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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먼스케이프] 빌헬미네 폰 바이로이트
    남매 이야기, ‘비할 바 없이 근심 없는 곳’ 나란히 세계문화유산을 남기고 간 남매가 있다. 누나 빌헬미네 폰 바이로이트(Wilhelmine von Bayreuth)(1709~1758) 공비는 독일 바이로이트에 산스파레유 기암괴석 풍경정원(Felsengarten Sanspareil)을, 동생 프리드리히 대왕은 포츠담에 상수시(Sanssouci) 궁전과 바로크 정원을 남겼다. 산스파레유는 ‘비할 바 없는 곳’이라는 뜻이고 상수시는 ‘근심 없는 곳’을 말한다. 근심이 너무 많았던 프리드리히 대왕은 자신의 여름 별궁과 정원의 이름을 그렇게 지어 불렀다.(각주 1) 누나 빌헬미네는 딸의 결혼식에 맞춰 산스파레유 정원을 완성하고 하객들에게 보여주었는데, 그들 중 어느 프랑스 귀부인이 “와, 비할 곳이 없네!”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 외침이 공식 명칭이 되었다. 마치 둘이 짜기라도 한듯 남매는 산스파레유와 상수시를 거의 동시에 조성했다. 흥미로운 점은 두 정원의 조성 개념 차이다. 빌헬미네는 시대를 앞질러 풍경정원의 개념을 적용했고, 프리드리히는 후기 바로크 양식으로 지었다. 모두 1744년에서 1745년 사이의 일인데, 이 시기는 바로크 정원의 권세가 사그라지고 풍경정원이 서서히 대두될 무렵이었다. 영국에선 이미 태동했지만 독일에는 수십 년 뒤에나 상륙하게 되는데, 빌헬미네가 홀로 훌쩍 앞질러 간 것은 기이한 일이다.(각주 2) 그러나 빌헬미네가 산스파레유 정원을 의도적으로 풍경정원으로 꾸미려 했다고 볼 수는 없다. 기존 지형 자체가 매우 독특했는데 그걸 그대로 이용하다 보니 풍경정원이 되어 버린 것이다. 드물게 석회암층에 나도밤나무 숲이 울창하게 자란 곳이었다. 폭 약 15m, 연장 약 700m의 골짜기 여기저기에 석회암, 정확히 말하자면 돌로마이트 암석이 녹아 형성된 기이한 바위와 동굴이 많았다. 빌헬미네의 말대로 “자연 자체가 건축가”였던 곳이다. 이곳에 산책로를 만들고 누각을 배치한 것이 전부였다. 수백만 년에 걸쳐 자연이 만들어놓은 기암괴석의 지형에 인간의 설계가 결합된 이 정원은 바이에른주 환경부가 지정한 가치 있는 지오톱(Geotop)이며 세계문화유산이다.(각주 3) 남매는 무척 사이가 좋아 죽는 날까지 소울 메이트로 서로 의지하며 지냈다. 둘의 험난한 성장 과정을 보면 공주나 왕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 같다. 아버지의 엄격한 군국주의적 통치와 궁정 생활의 억압 속에서 몹시 힘들게 자랐다. 남매의 아버지는 그 이름 높은 프로이센의 ‘군인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였다.(각주 4) 빌헬미네의 묘사에 따르면, “그는 비록 위대한 인물을 특징짓는 모든 자질을 갖추었으나 너무 다혈질이어서, 종종 격렬한 행동으로 치닫고 나중에 후회하곤” 했다.(각주 5) 군인왕은 변덕이 심해 너그럽다가도 불쑥 포악해졌는데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황태자 프리드리히를 때리고 발로 차기까지 했다. 훌륭한 군인으로 성장해 주기를 바랐던 황태자가 책만 읽고 음악과 예술에 심취해 있는 것이 못마땅해서 부자간 갈등이 심했다. 결국 견디다 못한 황태자가 도주하려다 발각된 사건이 유명하다. 그때 함께 도주하려 했던 절친한 친구는 결국 사형을 당했다. 법정에서 무기형을 받았으나 왕이 우격다짐으로 형을 바꾼 것이다. 빌헬미네도 동생의 도주 계획을 도왔다는 비난을 받고 일 년간 감금되었다. 남매는 그때 자기들도 죽는 줄 알았다고 한다.(각주 6) 모두 평생의 트라우마를 얻게 된 것인데 그 때문인지 둘 다 예술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 1740년 군인왕이 타계하자 왕위를 계승한 프리드리히는 곧 프로이센 궁중에 음악이 가득 울려 퍼지게 했다. 남매 모두 음악에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프리드리히의 플루트 연주와 빌헬미네의 하프시코드(피아노의 전신) 연주는 대가의 경지였다고 한다. 연주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둘 다 협주곡, 교향곡, 오페라 아리아 등을 작곡했는데, 그들이 작곡한 음악은 지금도 정기적으로 연주된다. 물론 프리 드리히가 플루트 솜씨 때문에 대왕이란 칭호를 얻은 것은 아니다. 희한하게도 그는 홀연히 전쟁의 화신이 되어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등 숱한 전장을 누비며 프로이센을 강대국으로 이끌게 된다. *환경과조경444호(2025년 4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프리드리히 대왕과 상수시에 관해서는 『고정희의 바로크 정원 이야기』(나무도시, 2008), 222쪽 “프리드리히 대왕과 상수시” 참조. 2. Adrian von Buttlar, Der Landschaftsgarten. Gartenkunst des Klassizismus und der Romantik. Erweiterte Neuausgabe, DuMont Buchverlag, 1989, pp.135~138. 3. 관련 내용은 다음을 참고. www.bayreuth-wilhelmine.de/deutsch/sanspar/felseng.htm 4. Friedrich Wilhelm 1세(1688~1740). 프로이센을 강대국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군사력을 길러야 한다고 믿고 강력한 군사 조직을 구축한 왕이어서 군인왕(Soldatenkonig)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독일 왕족 남자 이름은 프리드리히 아니면 빌헬름이어서 빌헬미네의 생애에 중요했던 세 남자인 아버지, 남동생, 남편 모두 우연찮게 프리드리히였기 때문에 잘 구분해야 한다. 아버지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남동생은 그냥 프리드리히, 남편은 프리드리히 3세였다. 5. 빌헬미네 회고록 29쪽. Wilhelmine Friederike Sophie, Wilhelmine von Bayreuth, eine preussische Konigstochter. Glanzund Elend am Hofe des Soldatenkonigs in den Memoiren der Markgrafin Wilhelmine von Bayreuth , Ingeborg Weber-Kellermann ed., Frankfurt am Main: Insel Verlag(Insel-Taschenbuch, 1280), 2016. 6. 빌헬미네 회고록 157쪽.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 『신의 정원, 나의 천국』, 『고정희의 바로크 정원 이야기』, 『고정희의 독일 정원 이야기』, 『100장면으로 읽는 조경의 역사』를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고정희
  • [어제의 대화, 오늘의 재구성] 안기수 대담하면서도 섬세하게
    사진 촬영과 인터뷰를 함께 진행하기 때문에 장소 섭외에 공을 들인다. 되도록 인터뷰이의 색채가 드러나는 곳을 택한다. 예컨대 업무 환경을 엿볼 수 있는 사무실. 인물 뒤편으로 책장을 빼곡하게 채운 책들, 흐트러져 있는 도면, 테이블 한쪽 커피 드립백 같은 것을 보면서 글에 담지 못한 인터뷰이의 성향과 취미 같은 것들이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안기수 소장과의 대화를 통해 인터뷰 장소는 두 곳으로 좁혀졌다. 사무실 또는 안기수 소장이 시공한 현장. 그는 긴 시간 고민한 끝에 경기도 포천의 카페 ‘포옥’(건축 설계: 에스엔건축사사무소 건축, 조경 설계: 랩디에이치, 조경 시공: 공간시공 에이원)에서 만나는 게 좋겠다고 말해왔다. 인터뷰 전날, 때 아닌 눈이 내렸다. 다행히 도로는 얼지 않았고 덕분에 눈 맞은 나무가 만든 풍경을 실컷 봤다. 온몸을 검정색으로 무장한 채 지프차에서 내린 안기수 소장에게서 조금 위압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큰 보폭으로 걸음을 옮긴 그는 먼저 카페의 중정을 살폈다. 자작나무 몇 그루가 죽었고 중정 가장자리를 덮고 있어야 할 이끼가 없다는 사실에 속상해했다. 건축주에게 다시 한번 정원은 만든 뒤 관리해나가는 게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러주어야겠다고 말했다. 성큼성큼 계단을 오른 그는 커피와 함께 먹을 디저트를 골랐다. 의도한지는 모르지만 맛과 식감이 모두 달랐다. 어쩌면 편견에 그를 가둬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지만, 자꾸 지인들이 그에 대해 해준 말들이 떠올랐다. 털털하고 호전적인 면이 있어서 투박할 것 같지만 상상 이상으로 섬세한 사람이라는 말. 어제는 뭐했나요? 보라매공원에 있었어요. 2025 서울국제정원박람회가 보라매공원에서 열리거든요. 정원 조성과 박람회 개최에 필요한 기반 작업을 하는 중이죠. 3월 28일에는 식목 행사가 진행될 예정이에요. 중간에는 성북동에 들러, 주택 정원 만드는 작업을 했습니다. 조경 시공은 외부 공간과 식물을 다루기에 겨울에는 어쩔 수 없이 휴식기를 가질 줄 알았어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계절과 상관없이 바쁘군요. 어떤 프로젝트를 하느냐에 따라 달라요. 관급 프로젝트는 겨울철 저온으로 인한 콘크리트 양생 불량, 식재 하자 발생 같은 문제가 발생하는 걸 막기 위해서 공사 중지 명령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아요. 