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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쿠브뤼네트 베이스캠프 Skovbrynet Basecamp
    스쿠브뤼네트 베이스캠프(Skovbrynet Basecamp)(이하 베이스캠프)는 혁신적 주택 콘셉트를 보여주는 프로젝트다. 학생, 연구원, 노인을 위한 700여 채의 아파트가 마련됐다. 이 주거 지역의 외부 공간을 자연, 건강, 모빌리티를 강조하며 도시의 레크리에이션을 위한 숨 쉬는 공간으로 탈바꿈시키고자 했다. 륑뷔(Lyngby)시의 매력적인 녹지대에 자리 잡은 베이스캠프의 북동쪽에는 소르엔프리(Sorgenfri) 공동묘지가, 서쪽에는 륑비 호수가 있다. 부지 전체를 둘러싼 생울타리와 관목은 풍성한 녹음을 자랑한다. 대상지 주변의 자연환경을 보존하면서도 바람이 통하는 보행 네트워크를 구축해 통일성 있는 경관을 만드는 것이 설계의 목표였다. 공원 같은 경관을 만들면서도 수목을 곳곳에 흩어 심고 변동적인 식재를 통해 다양성을 만들어냈다. 기술적으로 까다로우면서도 포괄적인 외부 공간을 계획했다. 건물 6층까지 이어지는 공공 녹지 보행로를 따라 오르면 구불구불한 건물 옥상의 모습과 륑비 호수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건물 옥상에는 높이 자란 그라스가 우거진 풍경을 연출하고 주변 경관을 감상하기 좋은 보행로를 조성했다. 베이스캠프의 옥상은 아름다움과 지속가능성, 기능이 한데 조화를 이룬 모습을 보여준다. 옥상에서 직조되는 유기적 형태의 구불구불한 소로는 주민과 방문객이 이 공중 경관을 탐구하도록 불러들인다. 경계석 없이 설계된 소로는 건물의 자연스러운 윤곽을 따라가며 외부 공간과 아래 건물 사이를 매끄럽게 전환시킨다. 부드럽고 흐르는 듯한 디자인은 주민들의 사생활을 보호하면서도 기억의 남는 경관을 자아낸다. 옥상과 연계된 테라스는 휴식과 사색의 공간을 제공한다. 테라스들은 옥상 정원의 고요함을 즐기기에 이상적이며, 주민뿐 아니라 공공에게 열려 있어 다양한 커뮤니티 구성원에게도 공중 녹지를 거닐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한다. 공원 같은 환경, 소르엔프리 공동묘지, 륑비호수를 파노라마로 감상할 수 있는 조망점을 제공하는 이 공유 공간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독려하고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꾸려나가는 데 도움을 준다. *환경과조경446호(2025년 6월호)수록본 일부 글 Kragh&Berglund Landscape Architect Kragh&Berglund Landscape Architecture and Urban Design Architect Lars Gitz Architects Collaborator JFP, AFRY Client ST Skovbrynet student Aps, BC Skovbrynet Residential Aps Location Lyngby, Denmark Area 34,000㎡ Completion 2020 Photograph Sofie Cold Ravnkilde, DronePixels 크라그&베릴룬드(Kragh&Berglund Landscape Architecture andUrban Design)는 2003년 한스 크라그(Hans Kragh)와 요나스 베릴룬드(Jonas Berglund)가 설립한 창의적 스튜디오다. 스칸디나비아의 설계 원칙을 기반으로 혁신적이고 지속가능한 조경 설계를 실천한다. 건축, 경관, 도시설계를 아우르며 프로젝트의 중심에 항상 사람을 둔다. 코펜하겐, 스톡홀름, 오슬로에 사무소를 두고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목표로 다양한 도시, 경관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 Kragh&Berglund
  • 선양 재료과학 국가연구센터 Shenyang National Research Center for Materials Science
    융합의 정원 융합의 정원은 선양 재료과학 국가연구센터(이하 선양 연구센터)에 조성된 공공 오픈스페이스다. 선양 연구센터의 남북 축을 이루는 이 정원은 주요 건축물과 센터의 동서 방향을 물이 흐르는 수경 요소로 연결한다. 융합의 정원이 센터 남측 주출입구의 배경을 이루는 만큼, 국가연구센터의 위엄과 상징성을 드러내면서도 일상적 활용을 고려한 경관을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남쪽 광장 남쪽 주출입구에 위치한 광장은 모든 방향에서 주목할 수 있는 시각적 배경으로 만들었다. 약 3천㎡ 규모의 광장에 몽골참나무 열두 그루를 자연스럽게 배치해 모임과 흩어짐, 지나침과 머묾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했다. 몽골참나무 군락은 멀리서 보면 건축물의 규모와 어우러지는 개방적이면서도 녹음이 풍성한 경관이며, 가까이 다가가면 독특한 세부 요소를 살피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곳곳에 배치한 흰 벤치는 구름 형태이며, 수목 보호대에는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를 사용해 주변 경관과 나무 그림자가 독특한 형태로 맺히게 했다. 수경 시설 자칫 단조로워 보일 수 있는 수경 시설을 자연스럽고 생동감 있게 만들기 위해 노랑꽃창포를 띠 형태로 식재했다. 이는 건축물 입면이 물에 반사되는 모습을 부드럽고 한층 더 자연스럽게 만들 뿐 아니라, 녹지가 부족한 공간의 단점을 시각적으로 보완한다. 중앙의 넓은 수면에는 원형 수상 플랫폼이 있다. 플랫폼 중심부에 높낮이가 다른 금속 패널을 여러 겹 겹쳐 만든 원형 회랑(파빌리온)과 우주를 은유하는 알루미늄 조각을 설치해 주요 경관 요소로 삼았다. 최소한의 요소만을 사용해 장소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 집중했다. 친수 공간 친수 공간은 두 가지 방식으로 조성했다. 동쪽은 포장 면적을 넓히고 점진적으로 수면에 접근할 수 있는 친수 플랫폼을 설치하고, 곳곳에 긴 벤치를 배치했다. 반면 서쪽은 수변에 맞닿은 정박형 공간으로 조성했다. 포장면의 수목 보호대를 안쪽으로 기울인 형태로 디자인하고, 콘크리트 단 위에 등받이를 설치해 공간을 더욱 가볍고 개방감 있게 연출했다. 경직성 완화 건축물과 포장 공간이 만나는 경계 부분에는 두께 8cm 이상의 석재를 사용하고, 리아트리스를 심어 경계의 경직성을 완화했다. 이곳에서는 지피 식물의 색 상과 형태보다는 식물의 존재 여부 자체가 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일상 속 비일상 융합의 정원은 과도한 장식, 기이한 형태, 형식적 포장 패턴, 다양한 재료의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다. 대신 표면 처리, 마감, 조합 방식, 단차 등 모든 세부적 요소에 서 비일상적인 정교함을 지향하며 국가연구센터라는 장소의 정체성과 조화를 이루게 했다. 절제 속 자유로 움, 간결함 속 풍요로움이 융합의 정원이 추구하는 일상 속 비일상의 디자인이다. 글·사진 R-land Design R-land Concept Design Zhang Junhua, Zhao Changjiang, Zhang Peng, Li Ruijing, Zhao Yanying, Shi Wanrong Construction Documents Design Zhang Junhua, Zhao Changjiang, Yan Yili, Yu Feng, Jiang Chongjian, Liu Lixing, Ji Qian, Dai Jing, Zhang Wenxu, Zheng Yunfeng, Bai Zuhua, Hu Haibo Architect Song Dongmi Electrical Installation Xu Feifei, Zhang Yali Structure Ma Aiwu, Shen Shiru Construction China Railway 19th Construction Bureau Client Shenyang Wanbo Development and Construction Location Chuang Xin Lu, Liao Ning Sheng, China Area 1.71㏊ Design 2019. 11. ~ 2021. 12. Completion 2024. 5. Photograph R-land 베이징 웬수경관계획설계사무소(源樹景觀規劃設計事務所, R-land)는 2004년 설립된 중국의 환경 전문 설계사무소다. 경관 계획, 공공 공간, 관광·휴양지, 테마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특히 대지 경관 설계와 자문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 R-land
