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축비평지 『건축평단』 창간
국내외 건축가·건축지식인 25인의 좋은 건축 해명
본격 건축 비평지인 『건축평단』의 창간호(2015 봄)가 출간되었다. 조경과 건축 등 분야를 막론하고 비평서와 전문지의 자리를 찾기 어려운 요즈음, 국내외 건축가·건축지식인 25인이 의기투합해 이미지 한 컷 없이 텍스트로만 이루어진 300여 쪽 분량의 비평지가 새로출발했다.
좋은 건축이란 무엇인가
창간호의 특집 주제는 ‘좋은 건축이란 무엇인가’다. 편집인 겸 주간인 이종건 교수(경기대학교 건축설계학과)는 여는 글에서, 이 본질적인 질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적잖이 당혹해했다고 밝히고 있다. 건축을 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숙고해야 할 질문이겠지만, 마치 무엇이 좋은 삶인지 규명하기 어려운 것처럼 쉽사리 대답하기 어려운 물음이다. 『건축평단』의 첫 번째 글은 건축이론가이자 평론가 김영철이 ‘좋은 건축’을 논의하기에 앞서, ‘건축이란 무엇인지’를 하이데거의 사유에 기대어 해명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김성홍 교수(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를 비롯한 국내외 건축가·건축지식인들이 ‘좋은 건축’에 대한 견해를 짧게 전개해 나갔다. 건축가 파블로 카스트로Pablo Castro는 흑색파 건축가들을 통해, ‘좋은 건축’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우회적인 방식으로 제시한다.
건축 교육과 관련된 두 가지 질문도 눈길을 끈다. 건축이론가 닐 리치Neil Leach는, 글로벌한 새로운 건축 상황과 점점 나빠지는 로컬 건축 교육 시장에 제대로 응전하기 위해, 건축교육 인증제를 폐기하고, 건축 설계교육의 방향을 바꿀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건축가 서재원(aoa architects)은 대학 설계 교육 현장에서 흔히 벌어지고 있는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자신의 교육 방식을 내어 놓고 있다. 그 뒤를 이어, 시인이자 건축가인 함성호는 ‘새로움에 대한 강박증’을 풀어내었고, 이종건은 그의 이슈를 이어받아 ‘우리 건축의 새로움 강박증’에 대해 전개한다. 그밖에도 『건축평단』의 한편에서는 ‘감동에 얽힌 건축’, ‘건축의 한계 혹은 역능’, ‘도발, 건축가의 내면’ 등의 주제를 연재 형식으로담고 있다.
『건축평단』의 여름호 주제는 ‘건축가 그/녀는 누구인가’다. 가을호에는 ‘건축의 도시성’을, 겨울호에는 ‘건축의 역사성’을 주제로 이어가, 올 한해는 건축의 네 가지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본질적인 문제에 천착할 예정이다. 기본적인 내용이라 오히려 잘 언급되지 않았고, 그 결과 건축가라는 직능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주제다. 내년부터는 한국의 설계(작품)를 평가하고 이를 어떻게 역사화할 것인지, 또 건축서가 출간되면 비판적으로 개입하는 등 본격적인 비평에 돌입할 것이라고 한다.
『건축평단』의 지향은, 한국 건축 사회에 비평 문화가 건강하게 착근될 수 있도록 육성하는 것, 일회성에 그친 비평·평론이 지니는 문제들을 극복하고, 전문적 식견이 배제된 채 반복된 매체 노출로 가치가 매겨지는 대중영합주의에 대항하는 것이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탁월한 건축 업적을 끈질기고 엄격하게 탐문·탐구·논구함으로써, 한국 현대 건축의 역사를 온당하게 일구어나가고자 한다. 한국 건축이 창발적인 힘을 더 가질 수 있도록, 지적이고 감성적인 차원에서 좋은 자극제가 될 수 있는 자원을 발굴하고자한다.
이종건 교수는 “이 책의 존재 자체가 사회에 대한 비평”이라고 강조한다. 대중은 쉽게 요약된 글과 이미지를 선호하는데 온전히 텍스트만으로 이루어진 비평서를 낸다는 것, 그리고 자본가 없이 완벽하게 자본으로 부터 독립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처음부터 건축의 핵심부를 겨냥했다. 독자의 많고 적음이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독자를 타깃으로 삼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이종건 교수의 답이다. 그러나 책이 출간되기 전 이미정기구독자가 모였고, 출간 후에도 지속적으로 구독자수가 늘어가고 있다며 지속가능성에 대한 희망도 내비쳤다.
