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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콘텍스트와 패턴 사이, 그의 미니멀리즘
    1 경관의 힘, 남해에선 누구나 마음을 놓을 수밖에 없다. 쪽빛 바다에 반사되는 따뜻한 햇살이, 다도해의 훈풍이 실어 나르는 대양의 숨결이 우리를 무장 해제시킨다. 바다와 하늘을 향해 끝없이 열린 자유의 시선이, 부드럽고 온화한 자연과의 밀착감이 일상의 번잡함을 마취시킨다. 사우스케이프 오너스클럽은 이런 축복받은 대지에 들어선 최고급 골프 리조트다. 사이트의 조건이 이처럼 완벽에 가깝다는 것은 조경가의 로망이기도 하지만 엄청난 무게의 제약일 수도 있다.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 고급과 품격, 사우스케이프를 방문하면 누구나 이 두 단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반발심이나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호화나 사치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수려한 경관 자체가 그럴 뿐 아니라, 골프장 역사상 최고의 예산으로 소위 ‘작품’을 만들기 위해 건축가 조민석(클럽하우스)과 조병수(호텔)에게 무한의 지원을 한 클라이언트의 의지도 그렇다. 물론 두 건축가가 빚어낸 결과물도 상상 이상이다. 원경에서 보면 땅으로 포복하며 지형에 그 존재를 숨기지만, 근경에서는 질료의 물성과 양감이 구조미와 결합하여 또 하나의 자연이 오롯이 구축된다. 삼차원 곡선의 백색 콘크리트 지붕과 중후한 트래버틴 대리석 벽으로 구현된 조민석의 클럽하우스는 바닷바람과 조망을 만끽하게 한다. 노출 콘크리트 덩어리를 치즈처럼 썰어 놓은 조병수의 호텔동은 해안선의 흐름과 호흡을 맞춘다. 동과 동 사이의 캔틸레버 아래로 리아스식 해안과 쪽빛 바다가 고개를 든다. 태생부터 명품인 이런 조건 속에 던져진 조경가는 그 이상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취재 첫 날, 남해의 경관에 취하고 사우스케이프의 품격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조경가 박승진이 겪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난망함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조건의 존중, 자연과의 조화, 건축의 해석과 수용, 이런 지고의 가치에 기대 애써 선한 척하는 것 외엔 별다른 묘수가 없었을 것 같다. 2 정영선의 조경설계 서안에서 성장한 후 2007년에 디자인 스튜디오 로사이loci로 독립한 박승진은 실무 조경가로서는 이례적으로 다량의 글을 발표하며 자신의 조경론을 펼쳐왔다. 그의 글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것은 조경이라는 행위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사고이며, 그 중심에는 ‘자연’이 놓여 있다. 그는 조경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행위”이므로 조경 행위의 출발은 “결국은 조경이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추구해야 하는 가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1에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자답한다. “조경의 본질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다듬고 삶을 보살피는 것이며, 이것은 … 자연의 본성과 닿아 있다. 자연은 모성적이어서 생명을 보살피고 인간 관계를 평화롭게 유지시킨다. 모든것이 스스로 조화를 이루며 힘의 균형을 유지한다. … 자연의 본성을 닮은 ‘보살핌’의 조경을 통해 세상과 조경이 소통하는 희망의 통로를 발견할 수 있다.”2 여기서 그는 자연을 보살피는 것이 조경의 역할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조경이라는 행위 자체가 자연의 고유한 성질처럼 무언가를 돌보고 보살피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임에 유의해야 한다. 자연과 조경의 관계에 대한 그의 시각은 매우 명료하다. 몇 부분만 더 인용해 보자. “조경이 다루는 소재는 대부분 자연에서 얻어 온 것들이며 그것들은 스스로 생육하고 번식해 나간다. 