  • [우먼스케이프] 허난설헌의 풍경
    허난설헌과 허균, 신사임당과 율곡을 낳은 강릉. 그곳에 뭔가 특별한 기가 서려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이번 5월 귀국 길에 강릉행을 계획했다가 실패했다. 허난설헌 기념공원도 둘러볼 생각이었다. 역에 가서 기차표 끊으면 될 거라고 쉽게 생각한 것이 첫 번째 실수였고 5월 초 연휴가 길게 이어진다는 사실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 실수였다. 기차표도 고속버스표도 일찌감치 완전히 매진된 상태였다. 차를 임대해서 가볼까도 생각했으나 그래 봐야 강릉의 정기는커녕 고속도로에 줄지어 선 자동차의 행렬 속에서 스트레스만 한가득 충전하여 돌아올 것이 뻔했기에 포기했다. 물론 아주 오래전, ‘잘 먹고 잘 살고 잘 놀기’가 시작되기 훨씬 전에 이미 여러 차례가 보긴 했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둘러본 것이 아마 2008년경인 것 같다. 용평에 머물며 정원을 하나 만들고 있을 때였다. 강릉이 멀지 않았으므로 경포대도 볼 겸 겸사겸사 주말에 길을 떠났다. 강릉에 도착해 경포 해변으로 내려가다가 혼비백산하고 돌아섰다. 언덕의 능선을 결딴낸 호텔과 펜션, 어지럽게 번득이는 오색 등불, 어디선가 들려오는 요란한 음악, 주차장에 종으로 횡으로 진입하는 자동차 등, 아수라장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 아수라장을 통과했더라면 백사장으로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토록 망가진 풍경에 대한 노여움이 불같이 치솟아 도저히 머물 수가 없었다. 지금 갔더라면 달라졌을까? 대형 호텔과 펜션, 횟집과 주차장의 자동차들 사이에서 난설헌의 정신을 읽어낼 수 있었을까? 그녀의 위대한 시가 그 추해진 풍경을 다 덮을 수 있을까? 혹시 난설헌이 강릉의 풍경을 거듭 노래했더라면 이를 기리기 위해서라도 강릉시가 풍경을 보존하려 노력해 보지 않았을까? 난설헌의 시는 풍경시라고 말할 수도 있을 만큼 수많은 풍경을 노래했지만 강릉을 노래한 시는 단 한 수밖에 전해지지 않는다. “우리 집은 강릉땅 강가에 있어 / 문 앞 흐르는 물에서 비단옷을 빨았지요 / 아침에 목란배를 한가히 매어 두고는 / 짝지어 나는 원앙새를 부럽게 보았어요.”(번역: 허경진) 그 외 난설헌의 시선은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아주 먼 중국이나 혹은 그보다 더 먼 신화의 세계로 향해 있었다. 16세기 조선은 어떤 시대였나 허난설헌은 1563년에 출생해 1589년, 만 26세로 요절했다. 연대로 본다면 황진이와 신사임당의 손녀뻘이었다. 조선에서 가장 유명했던 세 여인이 모두 16세기를 살다 갔다. 문득 궁금해진다. 16세기 조선은 어떤 시대였을까? 조금 더 좁혀보자면 연산군(1476~1506)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즉 중종, 인종, 명종 대의 조선이다. 성리학이 아직 경직되기 전이었다. 붕당 정치가 태동했으나 세도 정치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사림 주도의 서원 문화가 활성화되어 온 나라에 무기 철렁이는 소리 대신 글 읽는 소리가 낭랑했다. 신분제도 역시 세분되어 가는 과정에서 계층 간의 이동이 있었을 것이다. 한편, 우리가 아는 네 번의 사화가 모두 16세기에 일어났다. 정치적 격변의 시대였다. 황진이의 시를 빌려 표현해 본다면 15세기는 청산처럼 단단했고 16세기에 오히려 푸른 파도가 일렁였다. 흐름과 변화가 있었다. 가부장제도 역시 완전히 정착하지 않아서 사임당의 경우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의 풍습에 따라 혼인 후에도 평생 친정에서 맘 편히 살며 재주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난설헌은 아뿔싸, 친영례(각주 1)가 도입된 직후에 혼인하여 시집살이를 시작한 1세대가 되었다. 난설헌의 시에 이따금 서릿발이 내비치는 것이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난설헌의 두 개의 삶 난설헌 허초희는 만 15세에 안동 김씨 가문 김성립과 혼인했고 이 혼인을 전후로 확연히 구분되 는 삶을 살게 된다. 구김살 없이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하루아침에 낯선 가문, 낯선 가풍의 어린 며느리가 되었다. 친영례가 막 시작된 무렵이었으므로 시집살이에 관한 매뉴얼도 아직 없었을 것이다. 친정 아버지 허엽, 오빠 허성과 허봉, 동생 허균 모두 뛰어난 문장가여서 난설헌과 함께 허씨 5 문장이라 불렸다. 그중에서도 난설헌의 문장이 가장 격조 높았다고 평가된다.(각주 2)아버지 허엽은 지 난 호에 이미 등장했던 인물이다. 화담 서경덕의 문인으로 황진이와 함께 수학했던 열린 사고의 인물이었다. 딸의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하고 이를 장려했으며 오빠들도 초희를 지극히 아꼈고 동 생 허균도 누이를 매우 따랐던 것 같다. 이 시절에 어린 초희는 마음껏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다. 그러다 혼인과 함께 초희의 세상은 급격히 달라졌다. 남편 김성립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시어머니와 의 갈등도 컸다고 전해진다. 각별했던 둘째 오빠 허봉이 글을 다시 쓰라고 붓을 보낸 것으로 보아 마음 놓고 글도 쓸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아이 둘을 낳아 한때 행복했으나 두 아이 모두 어린 나이에 역병으로 죽고 뱃속의 아이마저 잃게 된다. 곧이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친정이 몰락하기 시작했다. 오빠 허봉은 당파 싸움 끝에 귀양을 다녀와 병을 얻어 객사하고 만다. 그리고 이듬해 난설헌도 죽는다. 죽음의 정확한 경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상을 떠났다’라는 표현을 액면 그대로 이해해도 좋을 듯하다. 병을 앓았다는 이야기도 없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증거도 없다. 이제 그만 살겠 다고 작정하고 곱게 누워 영혼을 떠나보냈을지도 모르겠다. 떠나기 전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 듯, “연꽃 스물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라는 의미심장한 시 한 수를 남겼다.