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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으로 바라 본 환경정치
“새만금 공사의 피해를 뻔히 알면서 전북도민에게 환상을 심어주는 이유는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 뿐이며, 새만금이 개발되면 전북도의 발전은 20~30년은 늦춰질 것이다”지난 3월 대법원의 판결로 4년 7개월간 끌어온 법정 싸움에 종지부를 찍고, 새만금의 물막이 공사가 재개 되면서, 전북여성단체협의회 이강실 목사가 남긴 발언이다.여기서 “정치적인 이유 뿐!” 이라는 매우 강렬한 평가를 따라 가보기로 한다.
새만금 사업은 지난 1991년 노태우 정권에서 시행된 국책사업으로 애초 1998년 완공을 목적으로 하였으나, 현재 물막이 공사조차도 완공을 못하고 완공목표일 보다 벌써 8년여가 지나고 있으며, 오랜 법적 싸움으로 표류해 왔다. 그 이유는 무엇인지, 이 싸움의 과정에서 정치의 힘 에 대항하여 바로서기 위한 환경단체의 정치적 움직임은 무엇이었으며, 각 정치 세력의 대안정책을 통해 환경과 정치의 관계성을 엿보는 기회를 가져 보자.
새만금 사업이란새만금 사업이란 전라북도 군산의 비응도, 내초, 옥구, 옥서, 회현, 대야, 옥도(이상 7개), 김제의 광활, 죽산, 만경, 청하, 성덕, 부량, 진봉(이상 7개), 부안의 계화, 동진, 하서, 변산(이상 4개)에 총길이 33㎞의 방조제를 축조해 총면적 40,100ha의 토지를 조성하는 사업이다. 이 사업으로 인한 효과는 일단 여의도의 140배에 달하는 국토의 확장이며, 이 국토는 우량농지조성, 수자원 확보, 관광지 개발이라는 세가지 혜택을 얻게 된다고 홍보되었다.
하지만, 환경 파괴를 이유로 환경단체의 반발을 사게 되었으며, 시화호 오염을 계기로 결렬한 반대운동에 부딪히며, 사업은 수많은 논쟁 속에 가다서다를 반복하게 되었다. 지난 법정 다툼의 과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2001년 8월 22일 환경단체와 지역 주민들이 국무총리와 농림부장관을 상대로 정부조치계획 무효확인을 요구하는 “새만금 소송”을 내면서 법정싸움이 시작되었다. 법원에서 환경단체는 새만금 갯벌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1심 판결 전까지 새만금 방조제 공사를 일시중단 시켜달라”며 집행정지 신청을 냈고, 이에 농림부는 충분한 검토를 거쳤다며 지속적으로 사업을 추진할 것을 밝히며 대립한다. 이에 양측은 각 분야 전문가들을 동원하여 치열한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으며, 결국 2003년 7월 `새만금 방조제 공사 일시중단’ 결정이 내려졌다. 당시 법원판결에 항의하는 의미로 김영진 농림부장관은 장관직에서 물러났고, 새만금 지역 주민들의 여론은 찬반으로 더욱 양분화되었다. 서울행정법원 재판부는 민감한 여론의 동향을 감안하여 2005년 1월 “다시 2심, 3심으로 올라가게 되면 소모적 논쟁이 지속된다”며 “민관 공동위원회를 구성해 새만금 간척사업 용도를 결정하라”는 조정권고안을 냈으나, 농림부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조정이 무산되었으며, 결국 2005년 1월 서울행정법원은 1심 최종에서 “사업을 원점에서 부터 재고하라”는 조정 권고 판정을 내렸다. 당시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은 “전북 도민의 염원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라며, 법원에 의해 국책사업들이 좌지우지되고 있는 것에 대해 불만을 드러냈으며, 민주노동당과 한나라당은 “갯펄을 살려 나가자”며 여당에게 다시 항소를 하지 말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5년 12월 서울고법은 2심 판결에서 1심을 파기하고 원고패소 판결을 내리면서 이를 뒤집었다. 재판부는 식량안보의 필요성을 받아들여 새만금농지조성의 타당성을 인정했고, 담수호 수질문제도 적절한 대응조치로 유연하게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그리고 이번 3월 대법원 3심에서는 사업에 하자가 없다며 사업을 계속하라는 판결을 최종적으로 내렸다. 그러나 대법원은 보충의견을 통해 “법원은 행정처분의 무효나 취소 사유가 있는지를 법적인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이지 새만금 사업의 타당성을 정책적 관점에서 평가하는 게 아니다. 나중에 수질·해양 환경상 영향으로 이 사업을 계속 시행함이 적절치 않을 정도의 사정변경이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도 했다. 결국 대법원의 판결은 내용적으로 보았을때 어느 한쪽의 절대적인 승리라고 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새만금 주요 이슈 두가지그럼 새만금 무엇이 문제인가. 새만금을 둘러싼 이슈 중 우선 꼭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다음 두 가지이다.- 새만금은 사업 추진 목적이 매우 불명확해 보인다. 식량 안보인가? 전북 개발인가? 