조경가는 이 위대한 존재들이 생육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만들어주고 보살피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조경은 자연과 더불어 시간을 엮어내는 일이라는 점에서 여타의 디자인과 다른 본질적인 차별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3 “오늘날 도시 문명의 표상은 발기된 남성의 성기로 상징화되는 수직적 건축 구조물들이다. 이 구조물들은 도시의 풍경을 장악한다. 자연(여성)과의 정서적 결합을 외면하고 허공을 향해 욕정을 뿜어낼 태세다. 항상 어디에서나 오브제처럼 빛나는 존재여야 하며, 오만하게 땅을 굽어본다.”4 반면, “조경의 공간은 땅과의 밀착을 통해 자연과 소통하고 관계를 형성한다. 돌출된 형태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남성 성기와는 다르다. … 이렇듯 우리가 다루는 자연은 여성성 혹은 여성 그 자체이다.”5 이러한 박승진의 조경론을 읽으면 자칫 그의 작업이 목가적인 픽처레스크picturesque풍이거나 잡풀 하나까지도 철저하게 연출하지만 전혀 손댄 것처럼 보이지 않는 정영선식 조경invisible landscape 또는 젠스 젠슨Jens Jensen의 ‘프레리 스타일prairie style’에 경도되어 있을 것이라고 오판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실제 작업은 “흙, 풀, 물, 돌, 철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자연의 물질과 그 물성을 잘 이해하고 그 결합 관계를 해석하여 구성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박승진식으로 표현하면 “물성과 감성 사이”의 설계다.6 그가 말하는 조경의 역할, 즉 “보살핌”은 바로 그 사이에서 작동한다. 그의 작업 속에서 보살핌은 주어진 조건에 대한 조경가의 적극적 개입이다. 그의 용어를 빌리자면 조건은 “콘텍스트”이고, 개입은 “패턴”이다. 그는 콘텍스트를 “공간을 설계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그 이전에 만들어진 모든 상황,” 즉 “내 책임이 아닌 모든 것들”이라고 말한다.7 콘텍스트에 대한 무한 존중을 넘어 그것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그것을 교정하는 패턴을 디자인하는 것이 그가 지향하는 조경 작업인 셈이다. 물론 자신의 패턴이 콘텍스트에 도전해야 함을 말한다기보다는 “콘텍스트와 패턴 사이”의 접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음 구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설계는 더하는 작업이 아니라 빼는 작업이다. 누구나 처음에는 욕심을 부리기마련이다. 그런데 의욕이 지나치게 앞서면 설계안은 복잡해진다. 복잡한 설계안이 좋은 공간으로 진화할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때로는 ‘패턴’이 ‘콘텍스트’를 존중하고 스스로 몸 낮추기를 아끼지 말아야 할 이유다. 형태뿐만이 아니다. 재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모든 조형적 요소들은 최적의 순간까지만 적극적으로 작동해야 한다.”8 박승진의 작품에 미니멀리즘minimalism을 대입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 워커힐 아카디아호텔 옥상(2007), 물의 정원(풀무원 제일생면 공장 폐수처리장, 2009), 아모레퍼시픽뷰티 캠퍼스(2012) 등과 같은 그의 작업에서는 자연의 바탕을 마련하고 자연의 시간성과 물성을 살리는 “보살핌”의 조경이 미니멀한 형태와 재료를통해 단적으로 드러난다.9 3 남해 프로젝트는 박승진에게 쉽지 않은 도전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형용사가 필요 없는 최선의 자연 경관이, 호화롭거나 사치스럽지 않으면서도 멋과 품격을 담은 최고급 건축이 그에게 조건으로 주어졌다. 환상적이지만 동시에 부담스러운 최상의 콘텍스트 앞에서 그는 철저한 조연이 되기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클럽하우스와 호텔동 사이의 급격한 단차를 절제된 지형설계를 통해 해결했다. 클럽하우스의 하이라이트 공간인 파티오에서 바다와 하늘이 드러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시선을 사로잡는 데에는 단순하면서도 섬세한 그의 지형 설계가 큰 몫을 하고 있다. 