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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던스케이프] 1960년대와 아동공원
    수년 전, 서울 남산공원의 기록물을 수집하면서 새삼 느낀 점은 사람들은 남산 자락에 무언가를 만들었다 부수기를 반복했다는 것이다. 그중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던 지역은 숭례문 또는 서울역에서 도보로 접근 가능한 북서 사면의 회현자락이다. 남산의 예장자락이 일본인이 한성부에 합법적으로 거류하게 되면서 조선의 도시적 질서가 깨지기 시작한 지역이라면, 조선신궁이 있던 회현자락은 남산을 식민 통치의 폭력과 억압의 상징 경관으로 전복시킨 장소다. 조선신궁은 일본의 패망과 함께 모두 불타버리고 그 터만 남게 되었고, 해방 직후 좌익과 우익의 각종 집회 장소로 쓰이면서 이데올로기 갈등이 첨예한 공간으로 전환된다. 국회의사당 조성을 위해 기공식까지 했지만 결국 취소하는 전무후무한 전력까지 세우게 되면서, 한동안은 여론몰이가 필요한 각종 집회의 장소로 이용됐다. 5.16 군사정변 이후 정권의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서울시는 국회의사당 부지를 중심으로 종합미화계획을 수립한다. 그리고 1960년대 중반, 이곳은 비로소 ‘중앙광장’(최상단)과 ‘야외음악당’(2단), ‘아동공원’(1단)으로 대변신한다. 남산이 비로소 서울 시민의 이용 공간으로 전용된 것이다. 특히 대규모 공간을 할애한 아동공원은 이후 서울과 전국의 주요 도시에 제2, 제3의 아동공원을 조성하게 하는 전향적인 영향력을 끼쳤다. 1963년 4월 6일에 착공해 8월 10일에 준공, 8월 25일 개장한 남산의 어린이 놀이터를 두고 각종 신문 매체는 한국 최대 규모, 아동 낙원, 꿈의 낙원 등의 헤드라인을 뽑았다. 다소 과장된 것 같지만, 변변한 놀이 시설 없이 골목길을 전전하며 노는 것이 일상이던 시절에 한 번에 1,500명의 어린이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면적에 90여 종의 놀이 기구를 설치해 무료 이용하도록 했다는 점을 확인하면, 그러한 표현에 충분히 수긍이 된다. 남산 아동공원은 ‘남산공원 설계현상모집’(1962년 1~2월 진행)을 통해 구현됐다. 현상공모에 관한 서울시 공문 서류에 아동공원이 일절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당선작의 아이디어를 수용한 결과로 보인다. 건축가 안병의(1927~2005)의 작품이 당선작으로 채택됐는데, 기하학의 패턴과 유연한 곡선을 절충해 건축과 녹지 공간을 적절히 결합한 것이 특징이다. 그는 최상단에 야외음악당과 시민 광장, 기념물을 두고 2단에는 미술관 건물을, 가장 낮은 1단에는 아동공원을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결과적으로 야외음악당은 최상단에서 2단 부지로 이동하고 건물 형태도 곡선으로 바뀌는 등 대폭 조정됐지만, 그가 제안한 아동공원만큼은 그대로 수용됐다. 놀이 시설은 오히려 대폭 늘어서 회전 그네, 달팽이 미끄럼틀, 미궁(迷宮), 구름다리, 분수, 원형 철봉대, 여우굴 등각양각색의 놀이 시설을 콘크리트로 만들어 선보였다. *환경과조경423호(2023년 7월호)수록본 일부 참고문헌 이해수, “1960~1973년 동심의 낙원, 남산공원의 문화정치: 공간을 둘러싼 권력과 공간 이용자의 의미 생산을 중심으로”, 『미디어, 젠더&문화』 33(4), 2018, pp.5~53. 서울특별시, 남산공원설계현상모집, 서울기록원 소장(기록건 ID: 20150000081393), 1962. 서울특별시, 공원 기록 인프라 및 협력 네트워크 구축, 2020. “꿈의 낙원 남산에 어린이 놀이터”, 「조선일보」 1963년 1월 12일. “어린이 놀이터”, 「동아일보」 1963년 8월 17일. “한국 최대 규모의 아동낙원 서울 남산에 어린이 놀이터 마련”, 「동아일보」 1963년 8월 24일. “인왕산에 어린이공원”, 「매일경제」 1969년 8월 19일. 그림 출처 그림 2. e영상역사관
  • [에디토리얼] 나의 서울숲 사용법
    편집부 김모아, 금민수, 이수민 기자가 유청오 전속 사진 작가와 함께 이틀간 202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취재를 다녀왔다. 순천행 기차에 슬쩍 동승하고 싶은 강한 유혹을 느꼈다. 지난 4월 순천에서 열린 한국조경학회 학술대회 때 박람회장을 잠깐 둘러보긴 했지만, 발 디딜 틈 없는 인파에 치여 정작 기억에 남은 건 총천연색 등산복의 물결뿐이라는 아쉬움 때문. 게다가 박람회장보다 더 호평받고 있다는 오천그린광장과 어싱길, 도심 도로를 잔디밭으로 바꾼 그린아일랜드를 답사하지 못한 아쉬움도 취재에 동행하고픈 생각을 부추겼다. 하지만 편집주간의 동행을 기자들이 반길 리 없을 터. 철없는 충동을 간신히 억누른 나는 기자들이 순천에 도착할 무렵 소박하게(?) 서울숲으로 걸음을 옮겼다. 봄의 절정, 공원은 여느 때처럼 북적였고 그 활력에 내 마음도 생동했다. 35만 평에 달하는 서울숲은 서울에서 올림픽공원 다음으로 큰 공원이다. 문화예술공원, 체험학습원, 생태숲, 습지생태원 등 크기만큼이나 다채로운 성격의 여러 공간으로 구성된 대형 복합체 공원. 게다가 한강과 바로 직접 맞닿아 있는 점은 서울숲 매력을 배가시킨다. 다양한 얼굴을 가진 만큼 갈 때마다 다른 구역을 경험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마치 단골 식당처럼 자주 가는 자신만의 공원 속 아지트를 정해 두면 더 즐겁다. 나의 서울숲 사용법은 세 가지 정도다. 많은 사람이 서울숲 하면 떠올리는 그 시그니처 풍경에서 도시의 자유를 느끼는 게 아주 평범하지만 소중한, 나의 첫 번째 사용법이다. 지하철 수인분당선을 타고 서울숲역에 내린 뒤 3번 출구로 나와 컨테이너 박스 100여 개로 지은 언더스탠드 에비뉴를 통과하면 서울숲의 정문 격인 공원 2번 출입구가 나온다. 옛 경마장의 장소 기억을 소환하는 역동적인 군마상을 지나면 바닥분수와 거울연못으로 유명한 문화예술공원 구역이다. 넓은 잔디밭 위로 펼쳐진 하늘과 응봉산 원경에 숨통이 확 트인다.시원한 풍광을 즐기며 잠시 해찰하다 보면 자연스레 자유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30분이면 충분히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시간이 조금 더 있다면 은행나무길 아래 벤치를 차지하고 빽빽한 수직선들의 밀도감에 압도당하기를 자처한다. 더 적극적으로 일상에서 탈주하고 싶은 날엔 생태숲 구역을 선택한다. 