동절기 시공 계획서, 보양계획을 세워 제출하면 공사할 수 있지만 겨울철 공사비가 더 높아서 꺼리는 경우가 많죠. 공공 기관에서 발주하는 프로젝트를 주로 하는 사무소는 겨울철에 쉬는 경우가 많을 겁니다. 공간시공 에이원(이하 에이원)의 일감은 민간 프로젝트 위주이기 때문에 사계절 내내 고루 고루 일하는 편입니다. 폭설이 내리면 2월에 보름 정도 쉬는 시간을 갖기도 하고요. 오래전부터 소장님이 시공의 대가라는 말을 들어왔어요. 어떤 분일지 궁금해 지인들에게 물었더니, 털털하고 거칠어 보이지만 예상 외로 섬세한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섬세하다는 말에는 동의합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감성적인 면도 있고요. 작년 연말에 가족과 함께 ‘소방관’ 영화를 보러 갔는데, 극장의 어둠에 숨어 몰래 울고 있는 절 발견한 딸내미가 아내에게 놀리듯이 “아빠 운다”며 속삭이더라고요. 현장에서 피어난 꽃이나 식물이 만들어내는 장면에 감탄할 때도 많은데, 그런 섬세함이 제 외형과 퍽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티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유청오: 주변에서는 다 알 것 같은데요.) 나름대로 자제했지만 다 티 났을지도 모르겠네요. 살아 있는 재료인 식물을 다루고 치밀한 디테일을 만들다보니 섬세함이 생긴 건지, 타고난 섬세함으로 조경 일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호전적이고 대범하다는 이야기를 더 많이 듣습니다. 현장에서 작업자들을 지휘하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며 프로젝트를 끌고 나가기 위해서는 대차게 밀어붙어야 할 때가 많거든요. ULC 6호 『조경 시공의 최전선』에 실린 인터뷰(“디자인의 관철”, 유엘씨 프레스, 2023)를 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조경으로 진로를 정하게 된 일화가 꾸밈없이 솔직하더라고요. 공익 광고에 나온 현장 속 건축가의 모습에 마음을 빼앗겼고, 건축과 토목에 대해 알아보다 조경에까지 시선이 닿았다고 했죠.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의 이미지에 끌린 것 같은데, 이유가 있나요. 자식들은 아버지의 등을 보고 자란다는 말이 있는데, 제 아버지가 건축 현장에서 일하던 분이었어요. 집에 돌아온 아버지가 암모니아 냄새가 나는 청도를 들여다보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해요. 아버지가 일하는 곳이니 자연스럽게 현장에도 자주 놀러갔어요. 아버지의 직장 동료 분들이 용돈을 주거나 맛있는 걸 사주시곤 했는데, 그들이 서로 힘을 모아 일하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어요. 그때부터 은연중에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식이 같은 일을 하겠다고 하면 반대하는 부모도 있잖아요. 조경 시공으로 진로를 정했을 때 아버지의 반응은 어땠나요. 좋아하셨어요. 그때만 해도 조경 시공이 나무 심는 일로 인식되는 때였는데, 오히려 내 전문성이 높다면 건물 외부 공간을 모두 다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저와 아버지 모두 현장에서 일하는 걸 부끄러워하거나 꺼리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을 노가다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제가 그 단어를 정말 좋아하지 않아요. 시공하는 사람의 전문성을 낮잡아 보는 느낌이 물씬 나거든요. 현장에서 작업하는 모두가 엔지니어이자 전문가라고 생각해요. 회사 직원에게도 농담으로라도 노가다라는 말을 못 쓰게 하고, 예술가라는 마음으로 일하라고 말하곤 합니다. 인터뷰 질문지를 쓰는데 시공가라는 단어가 참 어색하게 느껴졌어요. 본인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때 무엇이라 지칭하나요. 보통 조경가라고 하면 설계를 하거나 디자인 빌드 프로젝트를 하는 사람을 떠올리는데, 시공하는 사람 역시 조경가라고 말하면 되지 않나 싶어요. 한때 제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김지환 소장(조경작업장 라디오)이 절 빌드 디자이너라고 칭하더라고요. 엔지니어 등 다른 이름도 생각해봤는데, 결국 빌더가 제일 어울리는 표현이라는 결론에 다다랐어요. 전문적으로 만드는 사람. 시공가라는 단어 자체가 낯설어서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대상이 보여져야만, 그 대상을 어떻게 부를지 고민할 수 있잖아요. 현재 한국에서 조경 시공하는 사람이 크게 부각되거나 조명 받는 상황이 아니니, 그들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도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을 수밖에요. 말주변이 부족하다거나 주목 받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시공 전문가들이 자신의 모습을 좀 드러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용기를 낸 시공가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면 더욱 좋고요. 어떤 방식이든 한번 붐이 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대학 생활 중 실습에 굉장히 큰 흥미를 느낀 것 같아요. 당시 상지영서대학교 조경학과의 학과장이었던 김승현 교수님이 교내에 실습장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주도했었어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마 실습장 조성이 연구과제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교내에서 쓰지 않은 땅을 찾아 학생들이 직접 돌을 캐서 땅을 고르고 묘목을 심었죠. 선배 중에 현장에서 일을 하다 뒤늦게 학업에 뜻을 갖고 학교를 다니고 있던 형이 많았어요. 형들에게 목도 작업부터 시작해서 로프를 감는 법, 전지하는 법을 배웠죠. 전지를 잘못해서 멀쩡한 나무를 작대기처럼 만들어 혼난 적도 있는데 그마저도 즐거웠어요. 좋은 비료가 없어 작업을 끝마치고 나면 온몸에서 비료 냄새가 났는데, 다른 과 학생들이 지나가면서 인상 쓰면 좀 부끄럽기도 했어요. 하지만 열심히 만든 결과로 교수님에게 인정받아 뿌듯한 마음이 더 컸죠. 학교마다 중요시하는 전공과목과 커리큘럼이 다 다르죠. 저는 대학 시절 시공을 이론으로만 접했어요. 무엇이든 배우지 않으면 흥미를 가지기도 어렵죠. 맞아요. 학교마다 지향하는 바가 다르겠지만 원하는 학생에 한해서 가벼운 실습을 해볼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면 좋겠습니다. 시공을 하겠다는 결심이 흔들린 적이 없나요. 시공을 하겠다는 마음이 변한 적은 없지만, 서울시립대학교로 편입 준비를 해본 적이 있어요. 막연히 공부를 더 해보고 싶어 시작했던 건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상지영서대의 수업 과정이 2년이라 충분히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고, 시공만을 쫓다보니 내가 정말 시공을 하고 싶은 건지 헷갈리더라고요. 설계든 뭐든 공부를 더 해보면 결론이 나올 거라 생각했죠. 결과적으로는 편입에 실패해서 초림조경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게 됐지만요. 3개월 정도 아르바이트를 할 생각이었는데, 회사 대표님과 사수가 절 좋게 평가해서 자연스럽게 취직으로 이어졌어요. 만약 그때로 다시 돌아가 무언가를 공부할 수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 같나요. 시공을 하고 싶지만 무엇부터 공부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사람에게 조언을 전해도 좋습니다. 식물 공부를 많이 하세요. 토목, 건축 등 다른 분야와 조경이 차별화되는 지점은 식물임이 분명해요. 식물의 특성을 잘 아는 걸 넘어 식물을 잘 다루게 되고, 식물에 대한 나름의 관점과 철학을 갖게 되면 일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또 조경과 다른 분야 사이에 선을 긋지 말고 건축 내외부, 토목 등 여러 작업에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조경이 아닌 것에서도 조경을 읽고 내 것으로 습득하는 자세가 중요해요. 큰 설계사에서 근무하게 될 경우, 하도급으로 받은 도면을 볼 기회가 많을 겁니다. 그런 도면을 꼼꼼히 들여다보면서 왜 이런 구조로 설계되었는지 생각하고 고민하는 습관을 들이면 실력이 늘고 발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공이라는 게 책만 들여다본다고 익힐 수 있는 게 아니다보니 가장 빠르게 배우는 방법은 현장에 뛰어드는 겁니다. 일을 먼저 하면서 부족하다 생각되는 부분을 후에 배울 수도 있어요. 에이원에도 일을 하다가 조경을 좀 더 공부하고 싶어서 뒤늦게 학교에 간 친구가 있어요. 동국대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방학 때마다 에이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학교생활에 대해 물어보니 또래보다 나이는 많지만 문제는 없다고 하더라고요. 