정지 작업 중 드러난 거대한 암반을 호텔동에 의해 위요된 정원의 일부로 살리고 거기에 덧대어 만든 철제 수반은 복잡한 시선에 수평적 질서를 부여해 주었다. 공간감을 주기 위해 선택한 팽나무 위주의 교목 몇 그루 외에는 식물 재료로 몇 종류의 풀과 초화만 넣었다. 바다와 바람과 계절의 공감각적synaesthetic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는 절제된 식재 설계다. 사우스케이프에서 화려함보다 편안함을, 사치함보다 여유로움을 경험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자연의 충실한 조연이 되고자 한, 건축의 지혜로운 조정자가 되고자 한 조경가의 ‘자제’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승진은 이 숨 막힐 정도로 완벽한 콘텍스트가 참 답답했을 것 같다. 강우와 폭풍이 오전 촬영을 가로막았던 취재 둘째 날, 믿기지 않는 속도로 구름이 물러가고 다시 남해의 하늘과 바다가 펼쳐졌다. 다시 둘러본 사우스케이프에서 나는 띠 형태의 긴 돌무더기를 발견했다. 그제서야 마음이 확 트였다. 난데없는 현장 채집석의 띠가 주차장 쪽 마운드의 풀숲을 뚫고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 클럽하우스 옆 정원을 지나 리차드 에드먼Richard Erdman의 조각 볼랑트Volate를 스치며 퍼팅 그린 쪽 아래 레벨로 연결된다. ‘카메라타’의 남해 분점인 음악감상실(클럽하우스 1층) 앞에서 돌무더기 띠가 멈춘다. 강하고 풍요로운 이 사이트의 콘텍스트에서 해방된 박승진의 패턴일거라 단정하고 나니 서울의 일상으로 돌아오는 길이 오히려 즐거워졌다. 며칠 후 그에게 확인하니 과거에 그 자리에 있던 말 훈련장의 담장 유적을 살리라는 문화재 심의에 대한 설계적 대응이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그 돌무더기 띠는 대지미술가 리차드 롱Richard Long의 초기작들보다 울림이 있는, 날카로운 선으로 캔버스를 찢은 루치오 폰타나Lucio Fontana의 개념 작업들보다 강한, 그의 미니멀리즘이었다. 남해로부터, 건축으로부터 자유로운.
    • 배정한[email protected] / 편집주간,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 2014년07월 / 315
  • [칼럼] 작은 디테일부터
    호황을 구가하던 한국 조경이 항로를 잃은 배처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건설 경기의 침체로 건축과 조경 분야가 위축되었고, 자구책을 마련하며 이겨나가려 안간힘을 써보지만 역부족이다. 대부분의 조경가가 내뱉는 말은 “그저 버텨야죠” 일색이다. 설상가상으로 업역 다툼도 한층 치열해졌고, 우후죽순처럼 발전을 거듭하는 중국 조경은 우리를 더욱 움츠러들게 한다. 이 시점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며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조경이 외적으로 풍성함을 누렸던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아파트 분양 자율화에 있었다. 거주보다는 부동산 투자의 방편이었던 아파트 건설열풍에 편승해서 한국 조경은 디자인의 질적 향상 보다는 겉으로 보이는 조야한 화려함에만 치중해 왔다. 조경의 가치는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한눈에 보이는 큰 그림보다 세심하게 들여다보아야 하는 작은 디자인 디테일부터 고민하고 노력했어야 한다. 아주 작은 눈짓이나 입가의 미소가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듯, 공간의 섬세한 디테일이 공간의 이미지를 높여준다. 갑자기 폭증한 일감, 적은 설계비, 까다로운 발주처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는 독창적인 디자인과 디테일 개발을 소홀히 하고 기성품으로 조경 설계의 내용을 채웠다. 새로운 공간에 적합한 새로운 디테일을 고민하지 않고 가장 일반적인 디테일을 그대로 적용하면서 편하게 넘어가곤 했다. 건축, 도시, 토목 분야와 차별화된다고 우리 스스로 자부하는 식재 설계 디테일 도면도 누구나 쉽게 베껴서 할 수 있는 수준의 디자인으로 마무리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조경가가 다른 분야의 전문가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무기를 녹이 슬 때까지 방치한 것이다. 