만들 수 있다. 누구와 함께, 누구를 위해, 무엇을 디자인할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해 자연과의 친밀감을 높이고 문화적 활력을 불어넣는 도시계획과 설계 체계를 마련하고자 한다.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설계 강, 바다, 폭풍으로 인한 홍수, 폭염, 산불, 대기 오염, 공중 보건 악화, 생물 다양성 상실 등은 사회적으로 취약한 지역 사회에 불균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는 변화를 포용하고 새로운 기술을 연구하고 모델링하고 시험하고 친환경적인 기후 해결책을 제시하며 지역에 적합한 설계를 통해 문 제들을 해결해 나가고자 한다. 다양한 문제에 노출되어 있는 대도시뿐 아니라 환경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작은 공간 에도 적용할 수 있는 설계를 하고 인간, 야생 동물, 식물 모 두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고자 한다. 공원의 역할 공원은 오랫동안 놀이터, 도심 속 휴식처, 레크리에이션과 운동을 위한 공간으로 존재해 왔다. 사회적 인프라로 중요하게 작동하는 공원의 역할과 힘, 규모를 활용해 기후 변화, 사회 및 인종 형평성, 공중 보건, 생물 다양성, 서식처 훼손, 자연에 대한 접근성 등의 문제를 해결하고 시민들의 삶을 좀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다. 철저한 분석과 적극적 참여, 대상지 의 전통 문화와 상징 학습, 창의적이고 광범위한 프로그램 마련, 복잡하게 얽힌 문제 해결, 새로운 디자인 언어 도입을 통해 공원과 오픈스페이스에 새로운 역할을 부여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지역 사회에 다양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직면한 수많은 과제에 대한 유의미한 해결책을 찾고자 한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위한 실험의 장 아직 해결책이 없는 문제를 마주하기도 하고, 어떤 아이디어 나 재료로 단순하게 문제에 접근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의 연구가 계속해서 전진하며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오늘날 아직 존재하지 않는 해결책을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파트너와 함께) 개발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독특하고 실험적인 설치물과 전시를 통해 선보이고 있다. 비판적 시각과 사고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술을 클라이언트에게 제안하고 프로젝트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속가능성과 회복탄력성에 초점을 둔 설계 크고 작은 프로젝트를 하면서 경관, 공공 공간이 지역 주민, 노동자, 방문객을 불러들이기 위해서 단순히 아름답기만 해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해진 예산 범위 내에서 지속 가능성과 회복탄력성에 초점을 둔 설계가 필요하다. 독특하고 매력적이면서 눈길을 사로잡는 설계에 기능적이고 친환 경적인 요소를 녹여냄으로써 일상과 여가를 위한 환경을 조성하고 이전에는 잘 몰랐던 가치와 매력을 발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활기찬 공공 공간을 위한 노력 도시의 공공 공간은 점점 더 새로워지고 있다. 다양한 사람 을 끌어들이고, 변화하는 라이프스타일과 업무 환경에 대응 하며,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용도로 쓰이는 공간으로 재창조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예측할 수 있는 행동뿐 아니라 예상하지 못한 활동까지 고려한 역동적이고 유연하며 대처 가능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설계해야 한다. 끊임없는 브레인스토밍을 통해 변화하는 이용자를 위한 여러 방안과 한 공간에서 여러 활동을 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야 한다. 방치되어 사용되지 못하는 공간이 많은 사람이 모이고 활기 넘치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변모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미래를 대비한 설계 미래 기후에 대비한 설계는 시간의 흐름에 적응하고 변화할 수 있는 탄력적 조경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 리는 끊임없는 학습과 연구를 통해 기후에 대한 적응력과 회복력을 갖춘 설계를 하고, 예상할 수 없는 환경과 미래에 적응할 수 있는 디자인을 만들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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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도가 만든 도시] 소유
    현대 도시에서 공간의 소유에는 영역성 같은 동물적 본성부터 도시 공간에서 창출되는 부가 가치가 귀속되는 사회적 장치까지, 인류 역사를 통해 누적된 여러 층위의 의미가 담겨 있다. 오랜 시간 주민들이 다니던 길을 막아 사유지임을 알리는 험악한 경고문을 붙이기도 하고, 오랫동안 전세로 살던 집이 재개발되어도 소위 갭 투자를 한 집주인만 새 주택을 분양받는다. 공간 소유에 담긴 여러 의미는 다양한 법·제도에서 촘촘하게 규정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소유를 인정하는 권리인 재산권은 근대 자유주의 체제에서 기본권이자 불가침을 원칙으로 하는 천부 인권 중 하나로 여겨진다. 한국도 재산권은 대다수 근대 국가와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가 합의한 가장 상위의 규율인 헌법에서 ‘국민의 권리’로서 보장된다. 그에 따라 민법에서 부동산(토지와 정착물)과 소유권의 내용(사용·수익·처분)을 규정한다. 또한, 한국 도시 공간은 물론 사실상 국토의 어느 한 조각도 ‘소유’의 밖에 있지 않다는 점에서 공간의 소유는 우리 사회에서 참으로 철저하게 작동하고 있는 체제다. 이렇게 보면 마치 재산권이 어떤 공간 정책과 제도도 범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비친다. 그러나 연재를 시작하며 언급했듯, 모든 공간 제도는 “공공복리”를 근거로 재산권을 제한할 수 있는 정당성을 가지며, 이는 재산권을 보장하는 헌법에서 함께 규정된다.(각주 1) 이런 근거로 우리의 공간 제도는 토지와 건물 등 공간의 소유에 대해 배타적으로 보장되는 사용·수익·처분의 권리 모두에 촘촘하게 개입하고 있다. 예를 들어 도시계획상 일반상업지역이라면 단독주택을 지을 수 없다. 지금은 서울시 열린송현 녹지광장이 된 옛 미 대사관 부지는 한때 민간 기업 소유로 한옥 호텔 등 관광 숙박 시설 사업이 추진되기도 했지만 학교에 인접한 탓에 계획이 불허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즉, 소유권이 있어도 땅의 ‘사용’은 제한될 수 있다. 또, 집주인이 전세 보증금을 올릴 때도 법이 정한 한계가 있으니 개인이 소유한 공간으로 ‘수익’을 내는 것에도 참견한다. 공공은 물론, 민간이 개발한 아파트를 팔 때도 무주택자에게, 혹은 신혼부부에게, 다둥이 가족에게 우선하여 팔라는 분양 제도는 ‘처분’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이다. 이처럼 직접적 제한을 비롯해 차등적 세금 체계를 통해 소유권에 간접적 제한을 가하여 정책적 목적을 유도하는 제도는 수도 없이 많다. 도시 개발의 매개, 소유 개발 이익을 누가 가져갈 것인가?