농림부는 새만금 사업이 식량안보를 위한 쌀 생산을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농림부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도는 28.5%밖에 안되기 때문에 새만금을 간척해서 쌀을 생산할 농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또 물부족 국가인 우리나라에서 수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새만금호가 필요하다고 한다.환경 단체는 현재 농지가 없어 쌀을 생산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낮은 쌀 소득으로 논을 밭으로 전환하고 휴경논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므로, 이 문제는 제대로 된 농정으로 바로잡을 일이라고 대응하고 있으며, 수자원 확보를 위한 경제 분석 차원에서도 수질 유지를 위한 비용이 더 크다며 반발하고 있다. 이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은 많이 엇갈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또한 농경지만으로 사용하겠다는 농림부의 약속이 있었지만, 그를 믿는 사람은 드물다. 전라북도는 내부개발지를 복합산업단지로 활용하고자 하는 욕심을 가지고 있으며, 실제 전 유종근 전북도시사는 ‘복합산업단지’가 자신의 소신이라고 까지 언론에서 밝힌 적이 있으며, 노무현 대통령도 새만금이 애초 밝혔던 사업목적과 다르다는 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번 대법원의 판결로 정부는 올해 안으로 새만금 내부의 토지이용계획을 확정할 예정이며, 국토연구원 등 5개 전문기관은 관광개발, 고부가가치 농지 조성, 신산업·물류단지 건설 등의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 논과 갯벌의 가치 논쟁, 새만금의 갯벌을 살려라. 환경단체는 Nature지에 게재된 갯벌가치가 농지보다 100배 높다는 주장을 인용하는 것에 반해, 농림부는 그것은 우리나라의 갯벌이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며, 우리나라 논은 갯벌에 비해 1.73배나 가치가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문가들의 견해도 농지가 갯벌보다 1.4∼2.64배 우월하다는 입장에서 갯벌이 3.3∼100배 높다는 입장까지 매우 다양하게 대립되어 있다.농림부는 간척을 한 후에 새롭게 갯벌이 생기고, 이에 대한 국내외의 사례가 있다고 하지만, 새만금 사업으로 우리가 잃게 되는 새만금 갯벌은 전국 갯벌의 8%인 20,800ha에 달하고, 갯벌은 대체 및 복원이 어려운 희소성 있는 국토로서 새만금 방조제 완성 20년 후 바깥으로 약 628ha의 신규 갯벌 형성이 예측되나 그 규모는 현재의 약 3%에 불과하다는 해양수산부의 자료와 대립된다.
환경론자들의 환경정치는 실패?!대법원의 패소판결로 환경단체들은 매우 참담했을 것이다. 새만금 사업은 지속되며, 결과적으로 실패했다는 좌절감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새만금을 살리기 위한 환경단체들과 지역 주민들의 활동들이 이러한 결과만을 놓고 의미가 없는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우리 조경분야의 정치적 실천과 비교해 본다면 이번 새만금에 대한 법적인 결과의 실패를 조롱할 처지가 못된다. 공조와 저항, 타협의 과정이 살아있는 정치적 실천은 그 결과와 별개로 매우 의미있는 행동으로 평가할 만하다.시청앞 서울광장에 원형의 잔디가 그려졌을 때, 많은 조경설계가들은 웅얼거렸다. 공개적이고 강력한 발언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 광장의 조경을 보고 “그것이 조경이다”라고 이야기 되는 것에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광장의 사회적 의미를 강조하며 제기되었던 많은 비판적인 기사 속에서 서울광장의 조경공사는 민주성을 가로막는 한낱 장애물로만 비추어 졌으며, 조경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논의들은 사회적 논의 앞에 숨을 죽였다. 조경분야는 이 사회적 논쟁 속에서 지지나 비판 등의 참여도 없이, 우리의 의지가 어떠하다는 의견도 없이, 단순히 평가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지 않았는가.
새만금 물막이 공사의 재개는 다양한 논의를 다시 촉발시키고 있다. 기존의 강력한 비판과 지지의 대립이 계속되는 것은 물론이고, 현실적인 대안 정책을 내기 위한 토론회와 문제제기가 시작되었다. 정치적 실천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의 역관계에서 시민사회의 역량이 부족함을 확인한 것”, “운동이 정치의 벽을 넘지 못했다는 사실을 냉정히 평가해야 한다”, “환경운동이 국책사업 반대에 지나치게 힘을 쏟는 바람에 일반 시민들의 생활상의 문제를 놓치고 있다” 등 분석과 자성의 목소리도 다양하다.지자체 선거를 앞두고 후보들에 대한 이해관계가 분석되기도 한다. 각 정당 전라북도당의 성향은 열린우리당, 민주당, 한나라당이 개발론의 입장이며, 민주노동당이 환경론에 있다.