비평가 커뮤니티
『건축평단』은 건축 비평가 커뮤니티인 건축비평공동체가 꾸려지며 탄생했다. 이 공동체에서는 이종건 교수를 비롯해 강권정예(편집장, 정예씨(JEONGYE publishing Company) 대표)와 김영철(군자헌 건축이론연구소 대표), 김원식(건축·도시 역사학자), 이상헌(건국대학교 건축대학원 교수), 함성호(건축실험집단 EON 대표)가 편집위원을 맡았다. 김인성(영남대학교 가족주거학과 교수), 김현섭(고려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박성용(이가종합건축 실장), 송종열(건축비평가), 이경창(건축비평가), 임성훈(동명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전진삼(건축비평가, 와이드AR 발행인 겸 간향미디어랩 대표) 등은 운영위원을 맡았다. 이커뮤니티는 열린 공동체로 누구라도 참여하여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으며 한국 건축 사회의 공론장을 형성해 나가는 것을 꿈꾼다.
건축비평공동체 건축평단은 정림건축문화재단과 함께 한국 건축의 주요 이슈와 쟁점을 10회의 집담회를 통해 공론화할 예정이다. 그 첫 번째 집담회는 『건축평단』의 창간을 기념하며 ‘세월호 이후의 건축’을 주제로 3월 21일 열렸다. 앞으로 매월 마지막 토요일이면,건축비평공동체 건축평단, 정림건축문화재단, 토요건축강독, 한양대학교 동아시아건축역사연구실의 기획 및 주최로 토요집담회가 열릴 예정이다. 이 집담회에서는 한국 건축의 주체성과 정체성, 전통, 지역성과 보편성, 개인성과 공공성, 동시대 건축가의 생존주의, 지향점과 한계, 순수 건축 등 ‘한국 건축’ 전반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고 심화해 나갈 예정이다.
장기적 계획을 묻는 질문에 이종건 교수는 2017년 서울에서 열리는 세계건축가연맹UIA 세계건축대회 조직위원회에 세계 비평가들이 연계하여 성과를 나누자고 건의할 계획이라고 답했다. 이를 기폭제로 삼아 우리나라의 건축비평가들이 연합할 수 있는 일종의 비평가협회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향후 건축비평공동체의 행보가 주목된다.
-
‘대규모 계획, 그 이상’ 국제 컨퍼런스
새로운 도시 계획 방향과 세운상가 재생 사업
지난 3월 12일부터 15일까지 ‘대규모 계획, 그 이상 Beyond Big Plans(BBP)’ 국제 컨퍼런스가 개최되었다. 이번 컨퍼런스는 박소란(WeLoveTheCity, 도시계획가·건축가), 박혜리(KCAP, 도시계획가·건축가), 강빛나래(델프트 공과대학교 PhD 연구원)가 기획하고, 국제도시지역 계획가협회International Society of City and Regional Planners(ISOCARP)와 걷고싶은도시만들기시민연대가 주최했다. BBP 국제 컨퍼런스는 최근까지 도시 개발의 주를 이루었던 마스터플랜을 통한 ‘대규모 도시 개발’방식에 의문을 던지며, 세운상가를 주제로 국내외 도시계획 및 개발 관련 전문가들이 모여 앞으로의 도시개발 방향과 그 이행 전략을 다양한 각도에서 탐색하는 자리로 마련되었다. 특히 최근 서울시에서 추진 중인 ‘세운재정비촉진지구 변경안’1과 ‘세운상가 활성화를 위한 공공공간 설계 국제공모’와 맞물려 관련 분야 전문가들과 일반 시민들의 많은 관심을 모았다. 컨퍼런스 첫 날인 12일에는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아홉개국 열다섯 명의 도시계획 전문가의 주제 발표와 관련 토론으로 구성된 심포지엄이 개최되었으며, 마지막 날인 15일에는 국내외 60여 명의 전문가들이 세운상가를 대상으로 한 워크숍 결과를 발표했다. 심포지엄은 세 개의 세션으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 세션은, ‘도시계획을 재구성하자!Let’s Reinvent Planning!’는주제로 도시 개발 과정에서 개발의 스케일과 개발 과정에서의 시민과 전문가의 역할 재정립 등에 대한 논의로 꾸며졌다. 두 번째 세션, ‘세운이야기Sewoon Story’는 컨퍼런스 이튿날부터 진행되는 전문가 워크숍 대상지인 세운상가 지역을 역사·사회·문화·경제적 관점에서 되짚어보며, 세운상가 재생 사업의 현재를 되돌아보고 대안적인 접근에 대한 화두를 던졌다. 세 번째 세션은 ‘다른 도시에서 배우다Learning from Cities’라는 주제에서 알 수 있듯이 세계 각 도시의 사례를 중심으로 여러 도시계획 전문가와 학자들의 경험을 들을 수 있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도시계획의 새로운 태도