(각주 2)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지든 건물이든 소유권 자 체를 강제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기본권인 재 산권의 보장 원칙을 침해하는 중대한 문제다. 그러나 대규모 시가지를 개발하고 혹은 고속도로 나 공항, 산업 단지 같은 인프라를 조성하는 등 광대한 토지가 필요한 경우, 조각조각 나뉜 개별 소유권을 인정하고 자발적 동의를 얻어 실행한다 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재산권 을 보장하는 사회에서는 도시 개발에 필요한 토 지와 건물의 소유권을 강제적으로 가져오는 것, 즉 ‘수용’을 하고 적정한 보상을 하는 방법을 채택한다.(각주 3) 물론 나라마다 수용이 정당화되는 범위 와 보상의 방식, 수준은 다를 것이다. 지난 반세기 엄청난 속도로 도시화를 이룬 한국은 도시 개발을 위해 개별 소유를 어떻게 다뤘 을까. 현재 한국의 도시 공간을 만든 대표적 개발 방식은 1980년대까지 주를 이룬 토지구획정리사업, 그리고 그 이후는 택지개발사업이다. 두 사업 모두 도시 용지로서 인프라가 전혀 없는 농 지와 자연 발생 촌락을 도로망과 공공시설 용지 를 갖추고 용도에 맞게 획지가 나뉜 시가지로 조 성하기 위한 제도지만, 소유권 측면에서는 완전 히 다른 구조로 진행됐다. 전자는 원 토지주의 소유권을 유지한 채 지자 체나 공사가 사업을 시행하고, 완료 후 원래 소유 한 토지 면적에 비례해 새로 조성한 도시 용지로 돌려받는 ‘환지’ 방식이다(그림 1). 다만 도로나 공 공시설 용지를 확보하고 사업 비용을 회수하기 위한 ‘체비지’를 떼어두어야 하므로 돌려받는 토 지의 면적은 원래보다 상당히 줄어들게 되는데, 이를 ‘감보율’이라고 한다. 심한 경우 절반까지 줄 어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도시 용지로서 인프라 를 갖춘 반듯한 땅의 총 가치는 기존 농지의 토 지 가치에 비해 훨씬 높고, 또 지가는 계속 오르 고 있었으니 토지주 입장에서는 손해가 아니다. 토지구획정리사업은 일제강점기 영등포, 청량리 일대 개발에 처음 도입됐고,(각주 4)전후 도시 개 발을 위한 재원이 부족했던 시기에 서울을 비롯 한 대도시에서 광범위하게 채택됐다. 도시 개발 에 필요한 토지를 확보하기 위해 막대한 보상비가 들지 않으며, 앞서 설명한 바처럼 개발 이익이 토지주에 귀속되는 구조로 실행이 용이했다. 반대로 택지개발사업은 택지개발지구가 지정되면 사업을 시행하는 지자체나 공사가 해당 토지를 강제 수용하고 현재 토지 이용(농지)을 기준으로 원 토지주에게 보상한 후에 개발을 진행한다.(그림 3) 이렇게 조성된 공공택지는 원 토지주와 상관없는 주택 건설 사업자 등에게 소형 주택을 짓는 조건으로 원가 이하로 공급된다. 그리고 여기에 지어진 아파트는 분양 제도에 따라 무주택 자 등에게 우선 공급되는 흐름이다. 1980년대를 전후해 주된 도시 개발 수단이 토지구획정리사업에서 택지개발사업으로 전환된 배경에는 토지구획정리사업에서 도시개발에 아 무런 기여가 없는 소수의 원 토지주(종종 투기꾼)에 게 개발 이익이 집중되는 문제가 있다. 도시계획과 그에 따른 도시 개발이라는 공적 행위로 창출 된 이익 배분을 조정하기 위해서는 결국 소유를 매개로 한 사업의 구조를 바꿔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유권을 가져옴으로써 원 토지주 를 개발 이익에서 배제한 결과, 택지개발사업의 이익은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도시 개발을 시행한 지자체와 공사, 그리고 아파트를 건설한 사업자에게도 돌아가지만, 가장 큰 이익을 챙기는 것 은 시세보다 훨씬 낮은 분양가로 아파트를 최초로 분양받은 사람이다. 물론 원 토지주와 마찬가 지로 최초 분양자도 개발 이익을 가져갈 특별한 기여와 노력이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주 택난과 낮은 주택 소유율 하에서 주택이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수요자에게 간다는 전제로 우 리 사회의 암묵적 동의를 얻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소유하는 소유권(Ownership Takes It All), 오래된 도시 공간의 공간 가치는 누가 가져 가는가 신도시 개발의 이익이 대부분 농지와 인프라를 갖춘 도시 용지의 가치 차이 그 자체에서 발생한 다면, 기성 시가지에서 공간 이익의 상당 부분은 오랜 시간 여러 도시 활동이 누적된 결과로 공간 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에서 온다. 그런데 누가 얼마큼 기성 도시 공간의 가치 상승에 기여했는가 를 가르기란 매우 어렵다. 수많은 사람이 직간접적으로 개입되어 있으며, 여러 도시 정책과 공공 투자도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서울 강남의 지가는 미미하지만 잠깐 그 동네 어학원을 다닌 사람들의 몫부터 시작해 대로를 따라 늘어선 고층 빌딩과 같은 민간의 투자와 서울 어느 곳보다 도 촘촘하게 놓인 6개 전철 노선 등이 반영된 결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공간 가치 상승의 이익은 소유권에 귀속된다.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은 기성 도시 공간에서 이러한 기여와 이익 배분의 어긋남을 잘 드러낸다.일반적으로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은 독특한 문화 자원이 있는 지역이 명소화되면서 임대료가 높아지고, 기존 점유자들이 내몰리는 것으로 이해된다. 인디 음악의 근거지였던 홍대 앞이 그런 예다. 그러나 이제는 상대적으로 물리적 환경 이 낙후되어 임대료가 낮았던 지역에 특색 있는 소비―주로 식음― 공간이 하나둘 생겨나 그 자체 가 그 지역의 문화 자원이 되어 젠트리피케이션 을 촉발하는 현상으로 확장되고 있다. 따라서 구 시가지 저층 주거지, 영세 제조 업체나 도소매점 이 밀집한 지역 등 전통적인 소비 중심지와 거리 가 먼 입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의 과정에 서 공간 가치 상승의 기여자는 누구일까? 상업 공간은 주택에 비해 건물 자체의 노후도가 중요 하지 않으며 인테리어나 주방과 냉난방 설비 등 을 대개 건물주가 아닌 임차인이 영업 목적에 맞 게 따로 투자한다. SNS에 올릴 만한 소품과 메 뉴 또한 임차인의 능력이다. 이런 몇몇 가게가 유 명세를 타면 주변에 더 많은 카페와 음식점이 새 로 문을 열고, 이 지역을 소위 OO리단길로 명명 하며 더 많은 사람이 찾고 또 자발적인 홍보를 한다. 그리고 누구나 알고 있듯, 건물주가 아닌 임차인과 이 지역을 찾는 사람들이 만든 공간 가 치는 임대료와 부동산 가격에 반영되어 ‘소유’만 이 그 이익을 가져갈 자격이 된다. 도시 공간에 새겨지는 소유 도시의 생김새는 한시도 멈추지 않고 변하지만, 어떤 특성들은 도시 공간에 깊게 새겨져 상대적 으로 오래도록 유지된다. 스피로 코스토프는 오랜 도시 역사에서 산과 강, 해안선 같은 지형적 특성이 만든 특유의 도시 윤곽, 다음으로는 주요 가로망과 블록, 그리고 필지의 구획이 차례대로 쉽게 변하지 않는 도시 형태의 요소들이라고 설명한다. 소유는 여기서 상대적으로 쉽게 변하는 필지를 단위로 한다. 그런데 지난 반세기 한국의 도시 공간을 만들어 온 과정과 그에 결부된 제도를 보자면 오히려 반대가 아닐까 싶다. 아파트를 짓기 위해 산을 깎 아내고 바다를 메워 산업 단지를 건설하며 택지 를 조성하기 위해 강줄기 바꾸기를 서슴지 않았다. 도로를 새로 개설하거나 넓히기 위해 도시계 획선들은 수백 년에 걸쳐 자리 잡은 옛길을 무심 하게 가로질러 선 밖의 토지를 강제 수용했다. 숱 한 주택 재개발은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로 엮인 저층 주거지를 하나의 거대한 아파트 단지로 병합해왔다. 이 과격한 이력과 반대로 개별 필지 단위에서 제도의 개입은 오히려 소극적인데, 소유권을 침해할 만큼의 ‘공공복리’를 인정받기 어렵다는 뜻 이다. 