새로운 재료, 공법, 가공 기술 등에 대한 다양한 연구 개발을 진행하기는커녕 설계 물량의 양적 풍성함에 취해서 전문적인 디자인과 기술 개발을 등한시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제 조경의 회복을 위한 전기를 마련할 시점이다. 조경만이 해낼 수 있는 디자인 디테일을 발굴하고, 결과물을 모니터링하고, 부족한 점을 냉철히 직시해야 한다. 후속 프로젝트에서 보다 높은 수준의 디자인 디테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토론과 논의 또한 활성화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과 노력이 장기적으로 조경 디자인의 새로운 영역과 정체성을 만들어줄 것이다. 그러할 때 조경가는 도시의 일부분만을 디자인하는 전문가를 넘어서 도시의 가치를 높이고 정체성을 바꾸는 전문가로, 도시를 재생시키는 전문가로 대우받으며 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눈을 크게 뜨고 새로운 시장을 바라보되 우리가 간과하며 지나쳤던 작은 디테일부터새롭게 주목한다면 조경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1983년부터 조경 디자인을 시작했으니 어느새 30년이 훌쩍 넘었다. 열악하기 짝이 없는 기반에서 시작했지만 그 덕분에 작은 디테일 디자인부터 세부 시공까지 하나하나 경험하며 일할 수 있었다. 기성품이 없어서 의자, 퍼골라, 휴지통, 안내판, 지주목, 미끄럼틀, 그네, 조합놀이대, 수경시설 등 모든 것을 직접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 지금까지 다양한 재료를 바탕으로 섬세한 디테일을 고려하게 되었다. 물론 이런 경험을 내세우고자 함이 아니다. 한국 조경의 다음 세대에게 다양한 디자인과 새로운 디테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젊은 조경가들이 한국 조경의 희망이다. 국내외에서 다양한 교육과 실천을 통해 새로운 디자인과 디테일을 경험하며 고민해 온 신진 조경가 그룹이 이제 한국 조경의 새로운 좌표를 제시하고 조경의 영역을 확장시켜 나가리라 믿는다. 새로운 라이프스타일과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익숙한 그들이 한국 조경의 다음 패러다임을 열어줄 것을 기대한다. 작은 디테일 디자인부터 도시의 비전을 계획하는 일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그들이 감당할 것이다. 건축과 대화하며 도시를 다시 살리고 바꾸어 나갈 것이다. 단순히 보기만 좋은 도시가 아니라 활력 있고 생기 있는 도시를 만드는 그런 조경가가 되어야 한다. 환경의 질뿐만 아니라 도시의 경제와 문화를 살리고 시민의 참여를 유도하는 그런 디자인을 선도해야 한다. 새로운 장을 열어갈 젊은 조경가들에게 한 가지 당부할 것이 있다. 조경가는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웬 뜬금없는 사랑 타령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의 다른 이름은 관심과 애착이기도 하다. 조경가는 땅을 사랑하고, 식물을 사랑하고, 환경을 사랑해야 한다. 주어진 일을 사랑하고 일을 통해 만나는 사람과 그 지역을 사랑하며 디자인한다면, 그 디자인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전하게 되고 그 사랑으로 도시는 아름답게 될 것이다.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듯, “사랑은 모든 허물과 죄를 덮는다.” 사랑 가득한 도시를 만들어갈 그들의 미래를 기대한다. 최신현은 우대기술단 조경사업부를 거쳐 2003년 씨토포스를 설립했다. 북서울꿈의숲, 대구 두류공원, 고령 대가야 역사테마파크, 진주 만경지구 남가람 문화거리, 아양교 조형물, 대구 동구청앞 광장, 무안 회산 백련지 등 다양한 층위의 작품을 설계하였으며, 서서울호수공원으로 미국조경가협회상(ASLA ProfessionalAwards)을 수상했다. 동탄2신도시 워터프론트, 신월정수장 부지공원화, 의정부 역전근린공원(캠프 홀링워터), 충북 음성 혁신도시 등 다수의 설계공모에서 당선되었고, 영남대학교 조경학과 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현재 한국조경사회 수석부회장, 서울시 공공조경가그룹 위원, 서울시 건축심의위원을 맡고 있다.