첫 번째 세션에서 케이스 크리스티안서Kees Christiannse 교수(취리히 공과대학교, KCAP 설립자)는 ‘로프트 시티loft city’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Matryoshka처럼 크고 작은 스케일의 계획이 중첩된 구조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존의 대규모 계획이 기능에 따라 조닝을 했다면, 이제는 프레임워크 안에서 작은 규모의 계획, 즉 지역별 특색에 따라 다양한 용도와 스케일의 개발이 섞여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대규모 지역을 마스터플랜에 따라 개발한다면 자본의 흐름에 따라 위험부담을 안게 되므로 작은 규모의 점진적 개발을 통해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진 두 개의 주제 발표는 도시 개발 과정의 주체와 그들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었다. ‘회복력 있는 도시를 넘어Beyond Resilience’라는 주제로 발표한 제프 헤멀Zef Hemel 교수(암스테르담 대학교)는 ‘집단 지성’을 강조했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계획의 가장 큰 문제는 비전문가라는 이유만으로 시민들을 계획 과정에서 배제해 온 것”이라며, “전문가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식의 태도로 수백 수천 아마추어의 아이디어를 수용하지 않는 계획은 성공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위키피디아Wikipedia를 예로 들며, “온라인상의 열린 플랫폼에 (옳고 그른) 많은 생각이 모이고, 각각의 아이디어가 서로를 고쳐주는 과정에서 더 나은 지식이 완성” 된다며, 도시계획 과정이 더 나은 아이디어를 고르는 것이 아닌, 많은 아이디어를 축적하는aggregate 과정자체가 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는 이렇게 축적된 아이디어를 가치 있게 만드는 중계자moderator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발표자로 나선 요르크 슈톨만Jörg Stollmann교수(베를린 공과대학교) 역시 주제발표, ‘생산적인 공통의 기반을 위한 가치 발견Mining Value for Productive Common Ground’에서 “시민을 전문가로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며 헤멀 교수와 의견을 같이 했다.
세운상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세운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두 번째 세션에서 안창모 교수(경기대학교)는 ‘20세기 세계사적 관점에서 바라본 세운상가에 대한 역사·도시적 평가’를 주제로 발제를 진행했다. 안 교수는 아시아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 이후 소개도로의 슬럼화, 그리고 이를 타개하기 위한 도심재개발사업의 결과로 탄생한 세운상가를 냉전 체제의 산물이자 과거 현대 건축의 상징으로 정의 내리며 그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한때 도심 상권의 번영을 주도했던 세운상가는, 강남 개발, 명동백화점 상권 부활, 도심부적격산업의 이전 등으로상권이 이탈하면서 현재 도심 속 흉물로 남았다.
이충기 교수(서울시립대학교, 세운상가 활성화 계획 총괄계획가)는 현재 서울시에서 추진 중인 세운상가 재생 계획Sewoon Regeneration Plan에 관해 설명했는데, 세운상가를 재생하려는 시도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1995년부터 2007년까지 서울시가 진행한 일련의 도심부 발전 계획에는 세운상가를 전면 철거한 뒤, 그 공간에 녹지축을 조성하고 주변을 대규모로 개발한다는 계획이 지속적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이 교수는 “매번 계획에 포함되던 녹지축은 주민들의 이주를 필요로 했기에 큰 반대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며, 수차례에 걸쳐 변경된 세운상가 활성화 계획이 매번 실행되지 못했던 이유를 설명했다. 이에 서울시는 2013년 3월에 이르러 세운상가 건물군을 존치하고 주변 역사문화자산과 기존 산업 클러스터군을 활용하는 점진적 재생 개발 사업으로 방향을 선회하게 되었다. 세운상가 존치 결정 이후 진행 중인 점진적 성격의 재생 사업은 크게 ‘활성화 프로그램’, ‘산업 생태계 지원 보전’, ‘입체보행 네트워크’의 세 가지로 구성된다. 그 첫 사업으로 종로에서 퇴계로까지의 전 구간에 대한 마스터플랜을 수립하고, 1단계로 공공의 영역인 종묘 앞 종로의 광폭횡단보도, 복합문화공간인 광장, 3층 레벨의 보행데크, 청계천 상부의 공중 보행데크, 1층 주차 공간과 보행공간을 아울러 입체보행네트워크를 구축할 계획이다.