현업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 어린 친구들이 먼저 궁금한 점을 물어보기도 한다고 하더라고요. 15년 정도 두 회사에서 일을 했는데, 주로 어떤 일을 했나요. 두 회사의 일에 차이가 있었는지도 궁금합니다. 첫 아르바이트 현장이자 첫 직장이 된 곳이 초림조경이에요. 초림조경은 종합건설면허를 가진 회사였어요. 큰 공사를 수주해 직영으로 시공할 수 있는 여건의 회사였죠. 덕분에 온갖 종류의 공사를 다 경험했어요. 첫 일터가 커다란 도로의 아스팔트 콘크리트를 전부 걷어낸 뒤 새로 도로를 만드는 현장이었어요. 이런 큰 규모의 공사를 다루는 건 토목인 줄만 알았는데 놀랐죠. 다양한 공종을 하다 보니 조경은 모든 외부 공간을 다루는 분야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인식 자체가 바뀌는 계기였죠. 업무 습득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었고요. 두 번째 회사인 태상조경은 단종면허를 가지고 있었고, 주로 종합건설회사에서 하도급을 받아 일하는 곳이었어요. 하도급을 받아 공사를 하니 공사비에 대한 감각을 키울 수 있었고, 초림조경과는 또 다르게 다양한 프로젝트를 접할 수도 있었어요. 산사태를 예방하기 위한 사방댐을 만들고, 수로를 깔아보기도 했어요. 제 인생에 큰 의미가 있는 서서울호수공원 프로젝트도 이곳에서 진행했습니다. 두 회사가 각기 다른 장점이 있네요. 첫 직장을 골라야 한다면 어떤 회사를 추천하나요. 시공에도 다양한 업무가 있지만 가급적 현장에서 일해 볼 수 있는 회사를 추천합니다. 고생은 하겠지만 혼자서 공무도 보고 현장에서 삽질도 하고 현장소장을 맡아 프로젝트도 이끌어볼 수 있는 회사가 제일 좋아요. 일을 빨리 배울 수 있고 현장을 보는 감각과 시야 자체가 달라지거든요. 또 시간이 흘러 독립을 해야 하는 시점이 오면 분명 한 가지 업무만 했던 사람과는 다른 출발점에 서게 될 겁니다. 시공 현장을 지휘하는 사람을 현장소장이라고 부르죠. 처음 현장소장으로서 이끌었던 프로젝트가 뭔지 궁금해요. 햇병아리 시절에 사수가 들려주었던 “현장에서는 현장소장이 대통령이야”라는 말이 지금도 가슴 깊이 각인되어 있어요. 현장소장은 프로젝트를 끌고 나가며 모든 작업자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자 그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하는 자리인 거죠. 입사한 다음 해에 거의 혼자서 현장을 지휘하게 된 적이 있어요. 농구장을 만드는 프로젝트였죠. 간단할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아요. 빗물 배수 시설 설치부터 시작해서 콘크리트 타설, 마감, 우레탄 포장을 순서대로 진행해야 하죠. 대상지가 북악터널 출입구 근처였는데 바로 옆에 왕복 4차선 도로가 있었어요. 콘크리트 타설을 위한 레미콘이 들어설 공간이 차도뿐이었죠. 겁도 없이 도로 한 차선을 막아두고 작업을 했어요. 우레탄을 깔기 위해 콘크리트 피니셔 장비로 표면을 매끈하게 다듬은 뒤에 화물차에 들어가서 밤새 보초를 섰어요. 다듬어 놓은 표면이 망가지면 다음 공정에 문제가 생겨서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야 했거든요. 그런데 정신 차리고 보니 제가 잠들어 있더라고요. 화들짝 놀라 시계를 확인하니 새벽 다섯 시였어요. 설마 하면서 주변을 살폈는 데 할머니 너덧 분이 산책 삼아 콘크리트 위를 거닐고 있는 거에요. 바로 뛰쳐나가서 할머니들이 나가도록 안내했죠. 살펴보니 표면에 옅게 발자국이 남았더라고요. 도착한 작업자가 우레탄 작업에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의 자국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식은땀이 흘렀던 순간이에요. 연세대학교 정문 앞 양버즘나무를 베었던 일도 생각나네요. 두 사람이 양팔로 마주 안아도 기둥을 다 감쌀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나무였거든요. 유동인구가 많아 평일에는 작업이 불가능했고 일요일에 베기로 마음먹었죠. 정문 앞 도로 중 세 차선을 막아버리고 크레인을 세우고 나무 기둥을 자르기 시작했어요. 원래 가지부터 시작해 위에서 아래로 차근차근 잘라나가야 하는데 멋모르고 오토바이 엔진이 들어가는 커다란 엔진톱으로 기둥 아래를 겨냥해 자르기 시작했어요. 한참 걸려 기둥을 잘라냈는데 그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이더라고요. 때마침 계절이 가을이었고 나무기둥이 완전히 넘어가 바닥과 부딪치는 순간 양버즘나무 꽃가루가 확 터져 퍼지는 그 풍경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진짜 무모한 방식으로 벌인 짓이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 낭만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그 과정이 서툴러도 갖은 방법으로 원하는 결과를 냈을 때 느끼는 도파민이 정말 커요. 한번 맛보면 절대로 이 일을 포기할 수가 없게 돼요. 시공하면 현장에서 몸만 쓰는 사람이라는 편견을 가지기 쉬워요. 체력이 부족하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겁먹기도 하고, 외향적이지 않으면 일하기 어려울 거라 생각하기도 하고요. 우선 체력적인 부분은 시공이 아닌 일을 하더라도 필요한 부분입니다. 설계하는 사람도 필요한 경우 밤샘 작업을 하니까요.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타고난 자신의 성향을 완전히 바꿀 수는 없어요. 하지만 자신만의 스타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힘은 길러야 하죠. 시공을 하려면 육체적인 체력도 필요하지만 단단한 정신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정신력을 길러주는 건 다양한 상황에 대한 경험입니다. 근육에 과부하를 주어 상처를 내고 다시 회복시키는 과정을 통해 근력을 키우듯 정신력도 그렇게 기를 수 있어요. 시공을 하고 싶은데 ‘체력이 못 따라갈 것 같다’, ‘현장에서 사람들과 부딪치면 잘 대응할 자신이 없다’ 걱정하면서 해보지도 않은 채 지레 겁먹고 도망칠 필요는 없습니다. 공간시공 에이원으로 독립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두 번째 회사인 태상조경에 다니던 중, 초림조경에서 일할 때 사수였던 선배가 독립을 하면서 일을 도와달라고 요청해왔어요. 1년 반 정도 그곳에서 일하면서 주로 정원 시공을 하게 됐죠. 그때 이대영 소장(조경상회엘), 이상기 소장(조경설계사무소 온), 김지환 소장을 알게 됐고 정원 만드는 일에 재미를 붙여갔어요. 김지환 소장이 최영준 교수(서울대학교, 당시 랩디에이치 소장)를 소개시켜줬는데 이야기도 잘 통하고 뜻이 잘 맞아 자주 만났고, ‘지붕감각’ 프로젝트를 계기로 팀 동산바치를 결성해서 활동하게 됐죠(“팀 동산바치”, 『환경과조경』 2018년 5월호). 서로가 쌓아온 경험과 그로 인해 얻은 노하우가 다른데, 그걸 조합해서 혼자서는 해낼 수 없는 조경 프로젝트를 할 수 있었죠. 너무 재미있어서 이 활동을 조금 더 이어가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 열망이 은연중에 드러났는지, 선배가 먼저 “이제 독립해서 네 갈 길을 가는 게 좋겠다”고 말을 꺼내고 제 독립을 응원해주었어요. 그렇게 2016년 11월 에이원을 열었죠. 팀 동산바치는 소장님이 평소와는 다른 작업을 할 수 있는 그룹 같아요. 더 좋은 시공을 위해 설계에 의견을 더할 수 있는 활동이 아닌가 싶어요. 설계 뒤 시공을 논하는 게 아니라 설계와 시공을 함께 이야기하면서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어요. 무엇보다 팀 동산바치의 프로젝트에서는 모든 부분을 다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에요. 지붕감각, 원심림(『환경과조경』 2017년 10월호), 설리번학습지원센터 학생점자도서관까지 함께한 뒤로는 각자의 일이 바빠 새로운 일을 벌이지 못하는 상황이라 아쉽습니다. 우선 각자의 위치에서 잘 성장해서 후에 경로당, 어린이 보육원 등 도움이 필요한 곳에 정원을 만드는 일을 하자고 약속한 상태입니다. 대중들은 조경 시공이라 하면, 단순히 조경 시설을 배치하고 식물을 심는 사람이라 생각해요. 하지만 실제로는 터를 다지기 전 필요한 기반 시설을 땅 아래 삽입하는 데부터 시작하는, 체계적인 계획과 전략이 필요한 일이잖아요. 작업 시작 전, 계획을 세우기 위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무엇인가요.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대상지의 현황을 제대로 살피는 겁니다. 땅의 상황을 모른 채 설계한 경우가 있어요. 배수가 잘 안 되는 땅이라 우배수 시설이 필요하진 않은지, 건수가 흐르고 있는 건 아닌지 파악합니다. 필요한 경우, 에이원에서 직접 필요한 빗물받이나 맹암거의 개수와 위치를 설계사에 제안하기도 해요. 현장에서 바로바로 빠르게 대처해 공사 일정과 과정에 차질이 가지 않게 하는 작업인데, 좀 수고롭기는 해도 에이원의 장점으로 뽑히는 부분입니다. 가장 많이 발생하는 문제는 준공 도면에 표시된 땅의 레벨이 실제와 다른 경우입니다. LH 시그니처가든 ‘물의 기억’(『환경과조경』 2022년 7월호) 작업 때도 준공 도면과 현황이 전혀 일치하지 않아서 시공 작업 전 광파 측량을 통해 도면을 새로 만들어 설계사인 HLD에 보냈거든요. 다행히 HLD에서 그 도면을 토대로 다시 도면을 그려 보내줬죠. 물의 기억은 조경이 구조적으로 어떤 장면을 연출할 수 있는지, 대형 콘크리트 구조물을 다루는 동시에 얼마나 섬세하고 예민한 디자인을 구현할 수 있는 보여준 작업이었어요. 