(각주 3)그토록 줄기차게 노래했던 신선의 세상으로 훌쩍 떠나간 것일까? 『난설헌집』의 머리말을 썼던 중국 시인 주지번은 난설헌을 선계에서 인간 세계로 잠깐 귀양 와 구슬 같은 시를 쏟아낸 선녀라고 소개했다.(각주 4) 유선사, 난설헌의 현실 초월일까 아니면 자아가 머무는 곳이었을까 난설헌의 시 세계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선계를 노래한 ‘유선사(遊仙詞)’다. 전해지는 210여 편의 시 중반이 넘는 128편에서 선계를 노래했다. 그중 총 87수로 이루어진 ‘유선사 연작’이 있는데 여기서 난설헌은 인간계의 굴레와 한계를 초월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장엄하게 그리고 소름 끼치도록 아름답게 펼쳐낸다. 서왕모로부터 시작하는 신선들의 복잡한 계보와 그들이 깃들어 사는 무한한 세상에 관한 이 대서사시는 해독이 쉽지 않다. 수많은 지명, 신선명, 인명 및 사건을 이해하려면 백과사전을 일일이 검색해야 한다. 난설헌의 유선사는 혼인 후의 갑갑한 인생에서 도피하기 위해 쓴 것으로만 이해할 일은 아니다. 선계에 관한 동경은 이미 어린 시절에 시작되었다. 아버지를 통해 전해진 화담 서경덕의 영향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달달 외울 정도로 탐독했다는 송나라 책 『태평광기太平廣記 』에 실린 7천여 에 달하는 이야기는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그중에서도 선계의 이야기가 어린 난설헌을 가장 사로잡았던 것 같다. 여덟 살에 지었다는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각주 5)이라는 글도 선계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출발해 87수 연작의 서사시로 귀결했고 마지막 시도 선계로 장식했다. 어린 시절 호기심과 재미로 출발했을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선계는 난설헌의 진정한 자아가 머무는 세상이 되었다. 한 가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난설헌은 자신의 재능에 대한 확신과 자부 심을 가지고 있었다.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의 마지막 단락을 보면 꼬마 초희가 하늘의 명을 받 아 “강물이 내달리듯, 샘물이 솟아나듯” 상량문을 지어냈다고 하고 “구절이 아름답고 문장도 굳 세어 이백의 얼굴을 대해도 부끄럽지 않다”라고 썼다.(각주 6)죽기 전에도 흡사한 주장을 했다. 어느 날 밤 꿈에서 선녀들을 만났는데 시를 한 수 지어보라 해서 지었더니 선녀들이 이건 신선의 글이라 감탄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다시 이태백에 견주었다.(각주 7) 나무에 붉은 말고삐를 매는 청년은 누구일까 유선사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그 외에도 난설헌의 시제는 매우 다양했다. 거의 모든 세상만사를 한번 쯤은 시로 읊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궁중의 일을 묘사한 궁사 연작도 있고 ‘죽지사’라고 하여 풍속 이나 연정을 노래한 것도 적지 않다. 그중 연가 몇 수는 “절창이지만 방 탕하여 문집에 실 수 없다”라는 금지곡 선언을 받기도 했다.(각주 8) 그 모든 난설헌 시를 꿰뚫는 공통점이 있다. 4백 년 전에 쓴 시임에 도 불구하고 꼭 어느 영화에선가 본 듯한 장면을 연상시킨다는 사실이 다. 그건 아마도 시마다 인물이 등장하고 그 인물이 특정한 행동을 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렇게 인물을 등장시켜 특정한 행동을 하게 함으 로써 영화의 스틸 컷과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것은 난설헌 시의 남다른 점이다. 예를 들어 ‘버들가지 노래’라는 시에서는 이런 장면을 그렸다. “청루 서쪽 언덕에 버들꽃 흩어지자 / 아지랑이 낀 가지가 난간 을 스치는데 / 어느 집 청년인가 백마를 채찍질해 와서 / 버드나무 그 늘에다 붉은 고삐를 맨다.” 나무에 말고삐를 매는 청년 혹은 귀공자는 난설헌의 시에 꽤 자주 등장한다. 청년의 말고삐와 채찍의 색상이 바뀌고 장소도 달라져 궁궐 로 출근도 하고 장안 길가에도 나타났다가 기생집 앞에 말고삐를 매기도 한다. 마치 시그니처처럼 여기저기 불쑥불쑥 나타나 말고삐를 매는 이 청년은 대체 누구일까? 혹시 난설헌의 또 다른 자아가 아닐까? 스스로를 이태백과 견준 난설헌의 기개로 볼 때, 그리고 “조선에서 여자 로 태어난 것과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을 3대 불행으로 꼽았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자신도 오빠들처럼 벼슬길에 올라 궁으로 출퇴근도 해보고 자유롭게 나들이도 하며 기생집 기둥에 말고삐도 한번 매보고 싶지 않았을까? 허난설헌의 다원적 자아 - 선인, 궁인, 귀공자, 전장의 장수 입새곡(入塞曲), 새하곡(塞下曲) 내지는 출새곡(出塞曲)이라는 한시의 장르가 있다. 변방을 지키는 장수와 병사들에 관한 시다. 난설헌은 입새곡 5수, 새하곡 5수, 출새곡 2수를 남겼다. 아마도 그녀의 시 중 가장 의외적 주제가 아닐까 싶다. 이제는 말고삐를 매는 청년티를 그만 벗고 장수가 되어 하늘 높이 걸린 석양을 바라보며 칼 차고 만 리 출정 길을 떠나 보고 싶었던 것일까? 깊은 구름 자욱한 사막에서 봉화 살펴보고 나서 밤 평원을 달려가는 기병들을 그리기도 했고 열 겹 포위망을 뚫고 흉노를 무찌른 뒤 백마를 타고 눈을 밟으며 돌아오는 장군의 노래도 불렀다. 그대로 웰메이드 사 극의 한 장면 같고 소설의 시놉시스 같다. 16세기의 조선에 갇혔던 난설헌은 시를 통해 선계에서 수만 년을 보내고 문득 인간의 세상으로 내려와 베를 짜는 가난한 여인도 되어 보고 궁녀가 되었다가 상인이 되어 강상을 누비기도 했다. 붉은 말고삐를 쥐고 길 떠나는 청년으로, 변방을 지키는 장수로 자아를 무수히 쪼개가며 살았다. 그녀가 그렸던 풍경도 그만큼 다채로웠다. 그러나 어느 것도 그녀의 것은 아니었기에 결국 죽음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2022년 국립발레단이 허난설헌의 시를 무용극으로 무대에 올린 적이 있다. 난설헌의 시 중에서 ‘감우(感遇)’와 ‘몽유광상산(夢游廣桑山)’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감우는 난설헌이 드물게 자신의 정서를 직접 표 출한 감성시로서 4수로 이루어졌다. 그중 1수에 난초와 서리, 즉 난설이 나타난다. 몽유광상산은 문자 그대로 선계에 있다는 광상산을 노니는 꿈을 꾸고 나서 지은 것으로 연꽃 스물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는 바로 그 장면이 묘사된 시다. 난설헌은 이 시에 특별히 서문을 지어 첨부했는데 거기서 스스로를 이태백에 견준다. 그녀의 난해하고 환상적인 풍경을 형상화하기에는 기념공원보다는 오히려 오페라나 발레 무대, 혹은 영상 예술이 적합할 수 있다. 이렇듯 난설헌은 20세기 후반부터 다각도로 크게 조명을 받고 있 다. 물론 좋은 일이지만 그보다는 차라리 난설헌이 다시 태어나 한번 마음껏 훨훨 살아주었으면 생각해 본다. **각주 정리 1. 신부가 시댁에 가서 일생을 보내는 제도. 2. 임미정, “허난설헌 시자료의 재검토”,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제42호, 2021, p.80. 3. 몽유광상산(夢游廣桑山) 4. 홍경진, 『허난설헌 시집-10(한국의 한시)』, 평민사, 1987, p.227. 5. 선계의 광한전이라는 궁전에 백옥으로 된 누각을 새로 지었는데 그 대들보에 넣어둘 상량문을 상상해서 쓴 것이다. 6. 4번 책,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 p.203. 7. 위의 책, p.211. 8. 난설헌과 동갑이었으나 더 오래 살았던 이수광(李睟光, 1563~ 1629)이 한시를 정리하며 그리 평했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 『신의 정원, 나의 천국』, 『고정희의 바로크 정원 이야기』, 『고정희의 독일 정원 이야기』, 『100장면으로 읽는 조경의 역사』를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고정희