부정형 필지를 반듯하게 펴거나 지나치게 작은 필지나 도로가 닿지 않는 맹지를 다른 필지와 합치는 소소한 조정조차 각 필지를 소유한 이 들의 합의를 이끌어 내기 쉽지 않아 어렵다. 그렇 기 때문에 소유의 구획은 도시 공간에 의외로 오래도록 유지되어 깊게 새겨진다. 한번 하나의 소유로 묶인 공간은 그 이후의 변화에서도 쉽게 바뀌지 않는 단위가 된다. ‘그림 5’는 2010년대 우후죽순 지어진 도시형생활주택 의 대지 형상이다. 한 필지의 크기가 작은 저층 주거지에서는 도시형생활주택을 짓기 위해서 보 통 둘 이상의 필지가 필요하다. 소유주가 각기 다른 연접한 필지들을 한번에 사들여 병합 개발 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아서 한 집은 팔고 싶어 해도 다른 집은 그럴 의사가 없거나 매매 가격을 맞추기 어려워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확보 가능한 연접 필지에서 사업을 진행하다 보니 도 시형생활주택의 대지가 테트리스 조각 같은 기 형적인 형상이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작은 필지 들을 병합은 사실상 비가역적이다. 또한, 병합 개 발에 편입되지 않은(또는 못한) 작은 필지는 독자적 인 재건축이 어려워 장기간 노후한 상태로 남게 될 것이다. 결국 임의적인 병합에 의한 불합리한 대지 형상을 조정할 기회는 도시형생활주택이 재건축 시기를 맞게 될 몇 십 년 후가 될 것이다. 집합 소유라는 시한폭탄 작은 필지를 합쳐 도시형생활주택을 짓듯, 도시 에서 토지를 이용하는 단위, 즉 건축물의 대지는 대체로 계속 커지고 있다. 경제 발전으로 점점 더 큰 규모의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작은 땅을 불리하게 만드는 여러 제도가 작용한 탓(각주 5)도 있다. 그러나 소유권 하나의 토지 면적은 심각하게 작아지고 있다. 커진 대지에 들어서는 건물 다수가 소유권이 여럿으로 나뉜 ‘집합 소유’ 이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한 도시형생활주택의 경우도 두 세 채의 단독주택 필지를 합쳐 하나의 도시형생활주택 대지를 이루지만, 통상 도시형생활주택 한 동에는 적어도 십여 세대, 많게는 수십 세대 가 있고 모두 개별적인 소유권이 있다. 실제 서울 시 강서구 화곡동을 대상으로 수행한 연구에서 315채의 단독주택이 적어도 3,465세대의 도시 형생활주택으로 개발됐고, 그로 인해 소유권 하 나당 평균 토지 지분은 191.7m2에서 19.5m2로 극단적인 감소를 보였다. 집합 소유 공간에서 개별 소유권의 사용·수익·처분의 독립성은 세대 내 공간에 한정된 것이 다. 부수고 짓고 용도와 외관을 바꾸는 도시 공간의 내에서의 변화는 개별 소유 단위가 아닌 집합 소유 단위로 일어난 다. 그렇다면 30년 후 도시형생활주택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기껏해야 300~400㎡에 불과한 대지에 수십 세대, 거기에 임차인까지 수많은 이해 관계가 얽혀 그 공간의 변화를 꾀하기란 너무나 어려울 것이다. 다양한 크기의 필지와 골목길이 사라져 슈퍼 블록화되고 건축물의 크기가 커 지는 것만큼, 도시 공간의 소유 구조가 집합으로 바뀌는 것 또한 미래의 공간 수요를 수용할 유연성과 민첩성에 큰 위협이 될 것이다. 소유 밖의 공간은 가능한가 이번 글에서는 소유가 우리 도시 공간에서 얼마나 공간적으로나 사회적 으로 견고하게 작동하는 전제 조건인지 살펴봤다. 우리 사회의 모든 제 도가 점점 더 촘촘해지고 있고 소유의 구획 밖에 남겨지는 공간은 사실 상 없어지고 있다. 그리고 개발 규모가 커질수록 일상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언제든 닫혀버릴 수 있는 사적 소유의 공공 공간(privately owned public space)이라는 모순적인 설명이 붙는 공간들이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겨울밤 출출한 퇴근길의 포장마차나 광장에 설치된 소외된 자들의 절박한 외침이 그저 느슨한 시절의 낭만일 뿐, 소유권이 없이도 점유할 수 있는 공간이 더 이상은 필요치 않게 된 것인가. 결국 현재 소유가 독점하는 배타적 권리의 선은 사회적 합의의 결과로 인정해야 하지만, 그래도 항상 질문은 필요하다. **각주 정리 각주 1. ‘대한민국 헌법’ 제23조 1항 “모든 국민의 재산권을 보장된다. 그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 정한다.” 2항 “재산권의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하여야 한다.” 3항 “공공필요에 의한 재산권의 수용ㆍ사용 또는 제한 및 그에 대한 보상은 법률로써 하되, 정당한 보상을 지급하여야 한다.” 각주 2. 토지구획정리사업과 택지개발사업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다 음 연구를 참고. 박배균, “Where Do Tigers Sleep at Night? The State's Role in Housing Policy in South Korea and Singapore”, Economic Geography 74, 1998, pp.272~288; 권영덕·이보경, 『서울, 거대도시로 성장하다』, 서울연구원, 2020. 각주 3. 소유권을 완전히 가져오는 수용이 아니라도 어떤 사용·수익·처분 에 대한 제한에는 수용과 마찬가지로 보상이 따른다. 보상이 따라 야 하는 제한과 그렇지 않은 제한의 구분은 당연히 근대적 재산권 개념과 도시계획의 정당성 정립에서 첨예한 논쟁과 갈등, 수많은 사례가 축적된 중요한 이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고. 김지 엽, 『도시를 만드는 법』,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22. 각주 4. 당시 일본에서는 영세 자영농의 반대로 토지구획정리사업의 실 행이 제한적이었다. 일제강점기 한국에서 대규모로 시행된 건 역 설적으로 조선 자영농이 일본 지주의 소작농으로 전락했기 때문 이다. A. Sorensen, “Land Readjustment and Metropolitan Growth: an Examination of Suburban Land Development and Urban Sprawl in the Tokyo Metropolitan Area”, Progress in Planning 53, pp.217~330, 2000. 각주 5. 『환경과조경』 2023년 5월호, “제도, 크기를 정하다” 참고. 유영수는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로재와기오헌에서 건축 실무를 경험했다.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도시 디자인과 사회과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며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병행했다. 현재는 인천대학교 도시건축학부에서 법, 제도, 현대 도시설계 이론, 스튜디오를 가르치고 있다. 건축과 도시를 아우르는 스케일에서 개별적인 공간 현상과 법제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고, 계획과 디자인의 역할을 확장하기 위한 이론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 [어떤 디자인 오피스] 라이브스케이프