이충기 교수는 서울시에서 “이와 관련해 ‘초록띠 공원’의 복합 문화 공간화, 공중 보행로를 통한 주변 지역연계, 청계천 주변을 연결하는 수직 보행 네트워크 개발 등을 계획하고 있다”2고 밝혔다. 한편 이동연 교수(한국종합예술종합학교)는 1980년대 세운상가를 중심으로 형성된 기술하위문화적 유산―1980년 대 초반에 애플 복제 컴퓨터와 홈비디오가 호황을 누리며 세운상가 주변에는 청년 기술마니아들과 록메탈 등 불법 복제된 LP 음악과 성인 에로비디오를 구하러 온 하위문화 주체들이 모였다―에 대해 설명하면서 향후 세운상가의 재생을 위해서는 건축 및 도시공학적 계획뿐만 아니라 문화적 자원을 통한 창조적 기획이 필요함을 설명했다.
이어진 토론에서는 세운상가 활성화 계획과 관련해 보다 심층적인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좌장 이영범 교수(경기대학교)는 청계천 복원 사업(2005년 완료)과 세운상가의 초록띠공원(2009년 조성)이 만들어진 배경을 설명하며, 공공성의 가치를 내세워 역사적 건축물을 철거하고 공원화했던 과거 서울시의 행정 방식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세운상가 활성화 계획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 섞인 질문을 던졌다. 안창모 교수는 “청계천 복원 사업 대상지의 대부분이 공공(서울시)의 소유였다는 점에서 대상지의 대부분이 민간소유인 세운상가 활성화 사업과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다”며 정책적으로 큰 변화라는 의견을 밝혔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업이 마치 세운상가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공공 소유의 ‘길’에 국한된 것이며, 민간의 요구가 있을 때만 정부 차원의 보조가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서울시가 추진 중인 세운상가 설계공모가 여전히 빅플랜(마스터플랜)을 요구하면서 ‘사적 영역’을 계획에 포함시키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이충기 교수는 설계공모를 두고 “지속적인 세운상가 산업 쇠퇴에 제동을 걸기 위한 조치”라며, 서울시에서는 공공이 할 수 있는 사업을 부분적으로나마 시행함으로써 세운상가에 활력을 불어넣고 그 과정에서 민간 수준의 갈등 해소도 기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서 세운상가 활성화 사업과 같은 재생 사업에서 고려될 수 있는 ‘서브컬처sub-culture’, 즉 활성화 과정에 문화예술을 결합하려는 노력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졌다. 이동연 교수는 문래예술공장의 예를 들면서 “서브컬처를 접목시키려는 시도는 고무적이지만, 예술이 산업 클러스터를 점유하고 독점하지 않도록 경계해야한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그 방안으로 기존 산업체와의 자재 선순환을 고려한 문화예술산업 도입,장인들의 기술을 접목할 수 있는 콘텐츠 산업 개발 등을 꼽았다.