생태숲 위를 지나 강변북로를 건너 한강변으로 뻗어나가는 보행교를 걷는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사슴들이 출몰하는 생태숲은 직접 내려갈 수 없고 다리 위에서 내려다볼 수만 있어서 오히려 더 매력적이다. 어느덧 야생에 가까워진 숲의 머리 위를 횡단하는 날카로우면서도 경쾌한 직선의 다리를 걸으며 스치듯 숲을 통과하는 기분, 걸어본 사람만 안다. 조금 더 걸으면 강변북로를 쉴 새 없이 달리는 자동차 행렬이 한눈에 잡힌다. 아찔한 속도와 소음이 불쾌하지 않고 두렵지도 않다. 광폭의 한강이 뿜어내는 힘과 아파트 경관의 질량감, 성수대교의 육중한 구조미와 이리저리 휘감기는 강변도로 램프들의 곡선이 한데 뒤섞인 콜라주. 보행교 끝에서 강가로 내려오면 멀리 보이던 한강이 바로 발 앞에서 흐른다. 세 번째는 공원 바깥 카페의 창으로 서울숲의 짙은 계절감을 즐기는 사용법이다. 성수동에서 약속 잡을 일이 있으면 인더스트리얼 인테리어로 무장한 성수이로와 연무장길 쪽의 힙한 카페들보다는 공원 4번 출입구 바로 옆의 한 카페를 택한다. 성수동 특유의 붉은 벽돌 이층집을 검박하게 개조한 카페 2층에 앉으면, 가로로 긴 창을 통해 서울숲의 가장 일상적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겨울이면 텅 빈 공원의 스산함이, 봄이면 공원을 새로 채워나가는 햇살의 나른함이, 여름이면 짙다 못해 무거운 초록의 냄새가, 가을이면 갖가지 나뭇잎이 조합해내는 단풍의 향연이 카페 창을 넘어 달려든다. 조금 더 부지런하고 싶은 날엔 카페에서 나와 습지생태원까지 간다. 공원 외곽의 습지생태원에는 사람이 거의 없다. 습지 위에 그물처럼 놓인 목교를 걷거나 투박한 의자에 몸을 기대면 공원 전체를 전세 낸 기분을 누릴 수 있다. 도시의 고요를 경험할 수 있는 아주 쉬운 방법이다.
  • [풍경 감각] 쉬운 단점
    “칭찬만 너무 많이 하시는 것 아니에요?” 식물 드로잉 수업을 할 때마다 수강생에게 듣는 말이다. 삐뚤빼뚤한 형태, 어색한 색채, 그리고 미처 정리하지 못한 구도……. 수강생들은 스스로 부족한 점을 나열하지만, 외려 나는 사랑스럽다, 따뜻하고 달콤하다, 혹은 과감하다는 평을 하니 말이다. 그림을 그리는 건 어쩌면 쉬운 일인 지도 모른다. 종이를 꺼내고 마음에 드는 화구를 골라 쓱쓱 채워 넣으면 되니까. 그러나 그 과정에서 부족한 점을 끝없이 마주친다. 아무래도 선을 잘못 그은 것 같아. 다른 작가는 색을 참 잘 쓰던데 나는 왜 그게 안 될까. 애초에 구도를 잘못 잡았나 봐, 처음부터 다시 그려야지……. 이렇게 단점을 메우는 데 집중하면, 어느새 그림은 하기 싫고 어려운 일이 된다. 지우고 다시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부분이야말로 개성과 장점이 잘 드러나는 지점이 되기도 한다. 그림 그리는 일이 즐거움으로 가득 차길, 기쁨과 기대가 손을 이끌어 주길 바란다. 이번엔 새로운 색을 써 볼까? 그리고 싶은 게 생각났어! 크게 그려 보면 멋질 거야. 이렇게 되뇌며 자꾸 그리다 보면 손끝에서 좋은 그림이 나오는 순간이 분명히 온다. 단점을 고치겠다는 쉬운 생각을 버리자. 그리고 좋은 점을 찾아 성실히 칭찬해 보자.
  • [어떤 디자인 오피스] 가원조경설계사무소
    우리의 스튜디오 가원조경설계사무소(이하 가원조경)를 24년간 운영하면서 개인과 조직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회사가 어려웠던 시절부터 자리를 지켜주었던 직원들은 어느새 회사의 기둥이 됐고, 다양한 경험과 실력을 갖춘 새로운 인재들이 영입됐다. 우리는 현재 4개의 스튜디오(설계실), 연구소(강과 바다), 경영지원실, 영업기획본부로 구성된다. 4개의 스튜디오는 프로젝트 수주부터 시작해 계획, 기본·실시설계에 참여하며, 각 스튜디오는 고유의 설계 철학을 바탕으로 조경의 본질과 가치를 연구하고 있다. 스튜디오 G1 스튜디오 G1의 설계 철학은 세 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우선 경계선 바깥과 안이다. 경계선 밖의 풍경은 경계선 안에서도 바라보는 풍경임을 인지하고, 이를 바탕으로 경계선 안쪽의 풍경을 만들며 전체와 부분이 하나의 풍경으로서 상호 작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한다. 두 번째는 간극이다. 도시와 자연, 그리고 사람으로 구분된 공간적 개념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간극의 틈을 어떻게 메울지에 대한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세 번째는 시작 혹은 시도다. 기후 변화에 대비하기 위한 다양한 기술적 시도들이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시도가 생태적 기능에 국한되지 않고 문화와 체험 프로그램, 그리고 경관을 구현할 때 쓰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이상무 소장) 스튜디오 G2 스튜디오 G2란 이름으로 모인 지 3개월 차에 접어드는데, 괜찮은 팀워크를 발휘하며 점점 발전해 나가는 중이다. 문과적 감성보다는 이과적 이성이 강한 팀원들과 함께 내실 있고 탄탄한 설계를 해나가고 있다. 환경 설계의 아젠다인 탄소 저감, LID, BF 등을 조경 설계에 적용하고 구체화하는 작업에서 현실적인 설계 기법과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한다. (김용주 소장) 스튜디오 G3 Think Harder than Work Harder. 스튜디오 G3의 지향점을 드러내는 문구다. 해외파 소장을 필두로, 가원조경에 또 다른 색깔을 칠하고 있다. 업무적으로 맡은 프로젝트마다 기본적인 원칙을 지키면서 조금은 색다른 아이템과 디자인 디테일을 반영하고자 노력하며, 일련의 과정에서 각자의 의견과 대안을 함께 생각하고 공유하는 것을 추구한다. 업무 이외 서로의 일상과 다양한 생각을 공유하며 챙겨주는 따뜻한 팀이다. 조만간 인스타그램 계정(@studio_g3_)을 통해 G3만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낼 예정이다. 많관부! (임상현 소장) 스튜디오 G4 스튜디오 G4의 팀원들은 예측하기 힘든 미래 환경에 최상의 공간적 해법을 제시하는 조경설계 작업에서 조경가로서 긍지를 느낀다. 하지만 실무에서 어쩔 수 없이 현실의 벽을 체감한다. 상상의 범위를 최대한 확장하되 이를 실현 가능한 계획으로 안착시켜 조금씩 현실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한다. 일정한 목표를 위해 하루하루 성과를 쌓아가는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격려와 유머는 너무나 중요한 요소다. 