콘크리트 구조물에 수경 시설까지 더해야 하는 고난도의 프로젝트였는데, 작업이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비하인드 스토리가 참 웃겨요. 물의 기억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호영 소장(HLD)과 동갑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친구처럼 편하게 지내던 사이는 아니었어요. 그런데 어느날 LH 시그니처가든 프로젝트를 같이 하고 싶다는 전화가 왔죠. 설계안을 봤는데 보통 일이 아니더라고요. 예산이 얼마인지 물어봤는데 공사 작업에 비해서는 턱도 없이 작은 금액이더라고요. 그래도 욕심이 났습니다. 내가 아니라도 할 수 있는 프로젝트지만 그래도 내 손으로 완성하고 싶다는 욕심이 컸어요. 그래서 우스갯소리처럼 “이 프로젝트는 너랑 나랑 친구가 되어야지만 할 수 있다”고 답했죠. 그렇게 이호영 소장과 친구가 되어서 함께 물의 기억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HLD가 시공에 필요한 준공 서류와 도면을 정말 꼼꼼하게 만들어줬고, 작업에 필요한 돌, 갱폼 등의 발주에도 큰 도움을 주었어요. 관건은 거대 콘크리트 구조체를 만들 때 필요한 갱폼(gang form)이었어요. HLD가 국내에서 제일 갱폼을 잘 만드는 회사에 발주를 한 상황이었는데, 어째서인지 납품이 계속 연기됐어요. 예정된 납품 일정에 맞춰 콘크리트 타설, 철근 배근 준비를 다 해놓았는데 갱폼이 오지 않는 거죠. 난감했죠. 알아보니 갱폼 제작 난이도가 너무 높아 애를 먹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건축물이나 교량이 쓰이는 일반적인 갱폼은 일률적인 형태거든요. 그런데 물의 기억의 콘크리트 구조체는 곡률이 계속해서 달라지고, 완만하다가도 갑자기 경사가 치솟기도 하는 복잡한 형태예요. 회사의 사정은 이해하지만, 구조체를 세워야 다음 작업을 할 수 있는데 갱폼 자체가 오지 않으니 속이 타들어갔습니다. LH가든쇼 개막식에 맞춰 완성시켜야 하는 상황이니 더욱 초조했죠. 당시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허리 통증까지 생기더라고요. 공사 현장에서 살다시피 하고 야간 작업을 밥 먹듯이 하며 무사히 완료는 할 수 있었어요. 마지막에는 관계자 모두 모여 웃고 악수하며 헤어졌죠. 에이원의 대표작 하나를 뽑는다면요. 물의 기억이요(웃음). 2021 서울국제정원박람회 초청정원인 앤드류 그랜트의 ‘덩굴의 그물망’을 인상 깊게 봤어요. 균류 네트워크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유연한 형태의 덩굴 구조물이 독특한 작업이죠. 앤드류 그랜트가 한국에 오지 못하는 상황에서, 코디네이터인 엘피스케이프와 협업하며 작업을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라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재료나 시공 등 여러 여건이 설계자의 나라와는 다를 수 있으니까요. 사실 디자인 계획안을 처음 받았을 때 굉장히 당황스러웠습니다. 라이노 형식의 파일이 전부였거든요. 한국의 경우, 구조물을 만들려면 꼭 캐드 형식의 상세 도면이 필요해요. 다행히 최영준 소장에게 부탁해 캐드 도면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구조물을 지지하기 위한 하부 기초 도면이 미비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엘피스케이프와 함께 의논하며 구조물의 하중을 받아내고 침하를 방지하기 위한 하부 기초를 설계하고, 구조물을 잘 지지할 수 있는 추가 구조를 만들었어요. 엘피스케이프가 앤드류 그랜트에게 도면을 전달하고 의견 조율까지 해주어 큰 도움이 됐습니다. 덩굴의 그물망을 돋보이게 하는 요소 중 하나가 구조물의 선형을 부드럽게 타고 오르는 조명입니다. 비용 문제로 설치하지 못할 뻔 했는데 와이엠일렉트로닉스의 신병기 대표님이 흔쾌히 후원해 주어서 더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 수 있었죠. 조경가의 디자인을 그대로 관철하는 시공을 지향한다고 들었습니다. 설계자의 의도를 그대로 구현하는 것이 시공하는 사람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부족한 결과물이 나왔을 때, 설계자와 시공자가 서로를 탓하는 게 참 소모적인 일이잖아요. 도면대로 시공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그 사실을 공유해 함께 타협점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더 효율적인 공정이 있다면 설계자에게 알리는 것 또한 시공자의 몫입니다. 물론 쉽지는 않지요. 도면 그대로를 시공하는 작업자를 넘어 시공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자질이 필요한가요. 시공가에게 ‘창의력’이란 어떤 지점에서 발휘되는지도 궁금합니다. 공간을 많이 보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어떤 공간을 가든 인상 깊은 디테일이 있다면 자세히 살피고,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나라면 어떻게 풀어나갔을지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을 충분히 보내야 합니다. 자신의 작업도 들여다봐야 해요. 시공이 끝났을 때 바로 현장을 떠나지 않고 주변의 피드백을 들어보고 더 개선할 점은 없는지 고민해보는 거죠. 모든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의문을 가지고 바라봐야 합니다. 시공자에게는 창의력이라기보다 임기응변 능력이 필요한데, 요행을 바라라는 게 아닙니다. 꾸준히 관찰하며 익힌 것들을 응용하며 대응하는 기술, 그런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롤 모델이 있나요. 딱히 닮고 싶은 사람이 있지는 않지만 제게 가르침과 도움을 준 사람은 있죠. 서서울호수공원 프로젝트를 하며 만난 최신현 대표님(씨토포스)에게 감동을 받으며 배웠고, 에이원 개소 시절부터 이대영 소장과 다양한 프로젝트를 함께하며 깨달은 바가 많아요. 롤 모델로 삼을 만한 훌륭한 분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걱정이 많아요. 사실 닮고 싶은 사람이 있어야 후학 양성도 활발해 지거든요. 현장에 가보면 시공 작업자의 연령대가 점점 올라가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 새로운 인력이 유입되는 게 아니라는 증거죠. 그들의 노하우와 기술을 배우고 새로운 시공 스타일을 만들어갈 사람들이 없는 거예요. 소위 말하는 ‘기술’을 배우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이런 상황을 만드는 데 한몫하고 있고요. 시공 디테일이 뛰어난 답사 장소를 추천해주세요. 제가 시공했던 현장인 서서울호수공원의 몬드리안 정원을 좋아합니다. ASLA 우수상을 받은 곳인데, 최신현 대표가 “서서울공원은 설계에서 추구했던 부분을 시공 현장에서 디테일하게 표현해 낼 수 있었던 작품이다. 시공 현장에서 디테일을 표현할 수 있었던 건 서울시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감리 역할을 부여했기 때문”이며 “디자인은 도면상에서의 미가 중요한 게 아니라 현장에서 보이는 디테일의 미가 중요하다”고 말한 곳이죠.(각주 1) 실제로 시공 현장에서 최신현 대표와의 작업을 통해 제대로 구현해낸 디테일이 많습니다. 도면을 보고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물어 보면 최신현 대표님이 그 자리에서 펜과 종이를 꺼내 디테일을 그려 설명해주었습니다. 어떤 구조물을 만들 때 왜 반드시 각파이프를 써야 하는지, 도면 속 형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위치에 파이프가 들어가야 하는지도 제시해주었죠. 그림과 설명만으로 감을 잡을 수 없을 때는 목업(mock-up)을 만들어 디테일에 대한 이해도를 충분히 높인 뒤 시공 작업에 돌입했죠. 몬드리안 정원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의 난간을 환봉으로 바꾸면 어떤 분위기가 생길지 의논하며 만들어가기도 했고요. 완성도 높은 공간을 위해 설계자와 어떻게 협의하고 이야기해 나가야 하는지 알게 된 현장이었습니다. 지금껏 접한 시공내역서 중에서 인상 깊었던 도면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안마당더랩과 HLD의 도면이 너무 상세해서 놀랐어요. 어떤 시설과 시설이 만나는 방식, 시설과 땅이 만나는 접점의 형태 등을 쉽게 이해해 시공할 수 있도록 상세도와 예시 이미지를 제시해주더라고요. 시공이 편할 뿐 아니라 공사비를 계산하기도 수월하죠. 안마당더랩은 기획, 설계, 시공을 따로 분리하지 않고 보는 사무소라서 그 노하우가 더 깊은 것 같았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디자인을 실재로 구현하는지 보며 배운 점도 많아요. 저는 사실 단면을 일일이 끊어보면서 레벨이 바뀌는 부분, 시설과 시설이 만나는 방식, 높이 차 등을 계산하는 작업 자체를 즐거워해서 불친절한 도면을 받아도 스트레스를 크게 받는 편은 아닙니다. 하지만 좋은 도면을 받는다면 본래 도면 분석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을 시공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다른 방법을 모색하는 데 쓸 수 있을 겁니다. 에이원 같은 그룹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요. 