  • [슬기로운 공원 생활] 세상의 끝, 나의 공원
    공원 산책 산책 또는 걷기는 가장 단출하게 공원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집과 일터를 한군데로 합치고는 퇴근길이란 게 사라졌다. 언젠가부터 오후 여섯 시 반에 일을 마치면 동네 뒤편을 둘러싼 개운산 공원의 야트막하고 고즈넉한 산길을 홀로 걷는다. ‘퇴근 본능’이 이런 걸까. 처음에는 일과를 끝내는 느낌 때문에 발 닿는 대로 자꾸 걸었는데, 날씨에 따라 조금씩 경로가 달라지긴 해도 그럭저럭 반복과 규칙이 됐다. 유명 작가, 철학자들의 걷기와 인생을 주제로 쓴 책에서 나와 비슷하게 산책한 양반을 찾는다면 그건 아마도 ‘칸트’일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칸트는 날씨와는 상관없이 마치 시곗바늘처럼 매일 오후 다섯 시부터 늘 똑같은 길을 혼자서 걷고 또 걸었다. 해질 무렵 정해진 코스를 되풀이한다는 면에서 일견 비슷하지만, 실제 결정적으로 닮아 있는 건 산책의 난이도다. “그(칸트)의 산책은 인색하고 쩨쩨하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는 땀 흘리는 걸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여름에 아주 천천히 걸었고 땀이 몇 방울이라도 흐르는 게 느껴지면 곧바로 그늘에서 걸음을 멈추었다.”(각주 1) 세상의 끝 협의 따위로 바깥 일이 없는 날에는 근처 공원의 어느 한 자락이 일터 겸 집을 기준으로 하루 중 가장 멀리 간 곳이다. 어딘가 걸어야 하루가 마무리되는 기분이 드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하루라는 ‘시간’의 관념적 마무리를 구체적인 ‘공간’의 끝까지 걸어가면서 몸으로 실제 확인하려는 그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습성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쨌거나 내게 공원 산책은 하루를 정리하면서 그만치 세상의 끝까지 자분자분 걷는 일이다.인생 자체가 글쓰기와 산책이었던 작가 로베르트 발저가 쓴 『세상의 끝』이라는 짧은 소설이 있다. 주인공인 아이는 ‘세상의 끝’을 찾고자 무려 16년을 바다, 평원, 산을 걸어서 헤맨다. 모질게 고생을 겪은 뒤 길에서 만난 어느 농부에게서 구한 답이 다소 어이없다. “‘세상의 끝’은 근처에 있는 한 농가의 이름”(각주 2)이며, 삼십 분만 더 걸어가면 닿을 곳이란다. 이런 산책은 멀든 가깝든 그저 걷고 걷는 일일 뿐이다. 달리 고민 없이 공원 길을 가만히 따라가면 일과로 뒤엉켰던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조금씩 풀린다. 어느새 걱정도 아쉬움도 굴욕도 고뇌도 발길에 닳은 듯 사라진다. “네가 최고 강자다―그렇지만 넌 그저 최고 강자일 뿐이다. 이렇게 인간은 사물의 형태를 취한다. 작아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무것도 아닌 편이 낫다.”(각주 3) 개운산 공원 말끔하고 번듯한 대형 공원이나 정원을 좀체 가지 못한다. 아버지 환갑 때부터 팔순을 지나 사반세기 동안 인구가 통 변하지 않는 어느 허씨 일가의 가족사진처럼. 언제나 혼자였고 혼자이니 그렇게 멀리 외톨이로 가 봐야 딱히 할 일이 없다는 게 먼저 꼽는 핑계가 되겠다. 더불어 ‘왜 나는 저렇게 설계할 수 없는가’라며 마음을 온통 들쑤시는 속 좁은 질투심 때문에 그런 공원들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는 게 또 하나의 유별난 사유다. 하지만 거기서 나아가 예쁘장한 정원과 공원에서 “‘노동’과 ‘노동자’의 흔적이 …… 어떻게 해서 사라지게 되었는지”(각주 4) 곰곰 생각하면 마음이 자꾸 시끄러워진다. 지나치게 매끈하고 반들거리는 시설들에 견주면 정작 사람이 겉돈다. 내개 “공원에서는 어떤 소속감 같은 걸 느끼기가 쉽다”(각주 5)고 하지만 그런 장소들이 내게는 때로 징글맞기도 하다. 호사롭지 않아도 그저 일상의 평화와 안식을 줄 수 있다면 그런 공원이 내게는 우선이다.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위치한 서울 성북구 ‘개운산 공원’은 1940년에 지정된 해발 134m 산지형 공원으로서 나이로 치면 딱 우리 아버지 연배다. ‘개운산(開運山)’은 조선시대 창건한 개운사(開運寺)라는 절에서 비롯됐는데, 다른 이름 진석산(陳石山)은 채석장이 있던 자리라서 그리 불렸다고 한다. 바위가 워낙 많아선지 산을 둘러 생긴 동네들인 종암동, 안암동, 돈암동 모두 형제처럼 바위 암(巖) 자 돌림이다. 지금도 공원 산길을 걷다 보면 높직한 돌덩이 절벽이 간간이 서 있고 울퉁불퉁 튀어나온 커다란 바위들도 많다. 공원 길 옆으로 동네 쪽을 내려다보면 오래 전 원석을 잘라내고 널찍하게 남긴 자리가 완만히 펼쳐져서, 그 경사진 바위로 걸어 나가 털썩 앉아서 멀리 용마산, 아차산, 수락산, 북한산을 빤히 바라보는 게 제법 장쾌하다. 주로 걷는 길은 개운산 공원 중에서도 고려대학교가 개방한 사유지에 있 다. 돌 계단이며 흙길, 데크 등으로 길이 차분히 이어지는데, 주변은 울울창 창하지도 삭막하지도 않게 적당히 빽빽한 숲이다. 수십 년 전 심은 소나무, 스트로브잣나무, 팥배나무, 산벚나무, 때죽나무 등 수목들이 어울려 자라고 상수리, 갈참나무, 졸참나무가 군데군데 버티고 선 모습을 보면 자연스럽게 천이되는 과정인 듯하다. 나무들 뒤로 외래종 서양등골나물의 추억이 따라온다. 주말 대낮이었다. 생태 교란종 서양등골나물 꽃들이 대거 창궐해서 심각하다는 기사를 봤는 데, 과연 문밖 아파트 곳곳까지 이미 널리 침투해 있었다. 늘 가던 대로 걷다 가 개운산의 높은 지점을 지나 반대편으로 내려가는 길인데, 빛이 거의 안 드는 숲 가장자리에도 떡하니 그 망할 흰 꽃들이 번지고 있는 게 아닌가. 부아가 치밀어서 풀을 잡아 뜯어도 만만치 않다. 여간해선 뿌리까지 나오질 않 는데 마침 주위에 아무도 없길래, 내친김에 아예 큰 나무들 밑으로 들어가 서 피하던 땀까지 흘려가며 그 풀들을 열심히 뽑아내던 참이었다. “지금 뭐 하세요?” 삼사십 대로 보이는 여인네가 홀연히 나타나서 묻는 다. 놀랐지만 그보다도 혹시 오해할까 두려웠다. 겉보기에 가녀린 들꽃을 피 사리하듯 뽑은 건 글쎄다, 사이코패스에게나 어울리지 않는가. “음, 이게 그 냥 꽃 같아도 말하자면 생태 교란종이라는 겁니다. 외국에서 온 녀석들이 하도 퍼져서 우리 고유의 좋은 식물들까지도 죄다 못 살게 굴어요.” “아, 그렇구나.”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몸을 돌려 몇 발짝 내려간다. 나도 다시 내 임무에 충실하려는 순간, 돌연 그녀가 홱 돌아서면서 웃음을 짓더 니 두 손을 마구 흔들며 부른다. “오빠, 같이 가요, 같이 내려가요!” 그녀의 동공이 왠지 묘하게 흔들렸다. 그늘에서 솎아낸 ‘꽃을 든 남자’와 그에게 애 타게 ‘손짓하는 여인’. 누군가 호젓한 산길에서 이런 장면을 마주한다면 과연 뭐라고 할 것인가. “저저, 전, 어이, 올라가는 길이었어요!” 숲 아래서 황급히 튀어나와 반대 방향으로 부리나케 올라갔다. 