다른 도시에서 배우다
세운상가에 대한 논의 후 이어진 세 번째 세션에서는, ‘대규모 계획’을 대체할 수 있는 세계 여러 도시의 실험적 사례들이 소개되었다. 안드리스 헤이르서Andries Geerse 위러브더시티WeLoveTheCity 대표는 네덜란드디벤터 시City of Deventer의 예를 들며, 전문가의 역할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시민들의 거친 아이디어가 실현될 수 있는 적당한 공간을 제공해주고, 그들이 표현해내지 못하는 것을 정교하게 시각적으로 대신 표현해주는 역할에서 전문가의 역량이 발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셩밍 우ShengMing Wu 홀+아키텍트Whole + Architects 대표는 타이의 프로젝트를 소개했다. 그는 “우리(건축가)만의 언어로는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 시민들에게 (도면이 아닌 그림을 이용해) 시각적으로 보여주면, 우리의 제안이 어떤 점에서 잘못되었고, 어느 부분에서 개선될 수 있는지 쉽게 지적한다”며 헤이르서 대표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빌럼 코릇할스 알터스 Willem Korthals Altes 교수(델프트 공과대학교)는 ‘대규모 계획’에서 연속된 ‘작은 계획’으로 전환된 세 개의 네덜란드 도시계획 사례(Amsterdam IJ Waterfront, Amsterdam Zuidas, Utrecht Centrum)를 들어 작은 계획이 연속적으로 수립되는 것이 큰 계획에 비해 효과적이고, 실현 가능성이 높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대규모 계획은 구현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대부분 측정된 예산보다 많은 돈을 필요로 하며, 계획 대상지는 완성될 때까지 이용이 불허되는 등 많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전문가 워크숍
15일에는 심포지엄 이후 세운상가 개발 사업과 관련한 전문가 워크숍 최종 발표가 있었다. 이날 오전까지 이어진 3일간의 워크숍은 토지, 시간, 자본 및 투자, 개발방향, 산업 주체, 등 다양한 내용을 아우르는 일곱 개의 주제로 진행되었으며, 두 시간에 걸친 최종 발표 후시민 질의응답 및 워크숍 최종 요약 등이 이어졌다. 일곱 개의 팀으로 나누어 워크숍 발표가 진행되었고 전문가들의 분석과 관련 제안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이압축되었다.
“기존의 완전 철거 방향에서 선회한 것은 좋은 선택으로 보이나, 아직 작은 계획의 스케일의 적정성이나 섬세함에서는 부족함이 느껴진다”는 의견, “새로운 계획에서 지정한 건축 용적률이 지나치게 높기 때문에, 비율을 낮추거나 단계적·전략적으로 높여가야 한다”는 의견, “(공중보행로 사업에 대해) 공간을 연결하는 것은 다양한 연결을 가능하게 한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나 새로 창출될 공간에 ‘무엇을 채워 넣을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는 의견”, “현재 존재하는 산업 클러스터들의 연결고리를 파괴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견, “여러 산업 군과 주변 지역을 포함해 하나의 큰 창조적 산업 클러스터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의견 등이 주를 이루었다.
한편, 3월 12일부터 22일까지 11일간 서울시청 시민청 갤러리에서는 ‘에이징 드래곤aging dragons’이라는 제목의 도시·건축 전시회가 진행되기도 했다. 이번 전시회는 국제 컨퍼런스와 연계해 준비된 것으로서 홍콩, 서울, 싱가포르, 방콕, 그리고 도쿄를 중심으로 아시아 선진 도시의 성장과 그 이면을 담았다.