  • [에디토리얼] 가출하자, 조경 3세대
    30대 조경가 30인의 성장사와 비전을 다룬 이번 호의 특집 ‘조경가로 자라기’를 준비하며, 그리고 그들이 보내온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엉뚱하게도 20년 전 영화를 떠올렸다. 그들이 대학 생활을 시작하거나 10대였던 1994년의 영화다. 스테판킹 원작,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의 ‘쇼생크 탈출 The Shawshank Redemption’. ‘탈출’자가 들어가는 제목, 자유를 강조하는 진부한 모토, 하늘 향해 두 팔 벌리고 비를 맞는 포스터는 ‘빠삐용’을 벗어나지 못하는 전형적인 감옥 영화의 아류일 거라는 첫인상을 준다. ‘감옥 안의 혹독한 환경과 비인간적 실태를 과장해서 스케치할 테고, 결국엔 아주 극적으로 탈출하겠지, 뭔가의 정치적 냄새가 약간은 배어 있을 거고….’ 하지만 쇼생크 탈출은 빠삐용의 재탕이 결코 아니다. 감옥 쇼생크는 장기수로 가득하다. 화면의 쇼생크는 몇 가지 위협을 제외하면 대체로 평안하다. 그 극한의 위협이라는 것도 반사적으로 몸 사리고 조심만 하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정도다. 이 감옥에서 삶의 목적은 감옥 외부로부터의 격리다. 감옥외부를 향한 자유를 저당 잡힌 채 감옥 안에서 그저 존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쇼생크의 생활에는 내일에 대한 긴장이나 경쟁이 가져오는 불안이 없다. 그곳의 생활은 규칙적이고 단조롭기때문에 불확실성이 불러오는 공포도 없고 책임 때문에 갖게 되는 삶의 무거움 역시 없다. 이런 감옥에 인간은 길들여진다. 쇼생크는 그러한 길들여짐이 초래하는 결과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길들여진 인간에게 탈출은 무의미하고 자유는 무용지물이다. 운이 좋아 형기를 덜 채우고 석방된 노인 죄수들이 감옥 밖에서 겪는 부적응은 불안에서 공포로, 공포에서 자살로 이어진다. 이런 길들여짐은 이데올로기이거나 심리적 변화이기에 앞서 습성의 일상적 조작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미셸 푸코는 근대의 미시적 권력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감옥을 실례로 든다.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늪과 같은 감옥을 뛰쳐나가기 어렵게 된다. 게으르고 안일하며 권태로운 감옥의 습성에 의해 그 외부의 세계는 지워진다. 커뮤니케이션의 대상은 그 안의 존재로 제한되고 그 밖을 향해서는 모든 것이 차단된다. 그래야 감옥에 머물 수 있다. 감옥의 의미는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다, 군대로, 학교로, 전문 분야나 집단으로. 우리의 ‘조경’과 ‘조경학’도 쇼생크와 다름없는 감옥이다. 조경 1세대는 제 발로 쇼생크로 걸어들어 왔다(물론 다른 감옥의 1세대도 다 그러하겠지만). 그들은 좋은 안전울타리 속에 좋은 감옥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 틀 속에서 길들여져 갔다. 벗어날 필요가 없었다. 이미 편안한 감옥이 있었던 것이다. 조경 2세대는 아마 1세대의 감옥에 불만을 느꼈을 것이다. 저 철망만 통과하면 좀 더 나은 세계가 펼쳐져 있을 거라는 낭만적인 낙관에 들떴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자유란 애당초 불가능했다. 