그날 나의 공원의 끝, 개운산 꼭대기에는, 비 교적 낡았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쓸 만한 조합형 생활체육시설과 철봉이며 역기며 운동 기구를 두루 갖춘, 얼기설기 잇대고 덮은 막사 같은 서민형 피트니스 클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어쩌면 공원에서 “세상의 종말은 모든 것이 멈출 때가 아니라 모든 것이 끝도 없이 계속될 때 다. 그러니 차가운 달빛 아래서 한 발을 다른 발 앞에 내딛기만 하면 된다.”(각주 6)철학자 프레데리크 그로는 칸트가 반복한 걷기의 특징을 단조로움, 규칙성, 필연성, 세 가지로 꼽으면서 필연성이 규칙성의 개념에 덧붙으면 그것이 바로 ‘운명’이라고 한다. 무언가 맹렬한 추구와는 정반대로 마음을 내려놓은 한 인간의 ‘수동적 의지’가 지닌 힘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 평생의 산책자, 로베르트 발저가 그런 운명이었을까. 발저는 1919년 ‘크리스마스 이야기’라는 산문에서 “눈으로 덮인 채, 눈 속에 파묻힌 채 온화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자여. 비록 전망은 앙상했지만 그래도 생은 아름답지 않았는가”(각주 7)라고 썼다. 공교롭게도 1956년 성탄절 아침 그는 산책을 나섰다가 눈밭에 쓰러져 죽은 채 발견됐다. 극적이라도 이렇게 쓸쓸한 운 명은 굳이 마다하겠다. 걷다 보면 그게 아닐 거라고, 마침내 어딘가에서 누군가 만나도록 흘러갈 거라고, 그렇게 되려고 혼자 걷는 중이라고 애써 되뇐다. 건축학과에서 가을 학기 조경학개론을 몇 년간 강의한 적이 있었다. 주 중 행사로 밤새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의 주적은 무엇보다 ‘졸음’이다. 누군가 조언을 해서 중간고사가 끝난 추석 무렵이면 수업 대신 서울숲 답사를 갔다. 가기 전에 학생 대부분 입이 댓발은 나와서 툴툴거렸다. 설계 과제는 몰려 있고 마음은 바쁘고 몸은 피곤하며 학교가 있는 용인에서 서울 답사지는 멀기도 하고. 그러다가 단풍이 곱게 들어가는 오후의 공원에서 수십 명 출석을 부르고 마음대로 흩어지라고 하면 강의실에서는 절대 못 볼 밝은 얼굴들이 꽃처럼 환하게 피어났다. 볕 좋은 가을날 두어 시간 동안 이곳저곳으로 제 방식대로 아름답게 섞여 들어간 청춘들을 여기저기서 천천히 돌아봤던 기억이 지금 도 생생하다. 그들에게도 좋은 기억으로 남았으리라 믿는다. 혼자서도 좋지만 각자 짊어진 세상의 모서리들이 모처럼 둥그러니 느슨 하게 이웃하는 그런 순간 잠깐 드러나는 ‘세계의 끝’, 뭐 현실판 피안 같은 그런 널찍한 곳도 공원이 아닐지, “나는 연락하러 그곳에 간다.”(각주 8) **각주 정리 1. 프레데리크 그로, 이재형 역, “일상적인 외출, 이마누엘 칸트”,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책세상, 2014, p.222. 2. 로베르트 발저, 배수아 역, “세상의 끝”, 『산책자: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 한겨레출판, 2017, p.83. 3. 폴 발레리, 백선희 역, 『폴 발레리의 문장들』, 마음산책, 2021, pp.66~67. 4. 제이디 스미스, 케이티 머론 편, 오현아 역, “보볼리, 피렌체/빌라 보르게세, 로마”, 『도시의 공원』, 마음산책, 2015, p.44 5. 위의 책, p.44. 6. 1번 책, p.318. 7. 2번 책, p.24. 8. 황지우 시 “인천으로 가는 젊은 성자들”의 마지막 구절 허대영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부터 설계사무소에서 일하고 있으며, 좀처럼 화내지 않는 유능하고 성실한 친구들과 함께 주로 교육·연구 시설과 공공 업무 시설의 외부 공간을 설계하고 있다.
    • 허대영
  • [모두의 퍼니처] 예건 장소성과 연계한 조경 시설 구현
    예건은 그동안 주변 환경을 거스르지 않고, 조성된 장소의 공간 활용도를 최대한 높일 수 있는 디자인을 시도해 왔다. 한 장소 안에서 자연스러운 배경으로 기능하는 조경 시설, 음식의 감칠맛을 높이는 소금처럼 공간의 활용도를 높여 공간의 분위기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조경 시설을 만들고자 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장소에 대해 지속적으로 탐구하며 조경 시설을 통해 도시를 위한 공간의 장소성을 구현하고 있다. 입체적 경험을 만드는 장소성 장소성은 물리적 환경뿐만 아니라 공간에 담긴 역사, 문화, 사회적 의미를 포함한다. 따라서 장소성의 관점에서 보면 조경 시설은 단순한 쉼터 이상의 의미가 있다. 조경 시설은 시민들에게 일상 속 여유를 제공하며, 특정 장소에 대한 인식과 경험을 형성하는 핵심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다. 장소성을 고려한 조경 시설은 공간의 정체성과 그 공간이 가진 고유한 이미지와 분위기를 연출해 이용자에게 더 깊게 각인되는 입체적 경험을 제공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공간을 설계한 조경가의 계획을 충분히 숙고하며 설계에 부합하는 대안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숲속 공간에 현대적 시설을 배치하는 것보다 숲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소재를 적용한 시설을 배치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전통 공간에 전통적 색감과 형상이 반영된 시설을 배치하면 조화를 꾀할 수 있다. 조선왕릉길에 조성한 조선왕릉 퍼걸러는 장소의 특수성과 공간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과도한 조형을 지양하고, 전통적 요소를 살릴 수 있는 비례와 형태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했다. 퍼걸러의 절제된 형상은 왕릉으로 이어지는 숲길을 가득 메운 나무들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이를 통해 왕릉이 가진 특유의 정취와 장소성을 돋보이게 했다. 이처럼 장소의 특성을 이해하고 반영한 조경 시설은 이용자의 정서와 장소를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장소를 읽어주는 디자인 조경 시설은 단순한 편의 시설을 넘어 도시 안에서 사람과 장소를 연결하는 장소적 매개체로 기능한다. 그래서 우리는 특정 장소의 정체성과 맥락을 해석하고 시각화해 장소를 읽어 주는 디자인을 시도한다. 지역의 역사, 지리적 특성, 지역 주민의 삶의 방식 등 다양한 요소를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시설의 형태, 재료, 공간 배치 등을 기획한다. 이러한 기획의 대표적인 프로젝트 중 하나가 양재천의 복합휴게시설 ‘플로우 스테이션(Flow Station)’이다. 양재천 유속 흐름에서 형태적 모티브를 얻은 플로우 스테이션은 크게 커뮤니티 에디션과 바이커스 에디션으로 나뉜다. 커뮤니티 에디션은 주거 단지와 업무 단지의 이용자들을 위한 휴게 공간으로 담소 공간, 학습 공간 등을 마련해 다양한 형태의 휴식을 즐길 수 있게 했다. 바이커스 에디션은 자전거 이용객들의 편의성을 고려해 1층 자전거 임시 거치대에 자전거를 거치한 뒤 잠시 휴식할 수 있게 마련한 공간이다. 여름철 폭우로 자주 범람하는 양재천의 지리적 특성을 고려해, 서랍식 구조의 유선형 테라스를 구성하고 대상지 사면과 일체화된 유체역학적인 형태로 디자인해 폭우 시 범람과 부유물에 의한 파손을 최소화했다. 