지난 10여 년간 서울에서 시도된 야심찬 대규모 도시개발 사업들이 최근 변경되거나 취소되고―뉴타운 재개발 수습방안 발표 및 7개 구역 해제(2012), 용산업무지구개발사업 취소(2013), 세운재개발촉진지구 변경(2013)― 다수의 아파트 단지가 미분양된 채 남아있는 등 그동안 제기되었던 도시개발 방식에 대한 의문이 더욱 공고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번 컨퍼런스는 이러한 의문에 답하려는 시도와 함께 ‘더 나은 도시 개발 방식’을 고민하고, ‘세운상가의 미래’를 가늠해보고자 했다. 12개의 다양한 주제 발표와 토론, 그리고 전문가 워크숍까지 진행되었지만, 마지막 날 최종 종합에서 언급된 것처럼 “한 번에 뚜렷한 방향성을 제기하기에는 어려운 문제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세운상가 활성화 계획’의 현재 진행 상황과 개발 방향이 시민과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와 공유되었다는 점에서 이번 국제 컨퍼런스가 세운상가를 위한 ‘대규모 계획, 그 이상’의 시발점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
적은 차 환경이 만드는 도시의 미래
헤리티지 투모로우 프로젝트 5
젊은 건축가들이 그리는 ‘더 나은 도시’는 첨단으로 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시민의 아날로그적 생활양식을 향수하고 이를 창의적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자가용 없는 미래 도시’를 구상했다. 지난 3월 7일, 재단법인 아름지기(이사장 신연균), 월드컬처오픈 화동문화재단이 주최하고 중앙일보와 서울시가 후원하는 설계 아이디어 공모전 ‘헤리티지 투모로우 프로젝트 5Heritage Tommorrow Project 5’의 수상작이 발표됐다. 2009년 처음 개최된 이래로 올해 5회째를 맞은 ‘헤리티지 투모로우 프로젝트’는 ‘적은 차 나은 도시Less Cars, Better City’라는 주제로 ‘가까운 미래, 이동 수단과 교통 시스템의 발전으로 변화할 도시의 이상적 모델’을 찾기 위해 함께 고민했다. 전진홍·최윤희(B.A.R.E)의 ‘도킹시티’가 1등상인 ‘헤리티지 투모로우’상을 수상했다. 2등상 ‘헤리티지 스피릿’상에는 김대천·한지수(sum_Lab)의 ‘공공공장’과 조준호·권현정(아뜰리에 엑스빠스)의 ‘새로운 패러다임, 반응하는 도시’가 선정되었고 3등상 ‘헤리티지 챌린지’상에는 우태식(UA_Tectonic Space)의 ‘도심 보행네트워크의 회복을 위한 블록 접속 장치’, 이경택·이동희(BASEMENT BASE)의 ‘서울 피노키오’가 선정되었다. ‘헤리티지 투모로우’상 수상팀에게는 상금 800만 원,‘헤리티지 스피릿’상 수상팀에게는 각각 상금 500만원, ‘헤리티지 챌린지’상 수상팀에게는 각각 상금 300만 원이 수여되었다. 수상작은 통의동 아름지기 사옥 1층에서 3월 7일부터 4월 5일까지 전시되어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세 번의 워크숍, 치열한 고민
이번 헤리티지 투모로우 프로젝트는 참가팀이 완성된 형태의 작품을 제출하는 기존 공모전 방식에서 벗어나 참가자, 심사위원, 시민이 함께 모여 토론하고 아이디어를 발전시켜나가는 과정 중심의 ‘워크숍’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김봉렬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총장)가 운영위원장을, 조민석 대표(매스스터디스)와 박경 교수(캘리포니아 대학교 시각미술과)가 심사위원을 맡아 작품 심사와 워크숍을 함께 했다. 1차 선발 과정에서 제안서 아이디어가 훌륭한 팀을 2차 워크숍 과정으로 초대해 세번의 세션을 가졌다. 세 번의 워크숍을 거치며 참가팀들은 작품 디자인뿐만 아니라 새로운 교통 및 운송 수단에 대해서 고민하기도 하고, 혁신적인 경제 시스템을 고안하기도 했으며, 세계 여러 나라의 사례를 연구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공공공장’의 슬라이드 웨이 아이디어를 발전시킬 방안을 논의하며 홍콩의 미드 레벨에스컬레이터, 코펜하겐의 시켈슬랑엔의 사례를 참조하여 필요에 따라 고가 도로를 미학적 방식으로 도입하는 아이디어도 제시되었다. 요구르트 아줌마의 카트에서 영감을 얻은 ‘도킹시티’의 새로운 이동 수단, ‘아이-고’는 워크숍에서 심사위원과 패널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세그웨이의 ‘로-테크’ 버전을 보는 것 같다는 평과 비탈길의 문제를 해결하는 적정 기술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 같다는 평 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됐다. 조민석 대표는 “결과물도 중요하지만 공통 관심사를 근거로 한 다양한 제안이 충돌과 교류를 통해 발전되는 과정 또한 소중했다”며 그간의 과정에 의미를 부여했다.