일을 잘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상태라면 창업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건 클라이언트와 일감일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제게 매일 같이 했던 말이 “돈 따라가지 말라”였어요. 물론 각자가 처한 상황이 다르니 모두에게 저 문장이 해답이 되진 않을 겁니다. 제가 세운 신념은 신의를 지키는 거였습니다. 창업 초기에는 제가 유일한 직원이자 대표다 보니 동시에 여러 프로젝트를 할 수 없었어요. 일감이 비슷한 시기에 여러 개 들어오면, 나의 흥미나 벌 수 있는 돈의 크기 등을 따지지 않고 가장 먼저 의뢰가 들어온 일을 했습니다. 이런 관계가 쌓이고 쌓이다 보니 에이원을 믿고 맡겨주는 클라이언트가 늘어나게 됐죠. 독립을 꿈꾸고 있지만 일이 없을 것 같아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어떤 관점에서 보면 조경 시공 분야의 진입 장벽이 낮은 편이에요. 만약 자신이 충분한 경험을 통해 시공 노하우와 한 회사를 이끌어 나갈 정도의 정신력, 어떤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상처받기보다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대응력을 갖춘 상태라면 겁내지 않고 출발해보기를 권합니다. 서두를 필요도 없고,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봐줄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사실 자신의 위치에서 열심히 일하다보면 자연히 독립해야 할 시점을 알게 돼요. 남과 자신을 비교할 필요도 없고, 가능하다면 우선 지금 일하는 곳에서 자신이 재미를 느끼는 일, 어렵더라도 도전해 보고 싶은 일을 충분히 해보기를 바랍니다. **각주 정리 1. 배석희, “서서울호수공원, ASLA 우수상 쾌거”, 「Landscape Times」 2011년 10월 5일. 안기수는 공간시공 에이원(A1)의 대표다. 상지영서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한 뒤, 초림조경과 태상조경(현 희담)에서 일하며 다양한 조경 공간을 만들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2016년 공간시공 에이원을 열었다. 서서울호수공원, 남해 끽다원, KT 디지코가든, LH가든쇼 시그니처가든 ‘물의 기억’ 등을 시공했다.
  • [모두의 퍼니처] 아름다운길 공간의 미를 완성하는 길
    신뢰를 만드는 완성도 높은 시공 지난 세월 우리가 걸어온 길의 바탕에는 우리를 신뢰한 클라이언트가 있었다. 이러한 신뢰 관계는 직영 시공팀과 연구소, 현장 관리자가 하나의 팀처럼 한 호흡으로 움직이며 오롯이 완성도 높은 시공을 하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덕분에 광화문을 포함한 국내 주요 랜드마크의 길을 맡아서 시공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언제나 아름다운 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며, 이를 위해 프로젝트 시작부터 세심하게 시공한다. 추후 손상 가능성을 예상해 재료 배합비부터 마감 코팅까지 현장 상황에 맞춰 시공하며 하자를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는 기술적 완성도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시민들이 공간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이용할 수 있기를 바라는 진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설계자의 비전을 실현하는 맞춤 시공 길은 단순한 이동 경로가 아닌 공간의 정체성을 완성하는 요소다. 설계자와 여러 차례 협의하며 디자인 의도를 공간에 온전히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기존 방식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려 한다. 또한 소재와 디자인을 고민하는 설계자가 더 나은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디자인에 따른 다양한 샘플을 제공한다. 대안으로 제시했던 소재를 실제 현장에 구현하는 과정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공간과 조화를 이루는 자연스러운 표현 주변 환경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조화로운 길을 만들고자 한다. 인위적인 느낌보다는 재료 본연의 질감과 색감을 살리는 표면 처리 기술에 집중한다. 또한 공간의 특성에 따라 적절한 변주를 시도한다. 길이 공간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때와 조용히 배경이 되어야 할 때를 구분하고, 각 공간의 특성에 맞는 포장 해법을 제안한다. 현재의 성과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시장의 흐름을 주도할 수 있는 포장 제품을 개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광화문 월대, 역사와 현대를 잇는 땅 광화문 월대는 우리의 정체성을 담은 프로젝트다. 15년 전 경화토 건식 포장 브랜드로 나아가던 시기에 광화문 앞길을 시공하며 더욱 성장할 수 있었다. 그래서 2023년 월대 복원 작업에 다시 참여하게 된 게 더욱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특히 광화문은 한국의 대표적 랜드마크이자 문화유산이라 뜻깊은 프로젝트였다. 사실 유입되는 관광객과 차량 통행이 많아서 공기 내 완성도 높은 길을 구현하는 것이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때론 야간 작업을 불사하며, 역사적 가치를 존중하는 동시에 현대적 내구성을 갖춘 포장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광화문 앞길 시공 이후 시간이 흘러, 광화문 월대 복원을 하며 같은 공간에 우리의 기술을 적용할 수 있어 상당히 큰 보람과 의미를 느꼈던 감격스러운 프로젝트 중 하나다. 대전 신세계백화점 옥상정원, 혁신적 패턴의 공중 정원 SF(Smart Finish) 기술을 적용한 SF 콘크리트 포장이라는 새로운 공법의 기술력을 한 단계 발전시킨 프로젝트다. SF 콘크리트는 자연스러운 선형과 미려한 곡선 마감 후 표면 마감 처리를 통해 고급화하는 제품으로, 일반 콘크리트 포장과 다르게 세련된 표면 질감을 선사한다. 대전 신세계백화점 8층 옥상정원에 시각적 편안함을 제공하는 거친솔 마감과 골재 종류에 따라 다양한 연출이 가능한 워싱 마감을 조합해 국내 최초의 교차 패턴을 포장에 구현했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설계자의 독창적인 곡선 교차 디자인을 현실로 만드는 것이었고, 시공 중 여러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극복해 나가며 성장할 수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SF 콘크리트라는 포장 기술을 업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고, 공간적 제약이나 디자인적 도전도 기술과 열정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됐다. 서울공예박물관, 지형의 미학을 담은 지형틀 서울공예박물관은 길 시공 외에 새로운 과제가 주어진 현장이었다. 외부에서 박물관으로 이어지는 진입로의 왕마사 포장과 측면 진입로 콘크리트 포장뿐만 아니라, 건물 양 옆에 배치된 지형틀 시공이 가장 큰 도전이었다. 지형틀은 높이와 경관의 변화를 통해 지형의 미세한 차이를 표현하는 요소로, 자연스러운 선형 표현이 중요하다. 투수 콘크리트에 별도의 표면 처리를 통해 골재를 노출시키는 마감을 적용했다. 선형 표현을 위한 거푸집 설치부터 재료 선정과 설치 방법까지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다. 곡선과 높낮이를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두께의 합판과 함석을 활용하고, 일정한 폭을 유지하기 위한 고정 작업이 필요하기도 했다. 낯선 작업이라 쉽지 않았지만 완성된 결과 물과 함께 거푸집 제작에 관한 노하우를 얻게 된 소중한 프로젝트였다. 아름다운길은 앞으로도 ‘공간의 미를 완성하는 길’이라는 비전을 지향하며 더 나은 공간을 만들기 위해 나가고자 한다. 건축과 조경으로 구성된 공간 환경에서 시민들이 직접 만지고 걸으며 경험하는 길은 공간의 시작이자 끝이다. 길을 통해 공간 전체의 가치를 높이고, 나아가 공간의 정체성을 완성할 수 있는 특별한 요소가 될 수 있게 노력하고자 한다. 지속가능한 미래 도시를 위한 투수성 포장 기술 연구 등 끊임없는 기술 혁신으로 지금보다 더 아름다운 길을 만들고 싶다. 누구나 신뢰할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을 오랫동안 만들며 어제보다 더 나은 길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노력 중이다. 2005년 설립된 아름다운길은 그 이름처럼 아름다운 길을 만든다. 단순한 사명이 아닌 우리가 품고 있는 철학과 지향하는 비전을 함축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클라이언트가 언제나 믿고 맡길 수 있는 완성도 높은 시공을 지향하며, 클라이언트를 포함한 시민들의 다양한 요구에 맞춘 포장 해법을 제공하고자 노력한다.