사고를 확장하는 디자인 장소성을 고려한 어린이 놀이 공간 디자인은 어린이와 놀이터를 연결한다. 최근 어린이 놀이 시설 디자인에서 주목 받는 키워드 중 하나는 지형의 재해석이다. 한때 인기를 끌던 원색과 캐릭터 조형 요소가 접목된 놀이 시설에서 벗어나 지형을 살린 창의적 놀이 시설이 큰 관심을 받고 있다. 특히 언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놀이 공간은 자연을 접할 일이 적은 현대 아이들에게 자연을 닮은 놀이 구조가 되어주어 다른 시설과 비교해서 아이들의 성장 발달에 더 효과적이다. 다양한 높낮이를 가진 지형은 아이들에게 다양한 신체 활동, 상상력, 공간 인식 능력을 동시에 자극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언덕을 오르내리며 균형 감각을 기르고, 꼭대기를 향해 경주하고 정복하는 능동적인 행위를 통해 행동 및 신체 발달을 꾀하고 적극성을 기를 수 있다. 언덕 사면을 따라 슬라이드, 네트, 터널, 암벽 홀더 등을 설치하면 다양한 도전과 협업, 창의적인 놀이가 가능하고, 경사도를 조절하면 다양한 연령의 아동이 함께 이용할 수 있다. 언덕 자체를 놀이 공간으로 인식하게 되면, 아이들은 이곳에서 놀아도 될까라는 제한된 관점에서 벗어나 자연에서 보이는 모든 구릉과 언덕이 놀이터라는 확장된 사고방식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조성한 서산 명륜근린공원 놀이터는 언덕을 새로운 놀이 공간으로 활용했다. 기존의 노후된 공원을 리노베이션하면서 계단만 놓여 있던 공원의 언덕 사면에 메가슬라이드를 설치하고 중앙 공간에 네트, 마운딩 등을 통해 다양한 연령대의 어린이들이 다양한 수준의 놀이를 즐길 수 있게 했다. 장소성을 위한 보편적 경험 설계와 소통 장소성을 구현하려면 단지 보기 좋은 형상을 디자인하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이용자의 동선, 행동 패턴, 감성적 반응 등을 고려해 방문객이 실제로 편하게 이용하고, 다시 찾고 싶은 공간으로 조성해야 한다. 특히 어르신, 아이, 장애인 등 다양한 계층의 접근성과 편의성까지 고려한 유니버설 디자인이 요구된다. 특정 계층과 연령대만 향유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보다 모두가 나눌 수 있는 보편적 경험과 감성을 시설에 담았을 때 진정한 장소성을 구현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장소성을 구현하는 디자인은 개인적 창작물이 아니라, 공공성과 협력을 전제로 한다. 지역 주민, 방문자, 기관이나 단체 등 다양한 주체와 소통하며 다양한 의견을 수용하고, 장소가 지닌 특성과 활용 가능성을 함께 찾아갈 필요가 있다. 이는 단순히 정해준 형상만을 그리는 것이 아닌 다양한 의견을 조율하는 디자인이 필요하다. 다양한 의견을 조율한 대표적인 프로젝트는 반려동물 테마 시설 ‘왈로Waalo’ 시리즈다. 수도권 공동 주택, 용산 미군 장교 숙소, 수안보 생태공원 등 다양한 장소에 왈로가 활용됐다. 수도권 공동 주택 유휴 공간에 왈로를 조성할 때 입주민들과 디자이너가 함께 협업했다. 이곳은 훈련, 놀이, 휴게 공간을 구분해 디자인했으며, 반려견과 보호자가 교감하며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소중한 공간으로 조성됐다. 용산 미군 장교 숙소에서는 기존 잔디와 보행로로 기획된 공간을 반려견과 함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연출했다. 수안보의 생태공원에는 반려견을 동반한 가족단위 방문객을 위한 시설로, 바비큐장과 어린이 놀이터와 별도 분리된 안전한 공간을 선정해 자연석과 수목이 어우러진 공간 속에 반려견과 함께 할 수 있는 시설을 배치했다. 실용적이며 지속가능한 디자인 장소성과 연계된 시설물은 단기적 설치물이 아닌, 오랜 시간 장소와 함께 공존해야 한다. 실용성과 지속적인 유지·관리 측면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소재의 내구성, 이용자의 접근성, 계절 변화에 따른 대응력 등도 고려해야 한다. 이처럼 지속적인 유지·관리를 가능하게 해주는 요소는 소재다. 소재는 음식으로 비유하면 고급 식자재라고 할 수 있다. 재료가 특별하면 맛도 특별하듯 품질이 뛰어난 자재가 주는 감성은 그대로 이용자들에게 전달되며 그 장소에서의 생명력도 길어진다. 양질의 소재는 사용자, 관리자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장소성의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해당 공간의 장소성은 더욱 오래 유지되고, 공동체의 자산으로 남는다. 진정한 의미의 장소성은 단지 과거를 보존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경험과 상호 작용 속에서 현재와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장소성과 연계된 조경 시설은 장소의 완성도를 높이고, 사람과 장소 사이의 정서적 연결을 만들어주는 매개체가 된다. 이제 단순한 ‘쉼’을 위한 시설이 아니라, 장소와 이용자를 연결해 줄 수 있는 조경 시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설계 단계부터 장소성과 깊이 있게 연결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예건(Yekun)은 1990년 창립한 조경 시설 전문 기업이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디자인을 지향점으로 삼고, 도시 경관과 조경 공간에 어울리는 기능성과 심미성을 갖춘 조경 시설을 만들기 위해 창립 이래 꾸준히 매진해왔다. 국내의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며, 조경 시설 ‘푸르너스’, 친환경 어린이 놀이터 ‘아이붐’, 반려동물 시설 ‘왈로’와 X-게임 등 다양한 조경 시설 브랜드를 선구적으로 시장에 선보였다. 기술과 완성도를 기반으로 한 디자인, 제작, 시공, 유지·보수까지의 전 과정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토털 솔루션을 제공해 왔으며, 국내외 특허를 비롯해 ISO 9001, ISO 14001 인증을 통해 그동안 쌓은 경험과 노하우를 인정받았다. 자연친화적 소재와 디자인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를 바탕으로 자연과 조화를 꾀하며 시민들에게 편리하고 풍요로운 도시 환경을 구축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 2025 서울국제정원박람회 서울 그린 소울, 5월 22일부터 10월 20일까지
    정원도시 서울을 대표하는 축제인 서울(국제)정원박람회가 올해 10주년을 맞이했다. 그간 박람회는 2015년 월드컵공원을 시작으로 여의도공원, 만리동 일대, 북서울의꿈의숲, 하늘공원 그리고 뚝섬한강공원까지 서울 곳곳에 공공 정원을 조성해왔다. 2025 서울국제정원박람회는 보라매공원에서 5월 22일부터 10월 20일까지 진행된다. 작년보다 규모를 확대했고, 디지털정원 등 새롭게 선보이는 정원문화프로그램을 비롯해 정원 산업전, 학술행사 등이 진행된다. 푸드트럭과 판매부스 운영, 공원 내 상행위 제한 완화 등을 통해 지역 상권과의 연계성을 강화했다. 이번 박람회는 서울시와 2025 서울국제정원박람회 조직위원회가 주최하고, 환경과조경과 동아일보가 행사 운영을 맡았다. 올해는 김영민 총감독(서울시립대 교수), 이가영(서울가드닝클럽 대표)과 송민원 부감독(엠디엘 대표)으로 구성된 실무 감독단을 통해 전문성 강화를 꾀했다. 박람회의 주제는 서울, 그린 소울(Seoul, Green Soul)로 40년 의 역사를 자랑하는 보라매공원 12만 평 전역을 111개의 정원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생태문화공간으로 조성했다. 국내외 전문가들이 조성하는 작가정원을 비롯해 다양한 주체들이 참여하는 동행정원(학생·시민·다문화가족), 작품정원(기업·기관·지자체), 매력정원 등 다양한 전시 정원을 선보인다. *환경과조경446호(2025년 6월호)수록본 일부