헤리티지 투모로우 수상작
이번 공모전의 참가팀들은 저마다 원하는 대상지를 선택해 개성 있는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 전진홍·최윤희의 ‘도킹시티’는 이태원의 우사단로를 대상지로 삼았다. 다른 팀들은 ‘나은 도시’를 위한 ‘적은 차’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고민하는 반면, ‘도킹시티’는 이미 물리적인 제약(비좁은 도로, 가파른 경사, 비포장 도로 등)으로 인해 차량의 수가 자연적으로 줄어든 대상지가 과연 더 나은 도시 환경을 제공하고 있는지 질문을 던진다. 우사단로 일대는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한강대로 변에 유일하게 남은 달동네다. 좁고 가파른 경사지로 인해 이곳을 통행할 수 있는 대중교통 수단은 마을버스뿐이다. 그나마도 좁은 골목에 심각한 교통 체증을 유발한다. 한강을 내려다보는 대상지의 가파른 경사지, 골목골목에 형성된 다양한 계층과 문화 거뮤니티에 매력을 느꼈다는 전진홍·최윤희 팀은 도로를 넓히고 평탄하게 만드는 대신 이곳의 단점이자 매력을 그대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했다. 자가용 대신 우사단로 일대를 자유롭게 통행하는 오토바이, 요구르트 카트, 이동식 포장마차 등 개인 이동 수단의 이용 행태를 관찰하고 미래의 대체 교통수단 모델을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도킹시티’는 도로시스템인 ‘5 Go System’을 제안한다. 미래의 이동 수단으로 제시된 전동식 개인 스쿠터 아이-고Ai-go, 이동과 설치가 편리한 트레일러 위-고We-go와 수직적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엘리베이터 버티-고Verti-go, 아이-고를 타고 이동할 수 있는 나선형 슬라이드 돌-고Dol-go, 가파른 경사지와 계단, 언덕을 쉽게 오를 수 있게 하는 에스컬레이터 업-고Up-go 등이다.
한편 김대천·한지수 팀의 ‘공공공장’은 쇠락해가고 있는 가구 공장 단지인 아현동 일대를 대상지로 삼았다.구릉지를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슬라이드’라는 새로운 도로와 순환 체계를 고안해 자동차 이용을 필수적으로 수반하는 아웃소싱을 줄이고 인소싱이 가능한 커뮤니티를 만드는 방안을 구상했다. 단순히 편리한 도로 체계를 고안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 커뮤니티를 구상했다는 점에서 사회 구조 전반을 통찰하는 안목을 보여주었다.
조준호·권현정 팀의 ‘새로운 패러다임, 반응하는 도시’는 신사동 가로수길 일대를 대상지로 삼았다. 대상지 각 구역의 용도에 따라 세심하게 고려한 맞춤 대안(전기자전거 셰어링 시스템, 자동차 셰어링 시스템, 시간 선택제를 대입한 탄력적 보행자 도로, 움직이는 정원 등)을 제시했다. 우태식의 ‘도심 보행 네트워크의 회복을 위한 블록 접속 장치’ 프로젝트는 무교동, 다동, 을지로입구역 주변지역을 대상지로 선정했다. 하나은행 건물의 입면을 개방해 공공 공간을 조성함으로써 맛집 골목을 걷고 싶은 거리로 개선하고, 을지로입구역과 청계천까지 연결시키는 것이 핵심이다. 차로로 인해 단절된 인도를 지하 저·중층부를 이용해 연결하고 자유로운 보행 환경을 조성한다.
이경택·이동희의 ‘서울 피노키오’는 강남 대치동 은마아파트를 대상지로 아파트키드의 추억을 향수한다. 은마종합상가 위에 인공 대지를 올려 4,000여 대를 수용할 수 있는 주차장을 조성하고 아파트 옥상에는 각 동으로 이어지는 케이블카를 연결한다. 자동차로 점령된도로, 노후한 아파트 단지의 미래를 블랙 조크와 버무려 제시한 점이 흥미를 끈다.
헤리티지 투모로우 5의 수상작은 서울의 다양한 구역에 ‘더 나은 도시’를 위한 각기 다른 해법을 제시한다. 수상팀들은 자동차와 보행자를 이분법적인 시각에서 보지 않고 때로는 공모전의 주제인 ‘적은 차 나은 도시’에 질문을 던지기도 하며 해법을 고민했다. 교통 시스템, 경제, 커뮤니티, 새로운 이동 수단 등 다양한 논의가 각각의 작품 안에서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산만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산발적인 다양한 논의를 통해 신선하고 창의적인 미래 도시를 구상하고자 한 참가자들의 열의가 느껴졌다. 박경 교수는 이번 공모전의 수상작들에 대해 “저마다 그곳만의 경관을 담고 있는 장소를 대상지로 삼아 앞으로 서울의 자동차 의존도가 낮아졌을 때의 다양한 모습을 상상하게 해주었다. 각 프로젝트는 대상지의 특수한 상황을 집중적으로 다루었지만 현재의 도시 문제를 야기하는 많은 이슈를 함께 공유하고 있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