때로는 열정적으로, 때로는 재미에 들떠, 때로는 깊은 고민에 빠져 완성한 도면을 볼 때마다 “해냈다!”라는 탄성이 바로 터져 나온다. (김준현 소장) 우리의 프로젝트 충남미술관 건립 국제지명설계공모 충남미술관은 용봉산의 숲과 내포 신도시의 경계에 위치한 미술관으로 자연과 도시 사이에서 생긴 간극을 문화라는 매개체로서 연결하는 프로젝트였다. 연속된 흐름을 만들어 주는 숲으로 용봉산의 흐름을 잇고, 다양한 도시의 문화와 미술관 내부의 문화가 만날 수 있는 지점을 만들고자 했다. 열린 동선과 최소한의 공간 계획을 통해 열린 경관을 확보하고 문화적 교류가 일어날 수 있도록 빈 공간에 다양한 공간을 계획했다. 경상북도 농업기술원 농업기술원의 외부 공간은 주변 지형을 끌어안고 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의 곡선과 이를 받아들이는 경작지의 격자선을 엮어 자연 사이의 생산적인 대화를 유도한다. 이를 통해 만들어지는 경관은 자연이 서로 전이되는 유동적인 공간이며 다양한 가치와 활동을 만드는 새로운 형태의 농업 프로그램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경관의 틀은 기존의 전통 농업 방식을 넘어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새로운 형태의 농업 활동을 제안한다. 혁신원자력연구단지 한국원자력연구원의 재도약을 위한 터전으로 첨단 원자력 기술의 새로운 빛이 될 혁신원자력연구단지는 지역과 함께 숨 쉬고 성장하는 커뮤니티 시설, 경주 감포의 해안 경관과 연대산의 숲 경관이 공존하는 단지로 과학과 사람이 교감하는 정원과 공원으로 거듭 날 예정이다. 화성 동탄2신도시 신주거 문화타운 자연의 숨결이 스며들고 이웃과 유대를 쌓는 마을 공동체를 이루는 신주거 문화타운을 제안했다. 자연에서 변화하는 공통된 언어를 통해 자연과 하나가 되는 열린 단지로 계획하고 네 개의 블록을 잇는 네 개의 길을 통해 커뮤니티를 공유하는 마을로 조성 중이다. 평택 삼성전자 사무동 옥상정원 평택 삼성전자 신축 사무동 6층에 위치하는 6,000평 규모의 옥상정원으로, 흐르는 공간과 경계를 넘는 소통을 설계의 지향점으로 삼았다. 포스트 팬데믹 시대를 위한 오피스 외부 공간으로 갯벌이었던 대상지의 형상과 삼성전자의 디자인 모티브인 무경계의 디자인을 조화시켰다. 성남복정 1·2 공공주택지구 조경 기본 및 실시설계 공모 3기 신도시에 시대적 요구인 탄소 중립과 기후 변화에 적응하며 도심에 활력을 더하는 친환경 복합 도시의 새로운 모델을 제안했다. 복정 1지구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도심 커뮤니티의 중심 공간 복우물광장은 복정동 이름의 유래가 된 복우물을 재해석한 잔디광장과 캐노피로 만들고, 단차 극복을 위해 보행 램프를 계획했다. 도시의 환경적 맥락에서 봤을 때 중요한 전이 공간인 복자락공원은 경사지를 활용한 테라스 공간을 조성하고 기존의 저류지를 활용해 문화와 예술을 담은 공간으로 계획했다. 자연 친화적인 무한의 놀이언덕은 기존 영장산의 능선을 활용하여 지형을 다듬고, 아이들뿐 아니라 다양한 연령의 시민들이 유기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세곡천 수변감성도시 조성사업 제안공모 과거 도심 하천 계획이 하천의 치수 기능을 높이거나 자연 생태 하천을 조성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면, 서울시 수변감성도시 계획은 하천을 도시의 주요 활동 영역으로 만들어 주변 도시 공간에 재편시키는 것이 주요한 설계 과업이었다. 그동안 여러 프로젝트를 통해 사람과 도시, 자연을 연결하는 참신한 방식을 탐구해왔지만, 하천이라는 난제 속에서 대부분 처음 대면하는 과제를 해결해 나가야 했기에 쉽지 않았으나 의미있는 작업이었다. 도시와 하천의 경계를 개방하여 수변을 적극적인 활동의 공간으로 조성하되, 홍수의 위험에 대응하여 범람과 빠른 유속에 적응하는 설계를 도입했다. 무엇보다 하천의 감성을 살리는 동시에 공간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을 설계 목표로 삼았다. 불광천 수변감성도시 조성사업 제안공모 서울의 하천은 대부분 제내지와 제외지의 성격이 확연히 분리되어 있어 시민의 삶에서 소외됐다. 불광천은 주변에 다양한 근린 가로가 형성됐지만, 둔치의 일방 보행로와 각종 지장물로 인해 수변의 활력을 끌어안지 못하고 있다. 제방면과 보행로를 통합한 설계를 통해 수변을 시민의 활동 영역으로 넓히고, 구역별로 개성 있는 프로그램 공간을 도입해 불광천 수변을 걷는 즐거움을 제공하고 활기가 넘치는 장소로 탈바꿈시켰다. 오피스 문화 시대의 흐름에 맞춘 복지 시대와 세대가 변화하는 흐름에 맞춰 기존 설계사무소의 이미지를 탈피하고자 노력 중이다. 워라밸을 중시하는 요즘 세대의 눈에는 아직 부족할 수 있지만, 직원들에게 적절한 보상과 복지를 주고자 오피스 문화를 바꿔나가고 있다. 모니터, 핸드폰으로만 보던 해외 조경 공간 답사가 그중 하나다. ‘백문이 불여일견’ 이란 말처럼 디자인에 영감을 주거나 관심 있던 해외사례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이러한 경험은 직원들의 역량을 키우고 각자 추구하는 지향점을 위한 좋은 토대가 될 것이다. 올해 4월에는 창립 이래 처음으로 사내 체육대회를 진행했다. 봄 야유회를 준비하던 중 사내 체육대회를 해보자는 의견이 나왔고, 권혁 실장(스튜디오 G1)을 중심으로 빠르게 장소, 경기 종목 등이 결정됐다. 회사에 앉아 업무를 보던 점잖은 직원들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들은 아주 치열했고 그 누구보다 진심이었다. 현재 사무실은 강남구 역삼동 인근의 빌딩 3, 4층을 사용하고 있으며, 21명의 구성원이 각자 넓은 작업 공간을 쓸 수 있도록 배치했다. 2023년은 가원조경이 창립한 지 24년째 되는 해다. 그동안 많은 사람이 가원조경을 거쳐 갔고, 밖으로 나가 각자의 영역에서 훌륭한 성과를 내고 있다. 새로운 조경가들이 합류하여 회사의 구성원으로 제 역할을 하며 성과를 내는 모습을 볼 때면 감회가 새롭다. 앞으로도 젊은 조경가들의 역량 개발과 조경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안세헌) 가원조경설계사무소는 1999년도에 창립하여 올해로 24년 차를 맞이한 조경설계사무소로도시와 건축의 외부 환경을 전문적으로 디자인한다. 우리의 디자인은 자연의 존중과 인간 활동의 관심을 바탕으로 대상지의 도시적, 인문적, 생태적 맥락에 개입해 전통적인 도시, 건축, 조경 영역을 탈피하고 실용적이며 창의적인 다양한 디자인 솔루션을 제공한다.