  • 정영선과 협업자들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이탈리아 베니스 순회전
    지난해 여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이하 정영선 전) 전은 조경이 대중에게 문화적 코드로 다가설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28만 명의 관람객이 전시장에 다녀갔고, 2024년 8월에는 국내 박물관·미술관 중 최초로 독일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2024’의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부문 최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정영선 전의 해외 순회전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정영선과 협업자들’(이하 정영선과 협업자들 전)이 산 마르코아트센터(San Marco Art Centre)(이하 SMAC)에서 5월 9일부터 7월 13일까지 개최된다. 이번 전시는 SMAC의 개관을 기념하는 초청 특별전으로, 한국-이탈리아 상호문화교류의 해(2024~2025)를 맞아 양국 간 문화 협력의 일환으로 마련됐다. 전시가 열리는 SMAC는 16세기 베니스 행정관청으로 사용됐던 프로쿠라티에(Procuratie)를 영국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David Chipperfield)가 리노베이션 한 건물이다. 정영선과 협업자들 전은 회복탄력성과 지속가능성을 주목했던 정영선 조경가의 작업세계를 중심으로 한국 고유의 정원과 경관 철학, 한국 근현대사와 맥을 같이 하는 조경의 역사를 이탈리아에 소개한다. *환경과조경446호(2025년 6월호)수록본 일부
  • [기웃거리는 편집자] 풍경의 말
    화재가 발생했을 때 집에서 꼭 한 가지 챙겨야 할 물건이 있다면 무엇일까. 당연히 값비싼 물건을 먼저 챙겨야 하겠지만, 값비싼 물건을 대체할 만큼 가치가 있는 물건 한 개를 고르라고 한다면 수집한 시집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시집에 애착이 생긴 건 순전히 그 노트 때문이다. 대학 시절 동아리방 책상 위에는 늘 노트 한 권이 놓여 있었다. 노트의 이름은 열린 마음. 그 이름 그대로 각자 적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적으면 된다는 원칙 아래 동아리 창립 때부터 전통처럼 내려오는 노트였다. 동아리방 한쪽 구석의 캐비닛에는 선배들이 적은 수백 권의 노트가 빼꼭하게 들어있었다. 나를 포함해 또래의 동기나 선배들은 주로 항간에 떠도는 소문이나 시험 정보, 소모임 모집, 사소한 고민과 푸념 등 신변 잡기의 이야기를 적어 놓는 게시판으로 활용했다. 어느 날 캐비닛 속 먼지가 뽀얗게 쌓인 선배들의 노트에 호기심이 생겨 창립 선배들의 노트를 읽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동기들과 함께 노트에 적은 내용들이 부끄러울 정도로 선배들의 치열한 고민과 세상을 향한 관점과 시선이 대단했다. 역사적으로 혼란스럽고 어두운 시기를 관통하는 가운데 진취적이고 열정적인 선배들이 강의실이 아닌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치열한 현장의 열기를 글로나마 엿볼 수 있었다. 선배들의 여느 산문가 못지않은 글쓰기 솜씨 덕분에 읽는 재미가 나름 쏠쏠했다. 탁월한 문장을 구사하는 선배들이 노트에서 인용했거나 추천했던 시집들은 모두 읽어보려고 노력했다. 그중 학교 도서관에서 빌렸던 시집에는 이런 메모가 첫 장에 적혀 있었다. “새벽은 밤을 꼬박 지새운 자에게만 온다. 꼬박 밤을 지새운 자만이 새벽을 볼 수 있다.” 그 시집을 추천했던 선배가 적은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시적인 문장 한 줄이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어쩌면 별것 아닌 문장일 수도 있지만 새벽과 같은 어둠을 숱하게 통과한 사람만이 말하고 쓸 수 있는 문장인 것 같아서 오랫동안 떠올랐다. 그때부터 시집을 모으기 시작했다. 언젠가 이해하기 어려운 시집을 내 것으로 완전히 소화하며 저런 비옥한 문장을 쓰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는 소망과 함께. 시집을 수집하면서 나름의 취향과 요령이 생겼다. 선호하는 시인선 중 하나는 바로 문학과지성 시인선이다. 이 시인선은 시인들 라인업도 좋지만, 표지 속 시인들의 자화상 캐리커처가 귀여워서 괜히 더 눈길이 갔다. 특히 맨 뒷표지 네모 박스에 실리는 글이 맘에 들면 종종 시집을 샀다. 시도, 산문도 아닌 형태의 글을 통해 시와 시인을 나도 모르게 상상하며 그려보기도 한다. 가령 “쌓이지 않을 만큼 내리는 눈을 쓸고 있다”(각주 1)와 같은 문장을 읽으며 ‘시’라는 싸리눈을 정성스럽게 쓸고 있을 시인의 마음은 어떤 것일지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래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600호 기념 『시는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간다』가 출간됐을 때 참 반가웠다. 이 책은 뒷표지 글을 시 자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의 말’로 정의하며 501호부터 599호에 실린 시의 말을 정리했다. 지루한 스펙의 나열이 전부인 쇼핑용 카탈로그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지만, 감각적인 문장들 덕분에 읽는 내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시집을 사고 싶은 맘이 들게 하는 쪽을 연신 접다가, “숲이 흔들리면 바람이 된다”와 같이 감각적인 문장에서는 나도 모르게 잠시 감탄했다.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바람에 흔들리는 어느 먼 숲의 풍경을 본 날을 떠올리며. 시의 말이 나를 시의 세계로 이끌었던 것처럼 잡지의 맨 첫 꼭지로서 독자들을 잡지의 세계로 데려 왔던 연재 ‘풍경 감각’이 이번 호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환경과조경』 에디터로서 처음 편집했던 원고였고, 매월 담당 편집자이자 원고를 맞이하는 가장 첫 번째 손님으로서 늘 기쁘게 읽었다. 한 독자는 이 연재를 잡지의 시작을 알리며 여는 창문 같다고 했는데, 내게는 ‘풍경의 말’과 같았다. 시가 가진 고유한 목소리를 담아 시와 시인의 세계를 그리게 하는 시의 말처럼 이 원고를 읽으며 편집하는 시간은 각 풍경이 가진 고유한 목소리를 감각적으로 그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매월 다가오는 마감이 쉽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단 한번의 지각없이 매번 정성스러운 글과 그림을 보내준 조현진 작가에게 담당 편집자로서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각주 정리 1. 최정진, 『버스에 아는 사람이 탄 것 같다』, 문학과지성사, 2020