  • 어린이대공원의 중심이 되는 플랫폼 서울어린이대공원 식물원 리모델링 조경 설계공모 당선작
    서울어린이대공원 식물원은 1972년 11월 준공됐다. 50여 년이 흐르며 식물원의 시설은 낡아갔고, 시민들의 발길이 뜸해지며 활용도도 낮아진 상황이다. 서울시는 식물원 전면 리모델링을 통해 서울어린이대공원의 새로운 집객 요소로 탈바꿈시키고자 ‘서울어린이대공원 식물원 리모델링 조경 설계공모’를 개최했다. 낙후되고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식물원을 새로운 식물 전시 등을 통해 어린이와 시민의 기호와 수준에 걸 맞도록 바꾸고 안전성을 확보해 시민들의 접근성을 높이는 것이 공모의 목표다. 1차 제안서 심사와 2차 PT 발표를 통해 씨토포스의 ‘어린이대공원의 중심이 되는 플랫폼’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2등작은 그람디자인이, 3등작은 조경설계호원이 차지했다. 심사위원은 당선작이 서울어린이대공원 식물원 건축설계안(일구구공도시건축의 ‘식물도감’, 2024년 11월 22일 선정)의 내·외부를 유기적으로 연결했으며, 특히 어린이를 위한 사바나월드, 다양한 깊이의 식물을 관람하는 트로피컬월드, 중앙의 그리너리월드 등 다양한 기능과 연출로 공원의 중심성을 확보하고 확장성이 높은 계획을 제시했다고 평했다. 식물원 리모델링 사업은 8월까지 설계를 마치고 2026년 6월까지 공사를 완료해 같은 해 8월 재개원할 예정이다. *환경과조경444호(2025년 4월호)수록본 일부
  • 형태는 무엇을 따르는가 한국조경학회, 제22회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 주제 토크
    한국조경학회는 매달 ‘KILA 포럼’을 열어 조경학의 지식과 이론을 나누고 시의성 있는 의제를 토론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지난 14일, 2025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과 연계한 ‘형태는 무엇을 따르는가(Form follows what)’를 주제로 포럼이 개최됐다. 포럼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조경 디자인의 본질을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인 형태 생성의 접근법과 담아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포럼은 줌을 통해 발표와 질의응답 순으로 진행됐다. 포럼에 350여 명의 조경학과 학생들이 참여해 환경조경대전 주제에 대한 높은 관심을 드러냈다. 포럼은 박희성 연구교수(서울시립대학교, 한국조경학회 학술부회장)의 사회로 진행됐고, 김무한 교수(공주대학교, 한국조경학회 기획 이사), 이명준 교수(한경국립대학교, 한국조경학회 기획 이사), 민병욱 교수(경희대학교, 한국조경학회 기획 부회장)가 발표를 담당했다. 김무한 교수는 ‘형(形)-행(行)-태(態)’를 주제로 조경 설계에서 형태 생성의 중요성과 그 과정에 관한 탐구에 대해 강연했다. 직선, 정사각형, 직사각형과 패턴 등 기본 선과 도형을 활용해 공간의 형태를 발전시키는 방법과 자연에서 나타나는 선을 디자인에 반영하는 폼 제너레이션(form generation)을 설명했다. 1960~1970년대 프로세스 아트가 조경 설계에 미친 영향을 고려하면 창의적인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프로세스 아트적인 조경 설계를 통해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과감한 형태 변화와 창의적인 방향이 나왔으면 좋겠다. 시간 요소가 디자인 관점에서 폼 제너레이션을 발전시키는 점에 주목하면 보다 재미있는 폼을 만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환경과조경444호(2025년 4월호)수록본 일부
  • [기웃거리는 편집자] 1승을 향해
    고등학교에서 지하철 타고 한 정거장만 가면 영화관이 있었다. 영화관 근처에 맛집과 놀거리가 많아 시험 끝난 날에는 이곳에 가 맛있는 밥도 먹고, 영화도 보며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다. 통신사에서 선착순으로 천원에 영화 티켓을 선물로 주기도 해 방과 후에 친구랑 종종 영화를 보러 갔다. 그때는 OTT가 없었을 때라 영화관이 아니면 영화를 보기 힘들었다. 티켓이 생기면 한 번은 친구 취향, 한 번은 내 취향의 영화를 번갈아 봤다. 취향과 상관없이 친구들 사이에서 재미있다고 소문 난 영화도 보며 다양한 영화를 접했다. 이때 어떤 영화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게 되면서 나만의 영화 선택 기준이 생겼다. 이제는 OTT가 발달해 많은 영화를 손쉽게 접할 수 있지만, 그때 생긴 나만의 기준은 지금의 영화와 드라마 선택에도 영향을 미친다. 나만의 기준은 네 가지다. 1) 로맨틱 코미디, 스포츠, 타임슬립, 추리물 등 선호하는 장르 2) 좋아하는 배우가 출연하는 영화나 드라마 3) 흥미로운 제목과 예고편 4) 입소문 타고 있는 영화나 드라마. 네 가지 기준의 교집합에 속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발견하면 챙겨 보곤 한다. 스포츠 영화인 데다가 주인공인 박정민의 연기를 좋아해서 보고 싶었던 영화가 있었는데, 예고편을 보고 스포츠 영화 특유의 클리셰 범벅일 것 같아 망설이고 있었다. 우연히 유튜브 쇼츠로 본 영화 속 한 장면이 보고 싶다는 마음을 일깨웠다. 마침 구독 중인 OTT 영화 리스트에서 이 영화를 발견해 바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렇게 본 영화가 ‘1승’(2024)이다. 1승은 배구를 소재로 한 영화로, 김우진(송강호) 감독이 만년 꼴찌 후보인 프로 여자 배구단 ‘핑크스톰’의 감독을 맡아 1승을 향해 가는 이야기를 담았다. 영화는 처음부터 예상을 뒤엎는다. 강정원(박정민)은 해체 직전인 핑크스톰을 일으키기 위해 구단주가 된 게 아니라 다시 잘 팔기 위해 프로 배구단을 산다. 지도자 승률이 10%인 점과 파직, 파면, 파산, 퇴출, 이혼 경력이 마음에 들어 김우진을 감독으로 선임한다. 구단주의 파격적인 행보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핑크스톰이 1승만 하면 시즌권 구매자 중 추첨을 통해 20억을 준다는 것이다. 구단주는 돈이 없는 구단을 위해 그나마 잘하는 선수 두 명을 다른 구단으로 보내 5억을 받아내는 트레이드를 진행시키고, 통역자를 구할 돈이 없어 재일교포를 용병으로 기용하고, 훌륭한 실력에 그렇지 못한 인성을 가져 출전 정지 명령을 받은 선수를 다시 부른다. 이렇게 구성된 핑크스톰은 1승은커녕 1세트도 따내기도 힘들어진다. 영화는 1승만 바라보며 달려간다. 스포츠 영화에서 종종 선수의 가슴 아픈 사연이 나오곤 하는데, 이 영화는 선수 사연보다 선수가 가진 특징에 집중한다. 특히 감독은 선수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너의 장점이 뭐라고 생각하니.” 프로 생활 6년 내내 벤치를 지키던 선수는 대답하지 못하고, 반대로 단점을 물으니 소심하고 눈치 보는 것이라 답한다. 이를 들은 감독은 눈치를 보니 다른 선수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며 세터 포지션에 서게 한다. 여기에 유연한 허리를 이용한 기술을 연마하게 했고 이는 팀의 무기가 됐다. 다른 선수에게도 똑같이 질문하며 선수가 가진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게 포지션을 변동하고 경기를 뒤집는 한 방으로 활용한다. 상대 팀이 예상하지 못하는 공격과 수비로 이어지고 점수로 연결되었다. 점차 프로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고 1세트도 못 따던 핑크스톰은 1세트를 넘어 1승을 바라보게 된다. 스포츠 영화에서 볼 법한 클리셰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예상을 빗나간 장면과 대사, 몰입도를 높인 시합 연출은 영화를 끝까지 보게 했다. 특히 현실에선 보기 힘든 구단주의 공약들은 나의 웃음요소였다. 그리고 영화는 뜻밖의 질문을 내게 남겼다. “너의 장점은 무엇인가.” 이 질문의 답이 나만의 1승을 향해 나아가는 첫 걸음이 될 것 같았다. 내 장점은 뭘까, 갑자기 궁금해져 AI에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장점을 찾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장점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의식적으로 찾아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어요. 과거 경험 돌아보기, 주변 사람에게 물어보기, 다양한 관점으로 살펴보는 등의 방법을 활용하면 나 자신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장점도 더 잘 보일 거예요.”