  • [모던스케이프] 공원의 이면, 약물 중독자들의 쉼터
    도시의 자연 대체제로서의 공원이, 근대 초기에 도덕과 문화, 윤리가 박탈당한 도시를 구원할 수 있는 이상적인 대상으로 간주되었음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생각처럼 공원이 순수하게만 이용된 것은 아니었다. 공원은 분명 회색 도시의 녹색 해독제 역할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근대 도시의 암울하고 야만적인 민낯을 보여주는 장소이기도 했다. 이는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근대 초기, 신문의 공원 관련 기사는 대체로 세 가지 주제로 분류된다. 첫째 도시 개발의 일환으로 조성된 도시 시설로서 공원의 지정, 계획, 조성에 관한 기사나 둘째 연주회, 야유회, 기념회 등 행사 개최지로서의 공원 소식이다. 셋째 비관, 소외, 갈등 등으로부터 비롯된 사건 사고 현장이 되는 이야기다. 당시 공원에서는 상해치사나 자살 같은 사고가 상상 이상으로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이는 공원이 일찌감치 도시 문제를 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경복궁 서쪽, 조선의 주요 제례처인 사직단을 품고 있는 사직공원(지금의 사직근린공원)은 자살이나 살해 사건 등이 자주 일어났으며, 아편과 모르핀 따위에 중독된 부랑자들이 유독 많이 이용한 곳이었다. 만해 한용운(1879~1944)은 소설 『박명薄明』에서 당시 사직공원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깨끗하지 못한 공기와 흐리터분한 티끌과 매연 사이에서 복잡한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도회지 사람들은 언제든지 신선한 공기와 맑은 바람을 그리워하는 것이지만, 만일 더운 때를 당하면 더욱 그러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서울 사람들은 여름만 되면 될 수 있는 대로 나무 밑이나 물가에를 찾아다니며, 땀을 개이고 정신을 맑히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경성 안의 작고 큰 공원에는 더위를 피하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중에는 여름을 거기서 나다시피 하는 사람도 적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경성의 공원이라고 하는 것이 모든 설비에 있어서 아직 공원다운 공원이 없지만, 그중에서 그늘도 있고 물도 있고 발세1가 좋아서 사람들이 제일 많이 모이는 데는 사직공원이었다. 거기는 피서하기 위하여 임시로 드나드는 사람은 물론이고, 운동이나 유희를 위하여 오는 학생층의 사람들도 많으며, 혹은 셋집에서 쫓겨난 사람이라든지 오다가다 머무르게 되는 사람들이 나무 밑에 거적대기로 의지하고 단지 밥을 해 먹어 가며 임시로 살림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다른 데서 보기 드문 특별한 현상이라고 할 것은, 아편쟁이들의 도회청이 되다시피 한 일이었다. 그것은 아편쟁이 중에도 집도 절도 없는 사람들이 갈 데가 없어서 그런 데로 모여드는 것이겠지만, 허다한 빈 땅을 두고서 사직공원으로만 모이게 되는 것은, 여러 가지 형편으로 자기네의 생활에 편리한 점이 있는 까닭이니, 그들의 생활에 편리한 것이라는 것은, 첫째로 마약을 파는 곳이 가까운 것과, 그 주위의 집들이 많이 있어서 밥을 얻어먹기가 편리한 것과, 나무 밑에서 한둔하기가 좋은 중에, 만일 날이 궂을 때에는 사직 문간이 있어서 풍우를 피할 수가 있는 까닭인데…….” 각주 1. 발세: 산줄기의 형세(북한어) *환경과조경422호(2023년 6월호)수록본 일부
  • [에디토리얼] 노들섬과 도시의 욕망
    한강르네상스 시즌 2, ‘그레이트 한강 프로젝트’의 화려한 아이템이 연이어 발표되고 있다. 여의도공원에 제2세종문화회관을 짓고 하늘공원 위에는 대관람차 ‘서울링’을 세운다고 한다. 노들섬도 다시 옷을 갈아입는다. 지난 4월 20일, 서울시는 ‘노들 글로벌 예술섬 디자인 공모 포럼’을 개최해 국내외 유명 건축가 일곱 팀의 구상안을 공개했다. 지난 이십 년간 이 작은 섬에 참 많은 아이디어와 디자인이 쏟아졌다. 피로감 때문일까, 기시감 때문일까. 이번 출품작들에 담긴 극장과 공연장, 폭포와 수영장, 관람차, 보행교, 공중수로에 좀처럼 눈이 가지 않는다. 변신을 거듭해온 노들섬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본다. 노들섬은 원래 섬이 아니었다. 1915년과 1921년 지도를 보면 현재 노들섬 위치에 해당하는 곳이 육지다. 용산 아래쪽 강기슭의 넓은 모래밭. 신초리新草里라는 마을이 있었다. 한강 근처 마을들은 홍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대개 주변보다 높은 곳에 자리를 틀었는데, 신초리 역시 봉긋한 둔덕 위에 있었다고 한다. 이 강변 마을의 운명을 바꾼 건 한강인도교 건설이었다. 1900년에 세운 한강 최초의 다리는 기차 전용 한강철교였다. 걸어서 강을 건너는 다리가 처음 건설된 건 1917년이었다. 강 북단 용산 이촌동과 남단 노량진을 잇는 이 다리는 한강인도교라고 불렸는데, 신초리 언덕에 흙을 돋우고 석축을 쌓아 올려 다리를 떠받치게 했다. 백사장 위에 섬처럼 솟은 땅이 생겼고, 이때부터 이 일대는 강 가운데 있는 섬이라는 뜻의 ‘중지도’로 불리며 육지가 아닌 섬으로 여겨졌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인도교 북측 제방이 유실되면서 중지도와 용산 사이의 인도교가 파괴됐고, 1929년에 현재의 교량이 신설됐다. 1935년에는 중지도까지 전차 궤도가 깔려 전차역이 생겼고, 이듬해에는 중지도와 노량진 사이에 아치 형태의 새 교량이 건설됐다. 