불확실한 자유보다는, 새로운 내일의 책임보다는 길들여짐을 선택하는 게 백배 낫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일군의 2세대는 앞 세대가 가꾸어 온 감옥을 벗어나고자 여러 길을 모색했다. 그러나 그 다양한 갈래의 길들을 여기서 나열하는 건 그들이 맞이한 또 다른 길들여짐에 대한 변명일 뿐이다. 그들 역시 길들여짐의 평화를 체득하게 되는 길 위를 걸었다. 감옥을 뛰쳐나오기보다는 감옥 안에 있으면서도 감옥 밖에 있다고 혼동한 것이다. ‘쇼생크 탈출’에서 앤디는 위험을 감수하고 ‘피가로의 결혼’을 감옥 안에 바람처럼 울려 퍼지게 한다. 마치 키에르케고르의 ‘영원한 순간’처럼, 그 순간에 도취된 모든 수인囚人들은 자신이 감옥 밖에 서 있다고 느낀다. 이 조경 2세대가 할 수 있었던 건, 그리고 지금도 하고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이미지와 리얼리티의 혼동이(었)다. 그것이 그들의 자유라면, 그것은 자유의 길들여짐에 대한 궁색하고 초라한 인정에 불과하다. 쇼생크에서 앤디의 존재는 메시아와 다를 바 없다. 그는 감옥의 습성에 적응하기를 거부한 유일한 인간이었다. 죄수의 신분으로 감옥 내에 도서관을 만들었다. ‘브룩스 도서관’은 감옥 안에 존재하는 감옥의 외부였다. 쇼생크에 단순히 매몰되어가던 수인들은 이 도서관을 통해 또 다른 세계를 본다. 이 세계는 격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은 유일한 세계였다. 그렇지만 그 세계에 누구보다도 만족한 인간은 앤디 자신이었을 것이다. 20년을 버텼다. 탈옥을 결단한다. 하지만 탈옥 ‘이후’의 준비를 결코 간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유를 향한 ‘영화적’ 실험이 앤디를 반긴다. 조경 3세대, 어디서부터 누구부터 시작될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조경 3세대, 그들은 앞선 두 세대의 감옥을 극복해야 한다. 감옥과 탈출의 상징성이 너무 과격하다면 이렇게 말해 보자. 지키느라 불안하고 넓히느라 피로한 집안―조경―을 ‘가출’해 제대로 된 가문을 한번 일으켜 보자고. 우선은 앤디가 되어야 한다. 찬찬히 치밀하게 준비하고 감옥 안부터 다듬어야 한다. 그러나 앤디에 그쳐서는 안 된다. 앤디의 탈출이 다다른 곳은 막막하고 막연한 공간이었다. 온통 비어있는 바다와 모래사장에는 허무한 호흡만 가득했다. 영화는 애써 기적적인 자유를 서사적으로, 낭만적으로 극화했지만, 앤디의 자유는 역설적이게도 세상과의 완전한 절연이었다. 비존재의 확인이었다. ‘부자유의 부재’와 ‘자유의 존재’를 명증하게 구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다시 말해 어떤 가출이 참다운 가출인지 알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우선 어떻게 가출해야 할지, 우리는 안다. “생각의 감옥을 벗어나는 것.” 그것이 조경 3세대가 길들여짐을 뛰어넘어 자유를 품는 ‘가출’의 첫 걸음이다.
    • 배정한[email protected] / 편집주간,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 2014년07월 /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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