  • [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죽는 건 어떤 기분이야?
    먼 우주에서 본 나의 모습을 상상한다. 너무 작아 보이지도 않을 테다. 시점의 높이를 점점 낮춘다. 대기권에 진입해 구름을 통과하고, 고층 빌딩의 옥상 높이까지 내려오면 종이에 쿡 찍은 작은 점처럼 보일 거다. 생명 활동을 하니 ‘지구 생명체’로 분류된다. 자세히 관찰할수록 나는 여러 이름을 얻는다. 포유류, 인간, 아시아인, 한국인, 선거권자, 여성, 장녀, 노동자. 수없이 많은 단어의 나열 끝에야 내 이름 세 글자가 놓인다. 요즘에는 나를 이르는 또 다른 이름들을 생각하는 일이 잦다. 내가 개인이 아닌 어떤 집단의 일부라 느껴질 때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아시아인이 죽으면, 노동자가 죽으면, 여성이 죽으면, 내 일부가 사라진 듯한 기분이 든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거나 피 한 방울도 사라지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만큼씩 헛헛하고 공허해진다. 이 공허함은 무력감과도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영화 ‘미키 17’의 주인공에게도 미키 반스라는 이름이 있다. 하지만 아무도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않는다. 미키 뒤에 넘버링을 붙이거나 익스펜더블이라 부른다. 익스펜더블(expendable)의 의미는 ‘소모용’. 이토록 무례한 형용사를 붙인 이유는 미키가 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미키가 죽으면 유기체 프린터가 미리 스캔해둔 신체 정보를 활용해 새 몸을 프린트하고 저장해둔 그의 기억을 뇌에 삽입해 미키를 부활시킨다. 불로불사를 이룬 권력자처럼 느껴지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익스펜더블은 ‘케네스 마샬’이라는 막대한 부를 지닌 정치인―선거에서 두 번이나 낙선했다―이 인류가 새롭게 머물 니플헤임이라는 행성을 개척하기 위해 모집한 직업군 중 하나다. 익스펜더블은 온갖 위험한 일을 도맡는다. 방사능에 노출되면 몸은 어떻게 반응하는지, 행성에 인체에 해로운 바이러스가 있지는 않은지, 새로 개발한 백신의 부작용은 없는지 확인하는 온갖 실험의 피험자가 된다. 익스펜더블이 어떤 일을 하는지 모른 채 계약한 미키는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이 일을 계속한다. 잡히면 제 신체를 가지고 즐거운 살인 쇼를 벌일 사채업자를 피해 지구를 떠나야만 했고, 미키는 익스펜더블이 아니면 개척단에 들어갈 수 있는 특별한 기술이나 재능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미키의 고통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가 살아나면 대수롭지 않게 새로운 숫자를 미키 뒤에 붙여 부른다. 노동자가 죽어도 시스템을 그대로 둔 채 또 다른 노동자를 들이는 것처럼, 미키는 끊임없이 죽고 살아나 익스펜더블의 자리를 채운다. 사실 예고편을 봤을 때는 노동자의 인권과 파시즘의 문제를 지적할 뿐 아니라 복제인간에 대한 논의를 펼칠 거라 예상했다. 신체와 기억을 복사한 것만으로 같은 사람을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실제로 여러 미키는 특징이 조금씩 다르고, 특히 미키 17과 미키 18은 완전히 다른 인물처럼 보일 정도로 성향 차이가 분명하다. 하지만 영화는 끝끝내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던지지 않는다. 의아해하는 내게 실마리를 준 건 친구 L이었다. “이 사회가 양산형 제품처럼 다루는 노동자들이 결국 퍼스널리티가 다른 개개인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았어. 복제인간 이슈가 중점이 아니라 국가가 생산하고 버리는 노동자 1, 노동자 2가결국 하나의 개개인이라는 걸 외치는 느낌. 크리퍼도 모두 똑같이 생긴 것처럼 보이지만 각자 이름이 있었잖아.” 감독이 의도한 답이 아니더라도 내게는 충분했다. 미키는 다시 살아나지 못하게 되고서야 미키 반스라는 이름과 존중받을 권리를 되찾는다. “불멸의 존재로 거듭났으나 필멸의 존재가 되어서야 존엄성이 생기는 아이러니다.”(각주 1) 본래 익스펜더블, 노동자, 채무자, 하층민과 같은 단어들은 죽을 수 없다. 개개인이 각기 다른 인격으로 다뤄질 때,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죽을 수 있게 된다. 이번호 ‘다시, 정원을 읽다’를 편집하며 곳곳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정원들을 생각했다. 정원의 정체성에 대한 제대로 된 논의 없이 무분별하게, 전시적인 정치적 산물과 브랜딩 전략으로서 만들어지고 있는 정원은 개개의 이름을 가진 가치 있는 공간으로 여겨지고 있을까. “모든 게 정원이어서 정원이 아무것도 아닌, 정원의 시대”(12쪽)를 맞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번 특집이 ‘미키 17’를 보는 내내 날 불편하게 하고,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들었던 질문처럼 가닿기를 바란다. “죽는 건 어떤 기분이야?” **각주 정리 1. 장혜령, “봉준호 감독의 첫 번째 ‘사랑 이야기’가 담아낸 것”, 『오마이뉴스』 2025년 3월 4일.