신초리의 존재는 이 무렵 지도에서 사라졌고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곧 증발했다. 1950년 6월 28일, 한국전쟁 나흘째 날, 북한군 진로를 차단하기 위해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강인도교가 폭파됐다. 1954년에야 다리가 복구되면서 제1한강교의 역사가 시작됐다. 8차선 교량으로 확장된 건 1981년이고, 1984년에 한강대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노들섬 일대가 한강대교에 매달린 섬으로 완전히 고립된 건 아니었다. 1956년 5월 대통령 선거 유세에 30만 군중이 몰려들었는데, 그 장소가 노들섬과 이촌동 일대 ‘한강백사장’이었다. 갈수기의 드넓은 모래밭이 광장 역할까지 했던 셈이다. 한강백사장은 1960년대 서울 지도에도 넓게 남아 있다. 여가를 보낼 공원이나 공공 공간이 거의 없었던 시절, 한강과 백사장은 여름에는 피서지, 겨울에는 스케이트장으로 쓰였다. 노들섬 동쪽 백사장은 강수욕 즐기며 폭염을 피하는 서울의 대표 휴양지이자 절경을 자랑하는 명소였다. 한강개발 3개년계획(1968~1970)이 노들섬을 고립된 섬으로 바꿔놓았다. 이 계획의 핵심은 홍수 피해 방지와 교통난 완화를 위해 강 북단 이촌동 연안을 따라 제방 도로(현재의 강변북로)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모래를 퍼 날라 제방 도로를 쌓으면서 한강백사장은 완전히 사라졌고 그 자리로 강물이 흘러 들어갔다. 마침내 노들섬은 강물에 둘러싸여 고립되고 유기됐다. 지도 바깥으로 추방된 것이다. 강 한가운데 버려진 섬에는 도시의 욕망이 주기적으로 들끓었다. 유원지와 관광지 개발 사업이 여러 차례 계획되고 번번이 취소됐다. 1970년대 초 노들섬 매립 공사를 맡은 한 기업은 1만 평이 되지 않는 섬을 4만 5천 평으로 넓힌 뒤 정부로부터 넘겨받았다. 섬 둘레로 시멘트 둔치가 생긴 게 이때다. 기업의 사유지가 된 노들섬은 공공 공간의 기능을 상실했다. 수영장과 선착장을 갖춘 종합 유원지 개발, 호텔과 리조트를 포함한 대규모 개발 사업이 구상됐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노들섬은 시민들의 기억에서 점차 잊혀갔다. 인공의 구조물을 야생의 식물이 뒤덮은 폐허, 미지의 땅. 21세기의 길목에 들어서며 미지의 땅이 재조명된다. 1995년, 일제식민지기에 붙여진 이름 중지도가 노들섬으로 바뀐다. ‘노들’은 ‘백로鷺가 노닐던 징검돌粱’이라는 뜻으로, 지금의 노량진 근처를 일컫는 이름에서 따왔다. 2005년, 이명박 시장의 서울시는 274억 원에 노들섬을 사들여 오페라하우스를 짓고자 했다. 두 단계에 걸친 설계공모를 통해 건축가 장 누벨의 설계안이 선정됐으나 설계비 문제로 사업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2009년에는 오세훈 시장이 ‘한강르네상스’ 프로젝트의 하나로 공연예술센터와 한강예술섬 사업을 펼쳤지만, 2011년 박원순 시장 체제에서 모든 사업이 보류되거나 취소되고 도시 농업을 위한 텃밭이 운영되기에 이른다. 2012년, 노들섬의 지난한 운명은 새로운 활로를 찾는다. 섬의 지혜로운 활용을 위해 사회적 공감대를 모으는 시민 포럼, 아이디어 공모, 학생 디자인 캠프, 전문가 워크숍 등 다양한 노력이 펼쳐졌다. 2015년에는 관행적인 설계공모 방식과 다른 공모 과정을 통해 새 사업이 본격화된다. 시설을 먼저 계획하고 콘텐츠를 나중에 집어넣는 방식이 아니라, 콘텐츠와 운영 프로그램을 우선 기획하고 그것에 맞는 시설과 공간을 설계하는 3단계 공모가 진행된 것이다. ‘대중음악을 중심으로 한 예술 창작 기지’라는 운영자의 구상을 담아낼 공간 설계자가 선정됐다. 법, 제도, 실행이 충돌하는 난관 끝에 2019년 9월 말 새 노들섬의 문이 열렸다. 폐허의 섬으로 버려져 미지의 땅으로 잊힌 지 거의 반세기 만에 노들섬이 돌아온 것이다. 매력적인 풍경과 경쟁력 있는 입지를 갖춘 땅의 숙명일까. 2023년 봄, 노들섬이 다시 들썩이고 있다. 고단한 도시의 일상에서 탈주한 ‘자발적 표류자’를 반겨주던 노들섬, 그 한가로운 여백이 벌써 그리워진다.
  • [풍경 감각] 부자가 된 기분
    어렸을 적, 부모님은 시험을 잘 보면 원하는 걸 사준다는 공약을 걸곤 했다. 공부 열심히 하라는 의도였겠지만, 사실 시험 준비보다는 상품 고르는 걸 더 열심히 했던 것 같다. 틈날 때마다 인터넷 쇼핑몰 장바구니에 식물을 넣었다 빼면서 위시리스트를 채워 나갔다. 괜찮은 성적표를 받아오면 그 주 주말에는 쇼핑몰을 운영하는 식물 농장으로 향했다. 인터넷 쇼핑이 막 활성화되던 때였지만, 아버지는 늘 한 시간이나 걸리는 농장까지 차를 운전하셨다. 비닐하우스를 한 바퀴 둘러보며 식물을 구경하고 미리 적어간 식물들과 그 자리에서 반해버린 식물들을 모두 담으면 큰 상자 하나가 가득 찼다. 식물 상자는 무거웠지만 짐처럼 트렁크에 실을 수 없어 옆자리에 두고 가겠다고 하니, 아버지가 그렇게 좋냐고 물었다. 배웅하던 농장 주인 부부는 마치 부자가 된 기분일 거라고 대신 대답했다. 집에 오는 길, 내가 상자 속 식물을 유심히 보는 동안 아버지는 푸른 시골길을 달렸다. 작업실 이사를 마쳤다. 새 작업실에는 작지만 해가 잘 드는 베란다가 있어서 그간 위시리스트에 머물던 식물들을 몇 개 데리고 왔다. 은방울꽃, 수선화, 델피늄, 디디스커스, 아이슬란드포피……. 베란다 창틀에 앉아 이들을 천천히 본다. 오래 전 그 봄날, 아버지 차 뒷자리에 앉아 ‘부자가 되면 이런 기분일까’ 궁금해하던 기억이 난다. 창밖이 푸르다.