  • [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정원은 자연의 풍경들을 특별하게 꿰어 맞추어 또 다른 아름다운 풍경을 만드는 일의 산물이다
    바삭거리는 소리가 듣기 좋은 두부과자를 즐겨 먹고 있다. 얼마 전 부여를 다녀오며 얻어온 것인데, 씹을 때마다 부여 알밤의 단맛이 옅게 풍긴다. 맛이 좀 심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끊임없이 주워 먹다 보면 금세 동이 난다. 은은한 분위기의 부여와 제법 닮은 맛이다. 돌연 부여로 떠나 잘 알지도 못하는 도시 이곳저곳을 둘러보게 된 건 그륀바우의 김인수 소장 덕분이다. 처음에는 좀 심드렁했던 것도 사실이다. 너도나도 정원을 외치는 시대에 숨겨져 있지만 꼭 주목해야만 하는 부여의 동네 정원들을 보여주겠다는 제안은 예쁜 수사를 붙여 볼만하게 꾸민 초대장 같기도 했다. 하지만 기대하는 마음도 컸던 건, 귀한 것을 발견해내는 김인수의 눈썰미와 정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정보 없이 어떤 지역의 맛집 가이드북을 만들어야 한다고 상상해보자. 그것도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맛집 가이드북. 막막하기 그지없다. 지도를 펼쳐야 하나, 우선 인터넷에 접속해 유명한 맛집 목록을 만들어야 하나, 상상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힌다. 김인수의 숨은 정원 찾기 전략은 간단한 것 같지만 사실은 쉽지 않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우선 그 지역과 친해진다. 낯설지 않게 느껴질 때까지 곳곳을 누빈다. 그러다 담 너머의 풍경이 궁금해지면 문부터 두드린다. 한번의 방문에 그치지 않는다. 인터뷰도 불사한다. 보고, 듣고, 쓴다. 오늘은 정원을 찾아야지 하는 마음가짐으로 나서는 게 아니다. 그의 기록 생활은 일상에 아예 녹아들어 있다. 그렇게 김인수는 『정원도시 부여의 마을 동산바치 이야기』(목수책방, 2022)와 『서울 골목길 비밀정원』(목수책방, 2023)을 펴냈다. 안내를 따라 둘러본 부여는 참 신기한 곳이었다. 고요하고 모든 것이 낮고 부드럽게 흘렀다. 궁남지는 낮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하늘을 찌를 듯 솟은 산등성이는 없었다. 고운 천을 구겨 만든 곡선이 사비성을 감싼 듯했다. 질주하는 자동차나 오토바이를 보기 힘들었고, 모든 길은 보행자와 자전거에게 다정했다. 그 때문에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러 군데군데 고여 있는 곳처럼 느껴졌다. 김인수가 부여를 새 삶의 터전으로 잡은 것은 4년 전이지만, 만나는 사람들 모두 그를 부여 토박이보다 부여를 속속들이 아는 사람이라 말했다. 숨은 정원을 찾아 느릿한 풍경 사이를 종종걸음으로 걸어 다니는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함께 탐방한 정원 대부분은 전문가의 손길보다는 정원의 가꾼 이의 취향과 생활의 풍경이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곳들이었다. 대중없이 늘어진 화분들이나 작물이 거칠게 자라고 있는 텃밭, 빨래 건 조대와 갖은 폐목들이 군데군데 놓인 정원은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어떤 정원들보다 생활감이 느껴졌고 그래서 가꾼 이들의 진심이 와 닿았다. 가장 가까이에 둔 초록의 땅을 더 편리하고 아름답게 꾸리려는 작은 지혜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평범한 단어들이 연결되어 아름다운 시가 만들어지듯이 정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자연의 풍경들을 아주 특별하게 꿰어 맞추어 또 다른 아름다운 풍경을 만드는 일의 산물”(『서울 골목길 비밀정원』 중)이라는 설명이 딱 어울렸다. 가장 재미있던 건 정원이 주변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김인수는 식물 가꾸기는 한 개인의 삶을 넘어 마을 공동체에도 영향을 준다고 말했는데, 실제로 마을 동산바치의 집 주변으로 빈 땅을 정원으로 가꾸려는 시도를 한 가구가 여럿 보였다. 자연스럽게 따라한 경우도 있었고, 정원을 만들며 불어난 꽃과 식물, 씨앗을 주변에 나눠준 동산바치도 있었다. 길가나 집 밖 공터에 꽃창포가 자라고 있는 게 신기해 김인수에게 물었더니, 그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해마다 유행처럼 번지는 식물이 있다고 답했다. 지역의 원예 상가가 중점적으로 파는 식물이 마을 경관에 영향을 미치는지도 모르겠다는 추측도 흥미로웠다. 개인이 꾸리는 정원이 정원도시의 기반이 될 수 있을지, 아름다운 백마강을 어떻게 하면 가치 있는 국가정원으로 만들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김인수의 기록들이 정원의 가치를 보여주는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는 건 분명하다. 정원을 만들며 몸과 마음을 치유 받고 행복해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두 권의 책에 빼곡하다. 그들은 한결같이 정원 가꾸기가 노동과 동의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행복하기에 계속 정원을 꾸려나가겠다고 말했다.
  • [PRODUCT] 도시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는 브리가 쾌적한 도시 환경을 제공하는 스마트 셸터
    도시의 삶은 전보다 윤택해졌지만, 기후 위기가 심각해지면서 미세먼지 등 다양한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현대의 쉼터는 단순히 휴식을 취하는 공간 개념에 머물지 않고, 자연 친화적 공간으로서 시민들에게 쾌적한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세인환경디자인의 스마트 셸터 ‘브리가(BRIGA)’는 스마트 기술이 결합된 공기 정화 시스템을 통해 쾌적한 도시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스마트 셸터는 공기 정화 시스템, 시스템 루버 등 다양한 스마트 기술을 적용해 최적의 환경 속 청정한 휴식을 제공한다. 셸터 내부의 미세먼지 농도가 외부에 비해 최대 70%까지 감소하는 등 효과적인 공기 정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공기, 날씨 등 환경 변화에 따라 개폐가 되는 시스템 루버를 통해 최적의 내부 환경을 유지한다. 통합 컨트롤러는 내부 환경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며 사용자의 입실, 퇴실을 감지해 공간의 에너지를 조절하며 효율적인 에너지 사용을 돕는다. 내부 디스플레이는 날씨, 온도, 내외부의 미세먼지 수준 등 다양한 기후 정보를 시민들에게 편리하게 제공한다. 브리가는 자연과 시민을 연결하며 자연 친화적인 휴게 환경을 구축한다. 내부의 깨끗한 공기와 루버를 통해 들어오는 햇살, 그리고 스마트 기술이 어우러진 스마트 셸터는 도시 속에서 자연의 숨을 경험하게 할 것이다. 이러한 공간은 라이프스타일과 스마트 기술이 결합된 스마트 인프라의 새로운 기준이 될 것이다. TEL. 02-877-8811 WEB. www.seindesig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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