    플래시백 우연히 한 사진을 본다. 한 무리의 바위들 사이에서 나오는 물안개가 땅과 바위를 적시고 있다. 사람들은 바위에 걸터앉거나 기대어 눕기도 한다. 젖고 싶으면 더 들어가면 된다. 사람과 자연이 경계 없이 함께 비벼져 있는 풍경. 살아있는 자연의 현상과 그에 반응하는 사람의 어우러짐이었다. 피터 워커(Peter Walker)의 테너 파운틴(Tanner Fountain)이다. 건축하는 사람들이 수공간을 디자인하면 십중팔구는 수조의 윤곽을 그리며 시작한다. 이렇게 되면 그것이 곡선이냐, 직선이냐가 중요해진다. 그러나 이곳은 물의 소리, 습기와 같이 살아있는 것이 주인공이다. 2002년 월드컵 응원의 열기가 뜨거운 여름, 미국에 도착해 조경을 공부하고 실무를 경험했다. 2008년, 예전에 다녔던 건축사사무소 대표의 요청으로 귀국해 조경 디자인 부서를 맡았다. 자연은 살아있다 원 없이 많은 프로젝트를 하던 시절에도 테너 파운틴이 줄곧 떠올랐다. 이따금 살아있는 자연의 성질을 이용한 디자인을 시도했고 몇 개의 설계공모에서 당선됐지만 현실화하지는 못했다. 다만 ‘자연은 살아있다’는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었다. 작은 틈에도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오랫동안 품은 마음이 있었기에 회사의 이름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2012년 여름 라이브스케이프를 열었다. 명쾌하고 생생하게 설계의 설은 혀 설舌이라는 설이 있다. 말이 앞선다는 뜻이다. 사실은 다른 사람들이 느끼게 하는 게 중요할 뿐 디자이너 본인이 먼저 느끼게 되면 안 된다. 명쾌하고 생생한 것을 추구한다. 첫 작업인 복실이를 만들 때부터 그랬다. 러버콘을 뒤집어 연결해 보니 우연히도 커다란 스피커 같은 모양이었다. ‘소리를 형상화 했어요’라고 말할 것 같았고, ‘정말 소리를 내는 장치로 만들어 버리자’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권병준(사운드 아티스트)과 함께 광화문 앞에 복실이 1호를 만들어 냈다. 이듬해 2014 캐나다 국제 가든 페스티벌에 초청된 복실이 2호에서는 아예 어쿠스틱 악기를 만들었다. 흙으로 작은 동산을 만들고 러버콘을 뒤집어 그 위에 심었다. 개중의 몇 개는 절반을 자른 후 북 판과 기다란 쇠 스프링을 붙였다. 조금씩 흔들리면서 생기는 진동이 쇠 스프링을 흔들고 그것은 다시 북 판을 진동하게 해 러버콘의 몸체를 울림통으로 사용하여 증폭된다. 사람이 앉거나 만지면 우우웅 하는 큰 바람 소리가 난다. 설명이 아닌 와우 설명보단 이해, 이해보다는 감탄을 원하며 콘셉트가 무엇이건 그것을 명료하게 하는 것에 관심을 둔다. 가령 한 프로젝트에서 클라이언트가 중정에 멋있는 나무 하나를 심어 달라고 했다. 그렇게 해도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고 할 수 있겠지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자연에서 좋았던 순간을 떠올리도록 하고 싶다. 산속에서 땀 흘린 뒤 마시는 한 모금의 상쾌함. 이 경험을 가져오고 싶었다. 산이라면 발바닥의 감각이 다를 것이다. 최대한 넓고 큰 돌을 바닥에 깔고, 사람이 다녀야 하는 곳은 작은 돌들을 채워 넣고 그렇지 않은 곳은 풀로 채웠다. 이런 풍경이 내외부를 오가며 관통한다. 발은 분명 산에 있는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자연과 사람이 한자리에 비벼진 풍경이다. 사무실 개소 후 초반부터 스스로 작아도 공사에 직접 관여가 가능한 현장을 만들고자 했다. 오랫동안 그림에 익숙해진 디자이너에게 현장의 피드백은 큰 도움이 된다. 한 프로젝트에서 건축주가 숲을 옮겨 온 것처럼 느껴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건축주의 바람으로 만든 작은 정원에 최대한 거친 자연의 모습을 담고자 했다. 주차장조차 평소에는 정원이 되도록 하고, 담장을 따라 설계된 트렌치를 레인 가든으로 변경해 건물과 자연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게 했다. 소재와 설계를 매칭하는 작업 역시도 큰 매력이다. 알펜시아의 레지던스를 위한 작업에서는 데크를 벌려 그 사이로 그라스를 식재했다. 골프장의 넓은 경관이 거실 바로 앞까지 닿아있는 듯한 풍경을 완성했다. ‘조’성한 ‘경’치였다. 과연 이게 다일까. 계속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 장르를 넘나들며 미디어 아티스트와 함께 실험적 악기를 만들며 그들의 작업과 기술들을 접했다. 비슷한 시점에 공간 기획사와 많은 일을 했다. 자연은 여러 분야와 소통하기 좋은 소재다. 공급자로서만 생각하던 습관을 수요자의 관점으로 의식적으로 넓힐 수 있었다. 자연을 주제로 하되 다양한 장르를 연합하는 우리의 정체성은 이즈음부터 만들어졌다. 기획, 디자인 그리고 운영으로 이어지는 선형적 프로세스에서 하나의 전문 분야보다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전체적인 관점에서 프로젝트를 이끈다. 몇 년 전부터 건축, 인테리어, 조경, 사이니지를 아우르는 디렉터의 포지션에서 수행하는 프로젝트가 생겨나고 있다. 융합을 통한 전체적인 접근을 도모하지만 그 중심은 언제나 자연인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이니스프리 정밀 텃밭 이니스프리의 뉴욕 플래그십 공간 조성에 참여한 인연으로 아모레퍼시픽 사옥 2층 주스 매장의 작은 공간을 만들게 됐다. 디자인보다는 시스템 개발에 가까웠다. 착즙 주스를 파는 곳이다 보니 원재료가 자라는 모습을 전시하는 작은 텃밭을 만들고자 했다. 텃밭상자 위에 얇은 두께의 선반을 두고, 그 내부에 LED, 환기 팬, 관수 장치를 설치했다. 일반적인 스마트팜처럼 식물의 뿌리 쪽에서 수분을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비가 내리듯 30분에 한 번씩 작은 물방울을 후드득 떨어뜨리고 싶었다. 물방울은 식물 성장 LED의 조명을 받아 반짝이며 이따금 수십 개의 작은 팬이 환기를 위해 바람이 분다.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은 바람에 흔들리고 비를 맞는 야외를 보고 간다. 새로운 영역으로 한 걸음 내딛는 기회였고, 이를 발판으로 바이오필릭 공간 디자인 프로젝트들이 연결되며 성장할 수 있었다. 낮에는 꽃집 밤에는 현상설계 직접 작은 공간을 운영하면서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어 연남동에 작은 꽃집을 열었다. 꽃집의 정체는 마당 한편의 작은 텃밭에서 키운 작물로 마치 넷플릭스 시리즈 ‘셰프의 테이블’에 나올법한 아우라의 샤브샤브 채소 모듬 같은 꽃다발을 만들어 파는 집이었다. 이름은 초식草式이라 지었다. 풀의 방법이란 뜻이다. 대박은커녕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디자이너와 운영자는 처절하게 다른 것이다. 그 대신 나의 디자인은 그리는 디자인에서 공감하는 디자인으로 변화하게 된다. 당시 참여했던 잠실종합운동장 주경기장 리모델링 국제지명초청 설계공모에서 내외부를 자연으로 특화하는 해법으로 수많은 산책로를 만들고 자연을 걷는 경험이 경기장 내부까지 계속 이어지게 계획했다. 더 낮게, 더 가까이, 더 천천히란 문장이 떠올랐다. 치열한 경쟁을 이제는 내려놓자는 의미였다. 용 한 마리가 힘 있게 배치도를 가로지르는 선을 뽑아내는 것이 아니어도 된다는 자신감은 흙에 손을 담그고 자연을 즐기며 지내본 시간이 바탕이 된 믿음이다. 공공 디자인 영역에서 서울시 디자인 정책과와 함께 공공 디자인 프로젝트 ‘마음풀(Maumpool)’을 진행했다. 취학 연령 인구들이 감소하면서 교실은 남아돈다. 아이들의 게임, 핸드폰 중독은 사회 문제로 발전한다. 유휴 교실을 활용해 다양한 감각으로 자연을 경험하는 콘텐츠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원예 활동을 염두에 두고 실제로 학교 상담 프로그램인 위클래스(Wee class)와 대학생들을 연결하는 운영위원회도 구성했다. 함께 용역을 수행한 커뮤니티 디자인 전문회사 마이너스플러스백(Miners+100)에서 참여형 워크숍을 주도했고 그 내용을 디자인에 반영하고자 했다. 안 쓰는 교실에 자연을 담는 것. 취지는 좋은데 궁금했다. 이렇게 하면 정말 힐링은 되는걸까. 워크숍 설문 조사를 보면 아이들의 반응은 ‘매우 강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로 드러난다. 이용자 중심의 디자인을 취지로 하지만 사실 이용자는 그조차도 싫어한다. 작은 교실, 작은 책상에서 종일 버티고 있어야 하니 그럴 만도 하다. 학교의 억압적인 공간의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크리스티안 미쿤다(Christian Mikunda)가 주장하는 제3의 공간 이론처럼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무목적의 공간을 떠올렸다. 