  • [제도가 만든 도시] 제도, 크기를 정하다 1
    우리는 어떤 크기의 공간에 살고 있는가. 크게는 초중고 학생이 배정되는 범위인 학군, 공공 서비스 시설이 설치되는 기준인 생활권부터 작게는 내 방의 창문 크기, 창문 너머로 마주한 앞 동까지의 거리, 아파트 단지 나무의 굵기, 도로의 연석 높이까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적 공간의 범위와 그 공간을 구성하는 거의 모든 요소는 그 길이(높이, 거리, 두께, 너비, 둘레)와 면적의 최소 또는 최대 한계를 규정한 제도를 따른다. 더 넓게 도시 단위를 생각해 보자. 이른바 ‘과학적’ 도시계획은 제도화1된 프로세스로 독립 변수인 인구수를 입력하면 해당 인구가 살아갈 주택용지, 상업용지, 산업용지, 공원 및 녹지로 구성된 도시의 면적을 결정해준다(그림 1). 우리는 ‘제도의 크기’ 에 살고 있다고 하겠다. 대다수의 세부적 크기 기준은 일상 공간의 안전과 최소한의 환경적 쾌적함 등 실용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많은 경우 설계와 시공이 해당 목적을 적정 수준으로 달성했는지 효율적으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확정적 수치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거주 공간에 최소한의 채광과 통풍을 확보하기 위해 창문 크기를 방 면적의 최소 1/10 이상으로 규정한 것이 그런 예라 하겠다. 그러나 현대 도시 제도가 규정하는 크기의 기준이 ‘과학적으로 계산하여 산출된, 객관적 값’으로 사회적 차원에서 가치 중립적이며 실제 도시 공간에서 공정하게 작동할까?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의 크기에 관여하는 제도에 대해 다룰 두 차례의 글 중 이번 호에서는 제도가 규정하는 크기 제한의 의미를 곱씹는다. 제도와 크기의 열망 사이: 최저 높이 제한과 최고 높이 제한 더 넓고 더 높은 건물을 만들고자 하는 열망과 제도가 맺은 관계들을 살펴보자. 1960년대 뉴욕에서 시작된 현대 도시계획의 높이 규제는 가로 공간이나 주거지에서 입체적으로 일정 수준의 공간적 개방을 확보하기 위해 건물의 높이를 제한한다.2 높이 규제는 시대와 장소, 대상에 따라 절대 높이를 규정하거나 높이에 따라 건물을 뒤로 물리는set-back 등 다양한 방식으로 실행된다. 한국에서도 용도지역별 최고 층수, 가로구역별 최고 높이를 절대적으로 설정하거나, 주거지역에서는 일조를 위해 절대 높이와 각도 기준이 절충된 방식으로 높이를 제한한다(그림 2). 역사유적 주변으로는 시각적 인지와 역사 경관 보존을 위해 주변 건물 높이를 앙각 27도 사선 밑으로 제한하기도 한다. 높이가 아닌 면적에 대해서도 대지 면적을 제한해 옛 도시 조직의 스케일을 유지하기 위한 최대 개발 규모 규제 등이 운영되고 있다. 채광과 통풍 같은 실용적 목적이든 공간의 정성적 가치 구현을 위해서든, 크기에 대한 제도의 관여는 주로 최대와 최고를 설정해 더 넓고 더 높은 건물을 짓고자 하는 사적 열망을 억누르고 공적 가치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그렇다면 공간 제도는 이렇게 더 큰 규모의 열망을 제한하는 방향으로만 관여할까? 그렇지 않다. 반대로 일정 수준 이상의 규모를 강제하기도 한다. 주요 도로변을 따라 최저 높이 또는 최저 층수를 설정했던 ‘최저고도지구’나 대지를 일정 규모 미만으로 분할하는 것을 금지하는 건축법 등이 이에 해당한다. 주요 간선도로변과 역세권에서 소규모 인접 대지 간 공동 개발을 권장 또는 강제하여 개발 규모가 커지도록 유도하기도 한다(그림 3). 물론 이러한 최저·최소 규모 규제는 입지가 양호한 도시 내 토지, 즉 도로, 지하철 등 공공 투자의 수혜를 입은 땅을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이유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최저·최소 제도를 특정 간선도로 등 일부 구역에 선택적으로 적용하는 바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는 크기에 대한 사회적 열망을 제도화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예를 들어 최저 높이와 층수를 강제하는 제도는 일제식민지기 도쿄 중심지 주요 가로변에 먼저 적용된 뒤 경성에도 도입된 것이 그 시작이다. 도쿄에서 최저를 규정하는 제도가 운용된 이유와 한국에서 광복 이후에도 이 제도가 존속된 이유는 같다. 지금 기준에서 보자면 초라한 수준인 4층 또는 3층의 최저 높이 규제는 도쿄에서는 근대화를, 서울에서는 전쟁 후 국가 재건과 경제 개발을 주요 노선변 ‘고층화’를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그림 4). 달리 말해 도시가 번영한 결과로 고층화를 이룬 것이 아니라 번영하고자 하는 열망을 특정 영역에서 건물의 높이로 ‘미리’ 보여주고 싶은 목적의 산물이었다. 1960년대 김포가도(김포공항~영등포구청)에 ‘준미관지구’를 지정했던 것이나 1980년대 초,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두고 마포로에 면한 한 켜를 철거하고 재개발을 실행한 사례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3 건물 높이 또는 층수의 최저 한도를 설정하는 ‘최저고도지구’는 2017년에 이르러서야 관련 법에서 완전히 삭제되었다. 전후 1960년대까지는 세종로나 종로와 같은 중심지 주요 도로변에서도 최저 5층이 어려워 4층으로 완화를 해야 할만큼 당시 민간의 자본 규모와 공간 수요가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중심지는 물론 변두리 주거지역에도 이미 4~5층 건물이 빼곡한 지 오래인 상황에서 도시의 번영을 상징하는 ‘고층화’라는 애초의 목적은 전혀 유효하지 않다. 그럼에도 서울은 물론 주요 대도시 구도심 여러 곳에 최저고도지구가 지정되어 남아 있었다. 그중 노후 건물을 다시 짓지 못하거나 나대지가 방치되어 최저 층수 규제가 작동하지 않는 곳도 일부 있었다(그림 5). 이미 도시의 번영을 상징할 ‘고층화’가 충분함에도 최저 규제가 저이용 구도심의 개발을 유도할 수단이라는 잘못된 관성이었다고 하겠다. **각주 정리 1. 국토교통부의 ‘지속가능한 신도시 계획기준’, ‘도·시·군 기본계획수립지침’, 법제처의 ‘혁신도시 계획기준’과 ‘기업도시 계획기준’ 등이 이에 해당하며, 주거 밀도 및 주택 유형별 인구 배분 기준을 제시하여 인구수에 근거, 도시의 면적부터 주택의 평형별 세대수까지 산출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2. 높이 규제는 용적률이 도입되기 전까지 도로 등 기반 시설 용량 대비 토지이용 강도를 규제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3. 박일향·전봉희, “1950-1970년대 도시미화를 위한 서울 간선도로변 고층화제도의 사적 고찰”, 『대한건축학회 논문집 - 계획계』 35(10), 2019, pp.41~52. *환경과조경421호(2023년 5월호)수록본 일부 유영수는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로재와기오헌에서 건축 실무를 경험했다.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도시디자인 및 사회과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며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병행했다. 현재는 인천대학교 도시건축학부에서 법, 제도, 현대 도시 설계 이론, 스튜디오를 가르치고 있다. 건축과 도시를 아우르는 스케일에서 개별적인 공간 현상과 법제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고, 계획과 디자인의 역할을 확장하기 위한 이론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 유영수