  • [PRODUCT] 쾌적한 도시 환경을 만드는 포그메이커 대기 오염에 효과적인 고압 안개 분무 시스템
    미스트는 야외 공간에서 이용자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시각적 연출 요소로 활용될 뿐 아니라 주변 온도를 낮추거나 공기를 정화해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에버디포(Everdepot)는 고압 안개 분무 시스템 전문 브랜드 ‘위드미스트(Withmist)’를 통해 인간의 삶과 좋은 도시 환경을 위한 친환경적 해결법을 제공한다. 스마트 ICT 기반 고압 안개 분무 시스템을 활용해 쾌적한 정원과 조경 공간을 만들고 있다. 이 시스템은 초미세 미스트를 균일하게 분사해 식물 생육 환경을 개선하고, 미세먼지 저감과 온도 조절 기능을 통해 지속가능한 조경 유지·관리를 지원한다. 특히 포그메이커(Fog Maker)는 고압 안개 분무 시스템을 적용한 에버디포의 대표 제품으로 대기 오염에 효과적으로 대응한다. 특수 공법으로 제작된 미스트 노즐과 고압 펌프는 물을 빗방울의 약 1,000만 분의 1 크기의 입자로 분사한다. 고압 분사 시 시간당 물의 이용량이 적어 저압 시스템 대비 경제적이다. 단위 면적당 물 입자의 수가 많고 밀도가 높아 분진 입자가 비산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차단한다. 부유 먼지, 미세먼지, 황사, 매연 등을 포집해 대기 중 유해 물질을 50% 이상 감소시키며 깨끗하고 쾌적한 환경을 제공한다. 다양한 야외 공간에서 활용 가능하며, 고압으로 분사되는 미스트의 도달 범위가 10~90m에 달해 규모가 큰 공간에 사용하면 효과적이다. 도심 속 정원, 식물원, 수직 정원 및 스마트팜 등 다양한 환경에 적용 가능하며 미세 안개 미립자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까지 도달해 넓은 구역의 온습도 조절에 유리하다. 자동 제어반 시스템을 이용하면 분사량과 분사 시간 등을 설정할 수 있어 더욱 편리하다. TEL. 070-4231-8971 WEB. www.withmist.com
  • [에디토리얼] 설계공모의 난맥을 되짚어보며
    설계공모라는 네 글자는 언제나 기대와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설계공모가 생각만큼 꿈과 낭만의 보물 상자인 것만은 아니다. 성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경쟁에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야 한다. 과정과 결과를 둘러싸고 의혹과 불신이 끊이지 않는다. 설계공모의 목적은 좋은 설계안 또는 설계자를 뽑는 데 있다. ‘좋은’은 ‘독창성 뛰어난’이나 ‘실험성 강한’처럼 가슴을 뛰게 하는 어휘로 대체할 수 있다. 주최자의 의도를 대변하는 설계 지침서들을 보면 “○○를 ○○할 수 있는 ‘독창적’ 아이디어와 디자인을 구한다”는 공모 목적이 예외 없이 쓰여 있지만, 말 그대로 독창적이기만 한 제출작은 당선되기 쉽지 않다. ‘좋은’의 자리를 경제성, 합리성, 공공성 같은 가치가 차지하는 설계공모도 적지 않다. 하지만 경제성은 값싼 재료와 시설, 합리성은 뻔한 디자인, 공공성은 실체 없는 말 잔치로 귀결되는 예가 허다하다. 설계공모의 성과물을 누릴 주체는 당선작에 따라 실현될 공간의 사용자들이지만, 그들이 공모의 과정에 개입할 기회는 매우 드물다. 게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주체는 출품자, 주최자(또는 그를 대리하는 전문위원), 심사위원 정도다. 세 배역을 조금씩이나마 맡아본 경험담을 나누고자 한다. 설계공모의 꽃은 게임의 선수인 출품자다. 나는 자신을 조경가가 아니라 이론가 또는 비평가로 정의하고 있지만 아주 드물게 공모전에 출품한 적이 있다. 다양한 인력으로 구성한 팀의 일원으로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거나 전반적인 디자인 개념을 잡는 데 조력하는 역할을 했다. 불확실한 경쟁의 장에 뛰어드는 일이었음에도 초조함이나 불안감보다는 엔돌핀이 샘솟는, 아주 자극적인 경험이었다. 자신의 디자인 아이디어와 해법을 실험할 수 있다는 기대, 자신의 구상이 실현되거나 적어도 공론화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을 테다. 당선의 기쁨을 맛본 적은 없다. 억울하진 않았지만 아쉬움은 컸다. 무엇보다도 패인을 알 수 없다는 점이, 더 정확히 말하자면, 패인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주최자나 심사위원회가 제출작과 최종 경쟁작에 대해 상세한 리뷰를 제공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몇 줄의 형식적인 심사평이라도 발표되면 다행이다. 대부분의 패자는 작품 외적인 모종의 상황 때문에 당선되지 못한 것이라고 의심하며 분루를 삼킨다. PA(Professional Advisor)라고도 불리는 설계공모의 전문위원은 주최자의 대리자 역할을 한다. 설계공모가 갑자기 늘어난 2000년대 중반 무렵 국내에 도입된 제도다. 나는 행정중심복합도시 중앙녹지공간, 광교신도시 호수공원, 동탄신도시 워터프런트, 용산공원 등 몇몇 국제 설계공모의 전문위원단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 복잡하지만 도전적인 일이었다. 전문위원단은 설계공모 전반을 기획하고 설계 지침을 쓰고 제공 자료를 만들고 심사위원을 섭외하고 심사 과정을 진행한다. 지명 공모라면 지명 초청자를 선정해 섭외하는 일도 해야 한다. 홍보, 의전, 전시 기획, 작품집 출판까지 관장해야 한다. 가장 당혹스러웠던 경험은 주최자가 공모의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였다. 대상지를 무엇으로 어떻게 쓰겠다는 명확한 의도 없이, 원하는 설계안과 설계자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도 없이 행정 절차의 하나로 공모를 맡기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공들여 설계 지침을 작성해도 머릿속에 그렸던 작품이 제출되지 않는 때도 많았다. 지침을 적절하게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일 테다. 심사위원으로 초대한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작품 자체보다 태도와 스타일에 초점을 두고 심사를 하거나 난데없는 국가 대항전, 감정적 민족주의의 대리전을 펼치는 등, 심사 과정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기도 했다. 다시 하라면 가장 하기 싫은 배역은 심사위원이다. 나에겐 출품자가 몇 달씩 집중하고 몰입해 제출한 성과를 단 몇 시간 안에 평가할 안목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심사에서는 ‘이 작품은 직선이 많아 생태적이지 않다’, ‘저 작품은 정자가 있으니까 한국적이다’라는 수준의 주장이 토론을 주도했다. 첨예한 이권이 걸린 공모에서는 공정성 보장과 투명성 확보를 구실로 심사자 간 토론을 금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마네킹처럼 다소곳이 앉은 심사위원들이 자신의 채점표에 점수만 매기는 풍경이 생중계됐다. 심사위원을 맡기 난감한 더 큰 이유는 인간관계다. 심사위원 후보로 예상되면 선후배와 친구는 물론이고 친구의 친구, 생전 본 적 없는 사람들로부터 전화가 빗발친다. 전화기를 꺼놓아도 소용없다. 연구실 문을 잠그고 없는 척해야 한다. 제출작 제목을 문자 메시지로 보내오는가 하면 패널 이미지 파일이 카톡으로 날아들기도 했다. 설계공모 기획, 설계 지침서 작성, 공모 운영, 심사위원 선정, 심사 진행, 공모 이후 당선작 구현에 이르는 프로세스 전반을 다시 디자인하고 공론의 장에서 토론할 시점이다. 이번 호에는 다섯 명 필자를 초대해 특집 지면 ‘올바른 설계공모를 위하여’를 꾸린다. 최영준(서울대학교 교수)은 한국 현대 조경의 지형 속에서 설계공모가 변천해온 과정을 살피고, 좋은 설계공모의 기준으로 기획자의 선 설계, 참여자의 본 설계, 관람자의 설계 인식을 꼽는다. 이해인(HLD 소장)은 참가 자격, 심사 공정성, 의사 결정 방식, 당선작의 구현 보장이라는 네 가지 측면에서 설계공모의 정상화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안한다. 이승환(아이디알 건축사사무소 소장)은 설계공모의 공정성을 둘러싼 문제를 다각도로 짚는다. 일부 설계사무소의 당선 독점, 심사위원 사전 접촉과 로비 등 불공정 문제를 검토하고, 심사위원 선정 및 사전 공개와 관련된 현실적 개선 방안을 논의한다. 정평진(스코어러 대표)은 ‘스코어러’ 데이터베이스와 심사위원 인터뷰집 『코멘터리』 0호를 바탕으로 국토교통부의 설계공모 운영 지침, 심사위원 위촉과 구성, 당선 결과의 양상, 올바른 심사의 기준 등을 검토한다. 임유경(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은 건축공간연구원의 연구를 토대로 공공 프로젝트 설계공모 이후의 설계 변경과 공사 부실 문제를 살피고, 이상과 실제의 간극을 줄이기 위한 대안을 모색한다. 2024년 1월부터 이어온 신명진의 연재 ‘밀레니얼의 도시공원 이야기’를 맺는다. 도시의 공원을 일상의 장으로, 관심의 공간으로, 다시 연구의 대상으로 경험해온 한 밀레니얼 박사의 이야기에 그간 많은 독자의 호응이 있었다.15회에 걸친 노고에 깊이 감사드린다.
  • [풍경 감각] 손쉬운 다이어트법
    아침 수영을 마치고 체중계에 올라선다. 어라, 뜻밖의 몸무게다. 수건으로 몸에 남은 물방울을 꼼꼼히 닦아내고 뜨거운 바람에 머리카락을 바짝 말린 뒤 다시 잰다. 마찬가지다.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몸무게에 한해서는 언제나 최고 기록을 갱신하는 중이다. 다른 체중계로 재면 다를지도 몰라. 집으로 돌아와 체중계를 꺼낸다. 계기판이 흔들리며 높은 숫자 중 하나를 고르려고 해서 재빠르게 내려온다. 그리고 저울을 옮긴다. 벽에 기대어 세워두고 발로 밀어 몸무게를 잰다. 7㎏ 남짓. 바늘 끝이 아주 가볍다. 다이어트 그까짓 것, 정말 쉬운 일이다. 1월마다 결심해온 체중 감량. 올해는 해낼 수 있을까. 그래도 바늘이 가리키던 숫자처럼 마음이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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