되도록 편하고 자연스럽게 자연을 경험하도록 했다. 운동장의 수돗가를 모티브로 한 대형 싱크대를 배치했다. 한쪽에는 물이 조금씩 떨어지는 고장난 수도를 만들었다. 물이 천천히 흘러가면서 수조에 머물면 모판의 흙이 젖고 상자의 온실 효과로 학기 초에 아이들과 함께 만든 씨드페이퍼에서 떼어낸 씨앗들이 발아한다. 자라면 창턱과 숲에 옮겨 심을 수 있다. 숲에는 직선으로 나가는 초음파에 음원을 태우는 초지향성 스피커라는 것을 설치했다. 새소리, 물소리 등 각각의 채널을 하나의 믹서에서 조절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 연결했다. 각도와 출력을 조정해 공간 안에서 초음파를 반사되게 하면 마치 새가 주위에서 지저귀는 듯하다. 이니스프리 프로젝트에서 활용한 빗물 관수 장치를 이번엔 교실 천장에 설치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빗소리를 들으며 우두커니 앉아 있거나, 사이를 걸으며 함께 다양한 자연의 현상과 감각을 즐길 수 있다. 마음풀은 이후에도 서울시와 5년 동안 5개의 공간을 만들며 지속 사업으로 고도화 돼 갔다. iF 디자인 어워드에서 상을 받았으며 디자인 서울 비전 2.0의 추진 과제 중 하나로 선정됐다. 사람의 정원, 자연의 정원 IFLA 한국 유치를 기념하는 정원이었다. 손 닿지 않는 자연의 세계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작은 생명들, 그리고 이를 생각하는 사람에 대한 작업이었다. 지금의 시대, 땅과 자연을 생각하는 청지기로서의 해야 할 일을 정리해 봤다. 우리의 일은 살아있는 것들의 세계를 펼치는 일이다. 울타리 안에서 관조적 공간을 조성하는 것이 아닌, 울타리를 넘어 생명 창조의 가능성을 담고자 했다. 살아있는 모든 세계의 일원으로서, 지금 우리 시대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러한 가능성을 확장하는 일이다. 추상적인 ‘관념’을 실체적 ‘형상’으로 땅 위에 세우는 일은 디자이너의 본령이다. 대상지 안에 그릴 수 있는 가장 큰 원을 그렸다. 원의 안쪽은 자연의 정원이며 사람은 들어가지 못한다. 바깥은 사람의 정원으로 설정했다. 울타리는 바위로 하고 둘레를 따라 안개를 뿜는 링을 만들었다.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는 울타리 너머는 그들이 주인이다. 우리가 숲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자연의 친구들이 주인이 되어 스스로 살아가는 수많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래되어 쓰러진 나무에서 피어나는 버섯, 숨어서 조용히 자라고 있는 우산이끼들, 애벌레가 겨울을 버티고 나온 자국 속에서 싹트는 작은 식물들, 사람의 접근이 제한된 상태에서 자연이 그들의 시간 속에서 깊어간다. 자연의 정원은 지형이 복잡하다. 오랫동안 그늘을 드리우는 곳, 물이 천천히 빠지는 습지, 종일 따스한 햇볕을 받는 곳도 있다.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다양한 환경을 만들었다. 안개구유라고 이름을 붙인 원형의 링을 경계에 두고 사람의 정원 한 편에는 유목을 식재했다. 번식을 위해 강제 가지치기를 당했던 나무와 작은 풀들에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가면 안개구유가 작동하여 자연의 정원을 적신다. 안개를 자주 맞는 쓰러진 고목에는 어디선가 날아온 목이버섯이 자리를 잡는다. 작은 먹이를 찾는 벌레들이 나타날지 모른다. 자연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손닿지 못하는 자연을 깊어지게 한다. 오래 전 달 표면의 ‘고요의 바다’라는 곳에 달 착륙선이 내려갈 때 사람들이 느꼈던,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감을 상상했었다. 우리가 만든 이 작은 세상도 지구인에게 중계되면 좋겠다. 동시에 평소에 관심을 두며 좋아했던 아티스트의 작업이 떠오른다. 즐겨보던 NASA의 유튜브도, 순식간의 일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 생각의 서랍들을 모으고 정리하며 이야기를 더하는 것을 좋아한다. 조성한 후 시간이 꽤 지난 시점, 실제로 온갖 생물들이 들어오고 있다. 어느새 알에서 나온 아기청개구리. 번식기를 맞아 수초 사이를 오가는 왕잠자리. 작은 벌들과 초대하지 않은 물피. 강아지풀도 자리 잡고 있다. 우리가 심은 여러 풀에 꽂혀 새롭게 호박벌. 사향제비나비도 가족이 되어가는 것 같다고 한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있는 DMZ처럼 우리의 한가운데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지는 자연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디자이너가 자라는 곳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어떤 방법이 있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좋은 방법은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다. 디자이너로 하루씩 살다 보면 어느새 디자이너가 되어있을 것이다. 회사는 그렇게 디자이너가 자라는 곳이다. 우리의 일이란 게 자기 안의 우물을 길어 올리는 것이다. 인사이트는 누가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내면의 관점이기에 인사이트다. 스스로 질문하고 대답을 찾는 것, 내 우물이 인사이트 가득한 초정리 암반수로 채워지게 하는 걸 지속하면 어느새 취미가 성과가 된다. 자신만의 인사이트로 채워진 우물을 젊은 시절부터 만들기 바라며 라이브 사이트라는 답사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좋은 곳을 다니며 사진을 보아선 알 수 없는, 직접 머물러 야만 알아챌 수 있는 맥락을 발견하길 바란다. 핀터레스트에서 수백 장의 사진을 모아 놓아도 그것들을 꿰뚫는 이야기를 세우는 것이 중요한 시대이므로. 디자인할 때는 빨리 날리듯 그려내면서 손과 머리가 함께 주거니받거니 찾아가는 과정을 중요시하기에 회의에서는 재미있는 날것의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인절미를 얹는데 대신 어깨가 나란히 되도록 이빨을 맞추고…” 같은, 형태와 함께 이해되는 느낌적 느낌의 문장들이다. 디자인 과정에서 민주적이지 못하는 경우는 어쩔 수 없다. 정보와 경험의 무게가 기울어져 있기에, 그러나 도대체 며느리도 모른다는 디자이너의 블랙박스의 내부, 찰나의 순간에 벌어지는 일들을 날것 그대로 구성원들과 함께 공유하는 것을 중요시 한다. 라이브스케이프는 12년이 됐다. 바이오필릭 공간 기획, 조경설계, 건축설계, 공공 디자인, 서비스 디자인, 인테리어 디자인 및 시공을 한다. 디자인연구소 OZLAB에서는 자연을 경험하는 무선 리모컨을 만든다. 많은 영역에 관심을 두며 일하지만 중심은 여전하다. 자연이다. “살아있는 것을 디자인합니다.” 그저 표현을 위한 수사가 아니다. 디자이너로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다.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우리는 어떤 길로 들어가고 있다. 라이브스케이프(LIVESCAPE)는 건축과 조경을 기반으로 한 융합 디자인을 추구한다. 아이디어 기획부터 손에 만져지는 실체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아우르며 작은 실내 정원부터 대규모 마스터플랜까지 다양한 스케일에서 환경과 예술이 결합하는 창의적 지점을 다룬다. 오랜 기간 축적한 전문성과 인접 분야와의 협업을 통해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자연을 담은 공간을 통해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고자 한다.