  • [어떤 디자인 오피스] 동심원조경기술사사무소 조경 본연의 가치를 퍼트리는 구심점
    네 개의 동심원 우리는 안계동 대표 휘하 네 개 오피스가 모인 공동체다. 동심원조경기술사사무소(이하 동심원조경)는 3개 설계실(설계1실, 설계2실, 설계3실)과 동심원건설로 구성된다. 어느 실은 실시설계를 주로 맡고, 어느 실은 계획을 주로 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지 않는다. 우리는 동심원이란 이름하에 네 개의 회사처럼 운영된다. 그러다 보니 본인이 속한 실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물론 같은 회사 구성원으로서 함께할 때도 있고, 때론 서로 선의의 경쟁을 펼친다. 각 실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막내들에게 동심원조경의 매력이 무엇인지 물어봤다. 유연한 1실 강하고 매콤한 멤버들이 모여 있다. 기본구상부터 실시설계, 모델링, 현장 답사 등 설계의 전 과정에서 손발을 맞춰 움직인다. 그냥 이것저것 다 해보면서 정신없이 배우는 중이다. 1실의 매력은 ‘유연함’으로, 다양한 변수에 맞춰 빠르게 대처하고 업무 집중도를 높여 야근을 줄이려 노력한다. 매년 5월 전통 정원 답사를 다니고 있는데, 언젠가 1실의 전통 정원 답사기를 쓰고 싶다. (김혜빈) 섬세한 2실 깐깐하고 까다로운 멤버들이 모여 있다. 작은 실수도 용서되지 않고 높은 완성도를 위해 철저한 검토 과정을 거친다. 디자인도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맞게 까다롭게 작업해 만족도는 높은 편이다. ‘예리함’과 ‘섬세함’을 무기로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팀이다. (이우근) 갓생의 3실 모든 멤버가 ‘갓생’(god+생)을 살고 있다. 설계는 물론이고, 일 외의 시간에서도 열정적으로 저마다의 삶을 만들어 나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매 프로젝트를 매우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때문에 워라밸이 환상적인 팀이다. 높은 업무 집중도와 공간에 대한 열린 사고방식으로 설계를 구현할 수 있고, 갓벽(god+완벽)한 디자인을 만들어낸다. (송재안) 동심원건설 동심원건설은 현재 한창 현장에서 바쁘게 시공 중이라 차마 소개 글을 요청하지 못했지만 누구보다 치열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상급자 혹은 각 실에 대한 찬양에 가까운 칭찬을 가급적 배제해달라고 요청했는데, 다들 은연중에 본인이 소속한 실을 최고라 표현했다. 지금까지 100여 명의 직원이 동심원조경을 거쳐 갔고 현재 20년 근속기념 금메달 가진 사람 5명, 10년 근속 기념 황금열쇠(10돈)를 가지고 있는 사람 10명을 포함해 총 25명이 근무 중이다. 회사에 고인물(?)이 좀 많은 편이지만, 우리를 거쳐 간 이들은 조경계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현재 설계사무소를 운영하거나 교수로 활동하며 조경 분야에서 한가락 하는 중이다. 동심원의 만듦새 동심원에서 일해요 조경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 ‘동심원에서 일해요’라고 말하면 ‘유치원에서 일하세요?’라고 묻지만, 조경하는 사람들은 ‘아, 동심원’이라고 답한다. 회사 역사가 오래됐고, 알려진 작품이 많다 보니 조경계에서는 아는 이들이 많다. 그래서 슬쩍 (내가 하지 않았지만) 유명한 프로젝트를 말하며 ‘이런 것도 저희가 했어요’ 하며 약간의 자랑도 가능하다. 유명한 작품이 꽤 있다 보니, 동심원조경이 많은 설계공모에 당선됐다고 생각한다. 물론 서울숲, 춘천 캠프페이지 등 유명한 당선작들이 있지만, 당선작 개수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우리도 설계공모에서 숱하게 떨어졌다. 설계공모 당선의 문턱을 기웃거리지만, 우리의 설계에는 약점 아닌 약점이 있다. 화려하지 않고, 기능에 충실하며, 대상지 이외 주변까지 연결하는 실질적 문제에 매달리며 설계를 하지만, 잘 포장(?)하는 것에 약하다. 대신 당선작으로 선정돼서 만들어지면 얘기가 달라진다. 실질적 문제를 거듭 고민하기 때문에 설계공모에서 계획했던 플랜과 최종 플랜이 거의 다르지 않다. 그리고 오래 사랑받는다. 만듦새를 위한 원칙 동심원조경은 설계의 일관된 원칙이 있다. 첫째 지형과 땅이 가진 특성을 꼼꼼하게 읽어내는 땅에 대한 책임감, 둘째 변화하는 삶을 담아내는 진화하는 유연함, 셋째 과도한 디자인과 낭비적 디자인을 경계하는 실용과 절제, 넷째 시공 과정을 이해하고 현장에 적합한 해법과 디테일을 중시하는 실천적 새로움이다. 이런 원칙을 토대로 설계를 진행하다 보니 설계 26년 차인 나도 아직 대표에게 디테일에 대한 검토와 지적을 받는다. 우리의 프로젝트 동심원조경은 지금까지 500여 개의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단지 내가 참여한 프로젝트가 적을 뿐 대표작은 손에 꼽기가 어려울 정도로 너무 많다. 난지 한강 공원, 서울국제금융센터, 서울시청, 노들섬, 화담숲 2차 설계, 사우스케이프 오너스클럽 골프 코스와 빌라, 래미안 신반포팰리스 등 시간과 지면만 주어진다면 계속 늘어놓을 수 있지만 특별히 엄선한 대표작부터 작년에 준공한 최신작까지 시간순으로 살펴본다. 월드컵 평화의공원(2002) 서울 월드컵경기장 대회 시설의 일부로 주변의 난지공원, 하늘공원 등과 차별화된 문화 활동 중심의 도시공원으로 조성했다. 월드컵경기장의 축과 직교하며 호수변을 따라 원호 형태로 조성한 광장에서는 수변음악회, 정원박람회 등 다양한 문화 행사가 열린다. 율수원(2013) 경상도 사대부가 고헌 고택을 확장, 개축한 전통 한옥 숙박 공간이다. 전통 조경을 제대로 구현해보자는 목표 아래 설계부터 시공까지 진행한 프로젝트다. 전통 사상과 관습을 토대로 식재 수종을 선정하고 방위에 따라 배식, 전통적 소재와 기법을 사용한 포장, 첨경물 등을 설치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2014)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는 유기체적 건축물의 형태와 외부 공간이 잘 어울리도록 경계를 허무는 디자인에 초점을 두었다. 지상에서부터 건축물의 옥상까지 공원의 흐름이 이어진다. 경의선숲길(2015) 경의선 복선화 사업으로 생긴 유휴 철도 부지를 공원화한 선형 공원으로 풍부한 녹음을 제공한다. 도시와 단단하게 연결되어 시민들의 편리한 접근도 가능하다. ‘연트럴파크’라고도 불리는 공원은 활기찬 도시 문화를 느낄 수 있는 시민 휴식 공간이다. 부산 래미안 장전(2017) 부산에서 드문 평지형 단지의 장점을 최대한 이용해 시원하게 뻗은 통경축을 확보한 선형 공원을 조성했다. 