  • [밀레니얼의 도시공원 이야기] 새로운 도시의 정체성을 찾아
    지겹고 신비로운 아이콘, 옴스테드 ‘밀레니얼의 도시공원 이야기’라는 제목이 무색할 정도로 3개월째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 이야기 만 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털어놓지 못한 내용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그의 개인사부터 성장 과정, 공원과 도시에 대한 글까지 옴스테드의 열정은 논문 수 편이 나올 정도로 복잡하고 흥미롭다. 무엇보다 이 흥미로움을 돋우는 건 21세기―요즘 많이 쓰는 말로는 인류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19세기 중반을 살았던 사람의 견해와 사고방식, 인생의 목적과 정체성이 신기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칸트 미학의 용어를 적용하자면, 옴스테드의 삶과 정신이 우리의 일상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기에 무관심성(disinterestedness)이라는 미적 대상의 조건을 충족한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에피소드 1. 정체성 감사하게도 지난 몇 년간 ‘외국어를 얼추 잘하는 박사과정’으로 해외 조경가나 설계가의 통역을 맡거나 해외 학술대회 발표를 통해 중간자의 위치에서 한국을 조망할 기회가 종종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있다. 용산공원을 비롯한 이전 적지에 관한 구두 발표 후에 웬일로 질문이 나왔다. “공원 설계안을 설명하면서 정체성 이야기를 왜 그렇게 많이 하는 건가요?” “공원의 정체성이 굉장히 첨예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대체 왜죠?” “지금 전부 설명해 드리긴 힘들 것 같은데요. 세션 끝나고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19세기 말 시작된 한국의 식민지 역사와 그 이후 냉전과 한국 전쟁을 겪으며 생겨난 현대 한국인의 국가관과 사회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이 자 리에서 대답하려면 그냥 논문을 하나 새로 쓰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니, 아예 박사학위를 하나 더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한영사전에 입력하면 identity라고 바로 나오는 정체성. 우리가 오픈스페이스를 설계하고 설명하며 쉽게 쓰고 있는 ‘공간 정체성’은 직역하면 spatial identity가 되는데, 이처럼 모호한 단어가 또 없다(자연이나 본질로 번역되는 nature, 경관부터 현황까지 모조리 아우르는 landscape 수준의 모호함이다). 다시 말해, 우리 안에서는 충분히 설명되므로 굳이 그 의미를 따지지 않고 외부에서 사용할 때는 어디서부터 그 의미를 설명할지 머리 아픈 단어란 거다. 우리는 왜 도시에서, 공간에서 정체성을 논하게 되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가 의견을 제시해왔다. 하지만 개인의 힘으로 좌지우지되지 않는, 그 자체로 유기적 생명력을 지닌 도시를 삶과 일상으로 삼은 사람들에게 그 정체성을 찾는 여정이 자아실현의 차원에서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환경과조경431호(2024년 3월호)수록본 일부 *그림 출처 그림 2. Detroit Publishing Company 컬렉션, 미국 국회도서관 신명진은 뉴욕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뒤 서울대학교 대학원 생태조경학과와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친 문어발 도시 연구자다. 현재 예술, 경험, 진정성 등 손에 잡히지 않는 도시의 차원에 관심을 두고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도시경관 매거진 『ULC』의 편집진이기도 하며, 종종 갤러리와 미술관을 오가며 온갖 세상만사에 관심을 두고 있다. @jin.everywhere
  • 차이와 모순 ‘제6회 젊은 조경가 김영민’ 토크쇼
    지난 2월 1일, 그룹한 갤러리에서 제6회 젊은 조경가 김영민 교수(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의 토크쇼 ‘차이와 모순’이 개최됐다. 토크쇼는 유튜브 생중계와 더불어 청중과 함께한 오프라인으로 진행됐고, 1부 강연, 2부 Q&A 순으로 이뤄졌다. 토크쇼 제목에 얽힌 이야기로 강연을 시작했다.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2004) 제목을 오마주해 ‘차이와 모순’으로 정했다. 한 상점은 어떤 창이라도 뚫을 수 없는 방패를, 맞은편 상점은 어떤 방패든 뚫을 수 있는 창을 판매하는데, 그 창으로 방패를 뚫어보는 실험을 해보는 이야기를 들으며 이질적인 상황에 양립할 수 있는 설계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강연에서 설계를 하면서 마주쳤던 ‘모순’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며 그의 다양한 프로젝트와 설계 철학, 설계 방법론에 대해 설명했다. 김영민은 SWA Group에서 6년간 다양한 조경설계와 프로젝트를 수행해왔다. 그는 SWG Group 근무 당시 참여한 ‘용산공원 설계 국제공모’를 개념을 가지고 설계한 첫 작품으로 뽑았다. “서울 안의 미국이란 특징을 가진 용산 기지에 대한 설계를 ‘강도强度’라는 개념을 통해 풀어나갔다. 생태적 강도와 도시적 강도로 나눠 대상지를 바라보면서 기존 공간 구획 방법을 탈피할 수 있었다”며 개념 성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환경과조경431호(2024년 3월호)수록본 일부
  • [기웃거리는 편집자] 환대, 위로 그리고 무목적의 시간
    한창 스타크래프트가 선풍적 인기를 끌던 시절, 내 또래 친구들은 학원과 PC방을 오가며 교과서 속 이순신보다 프로게이머 임요환을 숭상했다. 나도 그 대열에 잠시 합류했으나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게임엔 소질이나 흥미가 없었고, 학원 수업도 재미없어서 꾸벅꾸벅 졸기 바빴다. 다만 틈날 때 산이나 들판, 개천을 누비며 꽃과 나무를 보는 건 좋아했다. 꽃과 나무에 흥미 이상의 꿈과 실행력을 가졌다면 아마 지금쯤 어떤 디자인 오피스 원고 한 귀퉁이를 쓰고 있는 조경가가 됐을지도. 꽃과 나무에 흥미를 갖게 된 건 주변 환경의 영향이 컸다. 새벽에 나가서, 저녁에 들어오는 고된 하루 속에서도 엄마는 틈날 때마다 집 앞 화단을 열심히 꾸려나갔다. 우리집 밥상에 늘 오르내리던 깻잎과 청양고추, 호박 등 식재료부터 봉선화, 라일락, 맨드라미, 코스모스 등까지 다양한 꽃과 식물이 화단을 채웠다. 특히 봄의 화단이 좋았다. 집 앞에 아름답게 흩날리는 아카시아 꽃비를 맞으며 들어온 적막한 집에 퍼지고 있는 라일락 향은 친절한 식당 종업원이 ‘어서 오세요’라고 활기차게 인사하는 것처럼 나를 반겼다. 라일락 덕분에 ‘환대’의 의미를 어렴풋이 배웠다. 꽃이 환대를 알려줬다면, 나무는 위로를 알려줬다. 당시 우리 학교에는 개교부터 함께해 온 약 백년 가까운 수령의 느티나무 몇 그루가 심긴 쉼터가 있었다. 그 쉼터는 학교와 도로 사이의 단차가 있는 공간에 놓인 일종의 완충 녹지였다. 삐그덕거리는 철문을 열고, 계단을 저벅저벅 내려가 회양목 울타리가 둘러싸인 쉼터에 가면 울창한 느티나무 숲이 그늘을 내주고 있었다. 바둑돌처럼 군데군데 놓인 돌 벤치에 누워서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가지와 초록으로 뒤덮인 온 세상을 더 청량하게 만드는 시원한 바람과 누구라도 한없이 품어줄 것 같은 큰 그늘 안에서 불안, 걱정, 시름은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사라졌다. 위로는 말로 전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느티나무를 통해 ‘말 없는 위로’가 무엇인지 알게 됐다. 나의 삶에 작은 영향을 미쳤던 꽃과 나무를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새로운 역사를 만든 사람도 있는데, 바로 조선시대 화가 강희안이다. 그는 시와 그림에 능하고 재상의 재목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명예와 부에는 관심이 없었고, 소박한 삶을 지향했다. 출근 시간이나 부모님의 안부를 묻는 때를 제외하면 꽃과 나무를 키우는 일로 시간을 대부분 보냈다. 그는 매화가 피면 그 옆에서 시를 짓고, 국화가 피면 술을 마시고, 가을엔 수레를 타고 단풍 구경을 다녔다.(각주 1) 이렇게 꽃과 나무를 돌보다가 탄생한 것이 바로 한국 최초의 원예서적 『양화소록』이다. 『양화소록』은 그가 꽃과 나무를 기르면서 알게 된 특성과 재배법, 품종 등을 자세히 담아낸 일종의 개론서인 동시에 그의 삶과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식물의 천성과 본성을 다르게 하면 죽듯이, 인간도 자신의 본성과 천성에 맞게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또한 옮겨 심을 때 굵은 뿌리가 끊기면 쓰러지고 마는 노송에 빗대 옛법을 함부로 뜯어고치는 조변석개朝變夕改를 지적했다.(각주 2) 요새 그의 삶에서 영감을 얻어 분재를 키우고 있다. 곧게 뻗은 수형의 나무로 시작하려고 했는데 처음부터 관리가 어려운 걸 하면 쉽게 포기할 것 같아서, 아주 작은 풀 한 포기로 시작하고 있다. 물가에서 잘 자라는 석창포인데, 귀엽고 작아서 아주 매력적이다. 매일 아침 물을 주거나 노란 잎을 솎아내며, 그 작은 친구가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걸 지켜보며 나름의 보람과 재미를 느낀다. 특별히 무언가를 하려고 애쓰지 않은 채 그냥 좋아하는 걸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바라볼 수 있는 그 시간이 내게 참 소중하다. 유승종 소장의 표현(112쪽)을 빌리자면 무목적의 시간이라고 할까. 내 삶의 가까운 반경 안에 있는 분재를 다듬고 보살피듯 나의 일상과 마음을 살펴보면서 차곡차곡 무목적의 시간을 쌓아나가고 싶다. 그렇게 내게 환대와 위로를 전했던 꽃과 나무를 닮아가는 삶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각주 정리 1. 강희안, 이종무 역, 『양화소록』, 아키넷, 2012. 2. 조상인, “흐르는 물에 빠져든 선비...속세 벗고 삶의 순리 만끽하다”, 「서울경제」 2017년 9월 15일.