구간별로 잔디광장·숲·야외카페·멀티폰드를 설치해 다채로운 여가 활동이 일어나는 일상적 공간으로 만들었다. 성문안 CC 클럽하우스(2022) 2022년 9월 준공했으며 클럽하우스 주변 및 암벽면 설계와 시공을 진행한 현장이다. 깊은 계곡 속 와일드 가든이라는 콘셉트로 건축물과 야트막한 돌산에 둘러싸인 지형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도록 계획했다. 우리의 공간 대형 공원 첫 당선작, 서울숲 2000년대 초 밀레니엄 공원 기본계획 및 설계와 평화의 공원 설계를 진행했지만, 대형 공원 설계공모 첫 당선작인 서울숲은 우리에게 의미 있는 작품이다. 2002년 마침 성수동으로 사무실을 옮겼고, 이듬해 설계공모에 당선되며 설계를 진행했다. 꼬맹이 시절이라 설계에 대한 참여는 적었지만 시공 담당자와 친한 덕분에 공사 전 부지를 자주 드나들며 시공 과정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 이후에도 근처에서 일하며 서울숲의 변화를 가까이에서 봐왔다. 세월이 흐르며 지켜본 서울숲에서는 공간이나 시설의 물리적 변화보다는 사람들의 공원을 활용하는 방법, 문화가 변하는 것이 보인다. 유튜브 영상에서 어떤 댄서가 춤추는 걸 보면서 ‘저거 서울숲에서 찍었네!’ 하며 소릴 질렀다. 아직도 이런 장면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만든 지 20년 훌쩍 넘은 공원이 성수동의 힙한 문화와 함께 하는 모습은 설계자들에게 큰소리칠 기회가 된다. 동심재와 푸르너스 우리만의 특별한 직원 복지도 있다. 하나는 무료로 마실 수 있는 커피다. 원래 동심원조경 사옥으로 쓰였지만, 지금은 카페로 활용 중인 푸르너스에서 직원들은 하루 한 잔의 커피를 무료로 마실 수 있다. 점심 식사 후 푸르너스에서 내린 커피를 들고 서울숲을 거쳐 사무실로 돌아오는 건 동심원조경 직원들의 소소한 점심 루틴이다. 다른 하나는 춘천호 근처에 동심원조경 직원들의 휴양소 ‘동심재’가 있다. 직원들은 한 달에 한 번 사용 신청을 할 수 있다. 주말은 언제나 예약이 꽉차기 때문에 잽싼 예약이 필요하다. 필요한 시설은 다 갖춰져 있어, 주변 풍광 아름다워, 사람 없어, 캠핑이 이에 비할까. 꽃놀이, 겨울철 빙어 잡이, 불멍 등 계절별로 모든 종류의 휴식이 가능하다. 게다가 보트를 타거나 낚시도 할 수 있다. 주변 사람의 방해 없이 놀 수 있다 보니 언제나 인기 만점이다. 동심원조경기술사사무소는 땅이 가지고 있는 힘을 충실히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과도한 수사적인 디자인을 경계하고 이용자가 체감할 수 있도록 변화하는 삶을 담아내는 설계를 지향한다. 더 나은 삶의 문화를 이끄는 공간을 만들고 있다.
  • [모던스케이프] 공공의 정원
    202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가 개막했다. 이번 박람회는 2013년 첫 개최 이후 10여년 만에 이루어진 것인데, 그 사이 정원은 대중에게 상상 이상으로 가까워졌다. 대한민국 국민의 주거가 아파트 일색이 되면서 정원은 그저 중장년의 노스탤지어가 될 것이라 여겼는데, 그 예상 또한 보기 좋게 빗나갔다. 다만 지금의 정원이 과거와 다른 건 개인 주택의 부속 공간을 넘어 대중이 함께 향유하는, 이른바 공공 정원이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공공 정원으로 직역할 수 있는 퍼블릭 가든(public garden)은 새로운 용어가 아니며, 도시의 공공 공원(public park)만큼이나 오래된 개념이다. 정원이론가 황주영은 왕실과 귀족 소유의 정원(garden)과 파크가 대중에게 개방되어 공원이라는 도시 시설로 치환되는 과정은 물론, 도시의 다양한 녹지 공간의 발전 양상을 문화사 시선으로 통찰한 바 있다. 스퀘어, 산책로, 공동묘지, 위락 정원 등의 공원·녹지가 도시에 탄생하고 진화하며 궁극에는 근대 도시에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장치가 되기까지 그 흐름을 사회와 문화의 콘텍스트로 설명하는 그의 글을 읽고 나면, 정원과 공원이 유럽의 근대화 과정에서 얼마나 복잡하게 분기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유럽의 현상과 형식을 학습하며 도시 근대화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은 동아시아의 여느 국가처럼 근대 도시 시설의 이식 과정이 비교적 단순했다. 공원과 공공 정원이 함께 들어왔지만, 우리는 기능과 성격을 구별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식민지기를 맞이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후, 대한제국의 지식인들은 여러 경로로 유럽, 중국, 일본, 미국으로 넘어가 다양한 신문물을 경험했다. 그들은 서구 공원을 방문하고 시민, 자연, 공공, 위생에 관한 생각을 기록으로 남겼다. 더 나아가 서재필, 윤치호 등은 독립협회를 결성하고 독립공원 조성을 시도했지만, 자금 부족으로 계획대로 만들지는 못했다. 이후 단체마저 해체됐기에, 도시 녹지의 성격을 어떻게 규명하고 실천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논의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반면, 외지인은 허락된 구역 안에 곧바로 도시 녹지를 조성할 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퍼블릭 가든이었다. 1883년 상하이를 거쳐 조선에 입성한 러시아 건축·토목기술자 사바친(Afanasy Ivanovich Seredin-Sabatin, 1860~1921)은 1888년 ‘대한조선인천제물포각국조계지(大朝鮮仁川濟物浦各國租界地)’ 계획도를 작성했고, 러시아인, 독일인, 일본인, 영국인 거류 구역 사이에 퍼블릭 가든을 구획했다. 지금은 자유 ‘공원’이 됐지만 계획 당시 개념과 이름은 퍼블릭 가든이었다. 퍼블릭 가든은 외교관이자 의료선교자였던 미국인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이 작성한 서울 정동의 조계도에도 등장한다. 정동극장 자리에 있던 퍼블릭 가든은 테니스 코트로 사용됐다. 참고문헌 이시카와 미키코 저, 이용태 역, 『도시와 녹지』, 도서출판 현진기획, 2004. 황주영, 『근대적 발명품으로서 도시공원: 19세기 후반 런던과 파리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조선총독부, 『재조선각국거류지평면도(在朝鮮各國居留地平面圖)』, 1911. 인천부, 『인천부사』, 1933. 그림 출처 1. 인천부, 『인천부사』, 1933. *환경과조경421호(2023년 5월호)수록본 일부 박희성은 대구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한중 문인정원과 자연미의 관계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에서 건축과 도시, 역사 연구자들과 학제간 연구를 수행하면서 근현대 조경으로 연구의 범위를 확장했다. 대표 저서로 『원림, 경계없는 자연』이 있으며, 최근에는 도시 공원과 근대 정원 아카이빙, 유네스코 세계유산 제도와 운영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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