  • [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행동에 대한 촉구이자 장벽을 허물기 위한 초대이며 더 포용적인 미래를 위한 약속입니다
    기립성 저혈압이 있다면, 계단을 오르내리기 전 심호흡을 하기를 권한다. 사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니까. 출 근 중 잠깐 어지러워 몸을 휘청거렸을 뿐이었다. 발목이 밖으로 꺾이고 눈앞이 허옇게 번쩍였다. 고통도 잠깐 내가 선 곳은 잠시라도 멈추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지하철 환승 계단, 출근하는 직장인의 행렬 속이었다. 빠져나오는 것이 우선이었다. 벽에 붙어 자리에 쪼그려 앉았을 때야 잘못됐다는 걸 알았다. 발목이 내 주먹보다 더 크게 부어있었다. 재택근무. 누구나 한번쯤 달콤한 일상을 상상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출근 준비로 정신없을 시간에 여유롭게 스트레칭을 하고, 지옥철에 시달리는 대신 갓 내린 커피 향을 즐기며 내 방 책상에 앉는 나의 모습을. 인대 파열 수술을 마친 내겐 터무니없이 허황된 일이었다. 목발을 짚고 한가로운 생활? 물 한 모금 마시고 싶을 때도 가족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걷는 것도 벅찬데 손에 컵을 들고 움직일 수 있을리가!). 가장 간절했던 건 건식 화장실이었다. 깁스는 분말 석고를 묻혀 보관해 둔 붕대로 만든다. 따뜻한 물에 담가 보호해야 하는 부위 주변에 둘러 모양을 잡으면 그대로 빠르게 굳는다. 한번 굳으면 재사용할 수 없고, 물이 닿으면 곰팡이가 증식한다. 우리 집 화장실은 샤워 공간과 변기가 놓인 공간이 분리되지 않은 형태인 데다가 바닥에 보일러가 설치되어 있지 않다. 덕분에 온 가족이 시간 맞춰 씻으면, 엄마와 동생이 번갈아 가며 화장실 바닥의 물기를 닦았다.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모두가이동할지도는 기부 플랫폼 카카오같이 가치에서 진행하는 사업 중 하나로, 이동 약자를 위한 지도를 만드는 프로젝트다. …… 설계공모 지침과 설계 설명문에서 배리어 프리라는 단어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게 되었는데, 이 프로젝트에 참여해보며 내 일상 속 장소가 얼마나 이동 약자에게 친화적인지 확인해보고 싶었다.”(2023년 6월호 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지난해 늘어놓은 건방진 소리를 보니 쓴웃음이 났다. 그런데 더 주제넘게도 고작해야 목발을 2주 사용하는 내가, 행동반경이 집-병원이 전부인 내가, 이동 약자의 마음에 공감하고 있다는 거다. 내 걸음을 편하게 만들어줬던 시설들은 사실 나의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자동문, 엘리베이터와 닫힘 버튼이 작동하지 않는 시스템, 램프, 이음매 없이 매끈한 도로는 누군가의 삶을 위한 것이었다. ‘발목이 다 나을 때까지’라는 행복한 시한부를 가진 내가 아닌, 누군가의 평생을 위한 것들. 때때로 프로젝트 지면에서 유니버설 디자인, 배리어 프리 디자인을 했다는 문장들을 살릴지 말지 고민했다. 휠체어가 오를 수 있도록 길의 경사를 조정하고 모든 턱을 없앴다거나 엘리베이터를 통해 수직 동선을 마련했다는 말이, 벽면을 녹화해 건물의 친환경성을 높였다는 말처럼 허무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도로를 새로 포장하게 된다면, 어떤 이유로 엘리베이터를 운영하지 못하게(또는 않게) 된다면, 모두 없던 것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대부분의 디자인이 앞선 내용에 그친다는 점도 한몫했다. 막 만들어졌을 때만 유효함을 보장하는, 오로지 이동 약자만을 편리하게 하는 디자인, 딱 거기까지였다. 아쉬움에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우연히 배리어 프리 디자인 설계공모가 열리는 걸 알게 됐다. 아르커즈(Arcause)가 주최하는 ‘유디타 그랜트 포 배리어 프리 디자인(UDita Grants for Barrier-free Design҆). 유니버설 디자인 개념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구현해 실질적으로 적용 가능한 배리어 프리 디자인을 발굴하려는 공모는 참여를 고민하는 이에게 말한다. 이 프로젝트는 “행동에 대한 촉구이자 장벽을 허물기 위한 초대이며 더 포용적인 미래를 위한 약속입니다.” 이어 지침서는 유치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반드시 해봐야 할 말들을 던진다. “휠체어 바퀴가 요철과 장애물을 만날 때마다 흔들린다고 상상해 보세요.” “눈을 감고 촉각과 청각에만 의존한다고 상상해 보세요.” “자폐증이 있는 사람에게 공원은 감각의 지뢰밭입니다.” “당신은 공감하고 있나요, 동정하고 있나요.” 작은 아이디어라도 수용하는 공모라 조경과 거리가 있을 수 있지만, 나처럼 그 결과가 궁금해진 사람을 위해 홈페이지 주소(ethosempowers.com/arcause/arcauseuditagrants2023)를 남긴다. 참고로 결과 발표 예정일은 2024년 8월!
  • [PRODUCT] 도시의 빗물을 머금은 지하형 빗물정원 ‘G-Hbox 침투저류모듈’을 활용한 물순환 회복
    언제부턴가 비는 무더위를 해소하는 반가운 존재가 아니라 일상을 위협하는 걱정거리로 인식되고 있다. 계절성, 국지성, 게릴라성 집중 호우에 꼼짝없이 당하는 여름을 보내는 횟수가 늘어나는 추세다. 불투수층으로 가득한 도시에 전에 없던 강우에 대비할 수 있는 기후 적응 공간이 필요한 시점이다. LID 기반의 조경 공간 특화를 통해 도시 물순환을 제고하는 한국그린인프라연구소는 도시에 맞춤형으로 적용할 수 있는 지하형 빗물정원을 선보이고 있다. 지하형 빗물정원은 건습지 형태의 기존 빗물 정원과 다르게 하부에 담수가 되는 저류 공간을 만들어 최소한의 면적에서 빗물 관리 효율성을 최대한 높일 수 있다. 도시 하부 특성을 고려해 제작된 ‘G-Hbox 침투저류모듈’로 유효한 공극을 확보해 면적 대비빗물 관리 용량을 최대로 높일 수 있다. 도로변 띠녹지와 가로수 주변 하부 공간은 훌륭한 지하형 빗물정원 조성지가 된다. 저류된 빗물이 상부 식생대에 저면 관수돼 생태적인 방식으로 재이용할 수 있다. 기존 도시 생태계를 구성하는 식생대와 유기적으로 상생할 수 있는 우수한 생태 공간을 조성한다. 식물을 통한 빗물의 증발산은 미기후 조절, 열섬 저감, 미세먼지 완화 등 쾌적하고 건강한 도시 환경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 지하형 빗물정원은 도시의 그린 네트워크를 건강하게 지속시키는 기술로서 빗물의 효과적인 발생원 관리, 분산형 관리를 가능하게 하고 이를 통한 블루 네트워크 형성의 초석이 되고 있다. TEL. 02-587-9444 WEB. www.greeninfra.co.kr
  • [에디토리얼] 마감 날 읽은 식물 책 세 권
    원래는 이달 특집에 참여한 조경가 필자들과 똑같이 ‘나의 식물에게’를 주제로 에디토리얼을 써볼 생각이었다. 공간을 만드는 조경가에게 식물은 어떤 존재일까. 그들에게 던진 이 질문에 조경계의 소문난 ‘식물맹’인 나도 한번 응답해보리라. 그러나 진심과 고심을 담아 눌러쓴 그들의 이야기를 밑줄 쳐가며 곱씹다 보니 마감이 눈앞이다. 예컨대 허대영 소장(조경설계 힘)의 이런 문장들. “식물은, 특히 나무는 살아갈 자리를 정한 설계자보다도 이 땅에 더 오래 살아남을 존재이기도 하다.” “조경설계는 식물의 삶과 죽음, 그리고 공감하는 사람의 마음까지 염두에 두어야 하며, 이렇게 아름다움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 조경 일의 속 깊은 본질”이다. 금요일 퇴근 시간, 마침내 김모아 기자의 메시지가 왔다. ‘월요일 오전까지 주시면 됩니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이런 뜻이다. ‘아무리 늦어도 월요일 아침에는 제가 꼭 볼 수 있게 보내주셔야 해요. 주말에 파이팅!’ 급하거나 불안해지면 책에 기대는 버릇이 발동한다. 책장 구석구석을 침착하게 뒤져 나름 정성껏 식물 책 세 권을 골라 주말을 보냈다. 먼저 펼친 책은 파란색 무광 표지가 매혹적인 고다 아야(幸田文)의 『나무』(달팽이출판, 2017). 말년의 노작가가 십 년 넘게 일본 열도의 북쪽 홋카이도에서 남쪽 야쿠시마까지 전국의 나무를 찾아다니며 체험하고 성찰한 기록을 엮은 유작이다. 첫 장 ‘가문비나무의 생사윤회’를 쓴 때는 1971년 1월이고, 마지막 장 ‘포플러’는 1984년 6월의 글이다. 우리는 나무의 무엇을 알고 있을까. 나무를 안다는 건 과연 무슨 의미일까. 저자는 쓰러져 죽은 가문비나무 위에 새로운 가문비나무가 자라나는 현장을 목격하며 “생사의 경계, 윤회의 무참함”을 사유한다. 도심 한복판에 홀로 선 거목을 보며 나무가 거쳐 온 삶의 순간들을 읽어낸다. 나무를 만나 살피고 듣고 느끼며 빚어낸 진솔한 문장들이 나무를 안다는 건 나무의 삶을 나무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임을 깨닫게 해준다. 따뜻한 책 『나무』에 이어 고른 『오산천 자연도감』(디자인 스튜디오 loci, 2022)은 온기뿐만 아니라 현장성과 생동감이 느껴지는 책이다. 아모레퍼시픽이 지원하고 박승진 소장의 디자인 스튜디오 loci가 진행한 프로젝트의 성과물인 이 책은, 경기도 오산천에 서식하는 식물 112종과 조류, 어류, 곤충류, 포유류 등 동물 31종을 섬세하게 조사하고 관찰해 정성스레 담아낸 도감이다. 책 앞부분에는 서해에서 배가 올라오던 옛 오산천이 오염으로 몸살을 앓게 된 사연, 그리고 생명을 품은 건강한 하천으로 거듭난 이야기도 담겨 있다. 본지에 ‘풍경 감각’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 조현진 일러스트레이터가 생태 조사와 해설 글, 식물과 동물 도감의 세밀화를 맡았다. 오산천의 숨겨진 가치를 쉽게 전달해주는 세 장의 그림 지도도 흥미로운데, ‘오산천 자연 탐사 지도’에는 천변을 산책하며 비인간 생명체들을 관찰할 수 있는 28개 지점이 꼼꼼히 표현되어 있다. ‘오산천 정원 지도’는 2015년부터 2021년까지 시민들이 참여해 조성한 120개 정원의 위치를 보여준다. 1년 넘는 식생 조사를 바탕으로 작성한 ‘오산천 식생 지도’는 버드나무류와 물억새 군락지를 비롯해 관심을 더 기울여야 할 식물들의 위치를 알려준다. 마지막 책은 조금 어렵다. ‘식물 존재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라는 부제를 단 『식물의 사유』(알렙, 2020)는 식물성에 대한 사유에 기반해 인간과 식물의 창조적 만남을 확장하는 시도를 펼친다. 32편의 서신 교환으로 구성한 이 책에서 루스 이리가레(Luce Irigary)와 마이클 마더(Michael Marder)는 ‘식물 존재’를 통해 자연과 문화, 물질과 정신, 감각성과 초월성, 주체와 타자, 여성과 남성, 비인간과 인간 등 서구 근대 정신을 지배해온 이분법과 동일성의 교의를 넘어서고자 한다. 그들은 왜 자연과 생명이 처한 위기 진단과 대안 모색의 중심에 식물을 위치시키는 것일까. 인간 중심주의가 지구 행성의 존속 가능성을 위협하는 생태계 위기의 원인이라는 반성이 일면서 동물과 동물권에 대한 관심이 동시대 담론의 뜨거운 주제로 떠올랐지만, 식물(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식물은 의지와 주체성을 지니지 못한 가장 미발달된 생명체이며 생산의 원자재나 바이오 연료 정도로 치부되어왔을 뿐, 인간이 그 일부를 이루는 생명의 토대로 이해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의 식물을 호명하지 못하고 식물 책들에 기대 지면을 채운 데 대한 변명 삼아, 마이클 마더가 전하는 나무 이야기 한 부분을 옮긴다. “한 그루 나무가 다양한 성장의 총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여럿으로 갈라지면서 얽히는 나무의 몸통, 가지를 덮고 있는 이끼와 담쟁이, 가지 위를 기어오르는 다람쥐, 가지 위에 집을 짓고 있는 새들, 뿌리와 뿌리 근처에 살고 있는 미생물 등등 하나의 성장의 공동체로서 나무는 식물적일 뿐 아니라 원소들과 식물 형태들과 종들이 만나는 장소이자 생물의 왕국입니다. 나무는 그 위아래에 살고 있는 모든 존재들과 함께, 또 그것이 살고 있는 장소와 함께 자기 자신을 우리의 시각과 사유에 건네줍니다. 또한 나무는 분류를 알지 못하는 자연의 낯선 영역으로 열린 창문이 될 수 있습니다”(『식물의 사유』, 231쪽). 그가 뉴욕의 좁고 누추한 아파트 뒷마당에서 만난 한 그루 나무는 “더불어 자라는 공동체의 표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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