지난 2월 27일 개최된 민주노동당 전북도당 새만금 대안 발표회에서는 “새만금 방조제 물막이 공사를 무조건 강행하려는 계획을 중단하여 2.7km 터진 구간을 유지하고, 4공구의 일부 구간도 다시 터서 해수유통을 확대하는 것을 전제로 한, 새만금 갯벌과 바다의 생태친화적인 이용 방안 확대 프로그램”을 발표하였다. 이 자리에서 전승수 교수(전남대 지구환경과학부)는 “새만금갯벌을 해양생태문화관광지구로 국가가 지정하여 종합적인 계획과 이행방안을 수립” 할 것을, 이필렬 교수(방송통신대, 에너지대안센터 대표)는 “기존 방조제를 활용한 풍력에너지 단지 조성”을 제안하였다.환경운동연합은 지난 3월 8일 ‘위기의 새만금, 희망은 없는가’라는 주제로 긴급토론회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장재연 소장(시민환경연구소, 아주대 교수)은 “전라북도지속가능발전지원특별법’을 제정하고 이를 위한 ‘전라북도지속가능발전신구상기획단’을 설치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 틀 안에서 새만금사업의 추진방향을 논의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또한 환경운동연합은 “방조제가 막히면서, 그 영향에 따라 하늘과 땅이 변하면서 일어나는 수많은 죽음의 행렬들을 정리해서 국민들에게 전하겠다.”며 앞으로의 활동에 대한 다짐의 글을 올렸다.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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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과 정치
정치 안의 조경조경은 ‘자연경관을 만드는 것’에서 가치를 찾을 수 있다. 도시의 건설은 자연의 훼손을 야기했고, 이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조경이 더욱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조경의 역사는 바로 도시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연 속의 존재라는 사실을, 인간은 자연을 지키고 즐기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조경의 역사는 보여준다.그러므로 조경의 역사는 멀리 고대 도시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심지어 ‘하늘정원’까지도 고대 도시에 만들어졌다. 기원전 500년 무렵, 신(新)바빌로니아의 왕인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왕비인 아미티스를 위하여 수도인 바빌론의 성벽(城壁) 위에 ‘하늘정원’을 건설했다. ‘고대 7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이 정원은 엄청난 노력의 산물이었다. 성벽 위에 많은 양의 흙을 가져다가 쌓고 여기에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들었다. 물을 대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더욱이 이 지역은 고대에도 메마른 곳이었다. 물탱크와 물펌프를 만들어 유프라테스 강의 물을 끌어들였다고 한다. 이 정원을 ‘지극한 사랑의 결정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그렇게만 보는 것은 너무 낭만적인 것 같다. 피라미드나 만리장성의 건설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던 것처럼 이 정원을 위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피와 땀을 흘려야 했을 것이다.
근대에 들어와서 조경은 도시 건설의 필수적 요소가 된다. 물론 고대에도 중세에도 조경은 이루어졌다. 예컨대 조선의 서울에서도 조경은 이루어졌다. 가장 좋은 예는 서울의 좌청룡이었던 낙산에 나무를 심어 숲을 가꿨던 것이다. 서울의 동쪽 경계를 지키는 산이었으나 그 세가 약했기 때문에 나무를 심어 인위적으로 그 세를 키우려 했던 것이다. 이것은 ‘풍수적 조경’이었다. 또 다른 예로는 청계천 둑 위에 버드나무를 심었던 것을 들 수 있다. 두 줄로 길게 늘어선 버드나무들이 살랑대는 모습이 일품이었다고 전하거니와, 이것은 둑을 지키기 위한 ‘토목적 조경’이었으며, 또한 도시의 풍치를 높이기 위한 ‘문화적 조경’이었다. 그러나 이런 예에도 불구하고 조경이 도시 건설의 필수적 요소로 자리잡는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다. 근대 도시는 대대적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건설되었으며, 바로 이 때문에 조경의 필요성이 크게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근대 도시는 무서운 도시였다. 런던의 근대 역사가 잘 보여주듯이 근대 도시 속에서 사람들은 시나브로 죽어갔다. 엥겔스의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는 이 비참한 역사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다. 조경은 그저 보기 좋게 ‘인공적 자연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무서운 근대 도시를 즐겁고 쾌적한 도시로 만들기 위한 필수적 실천으로 확립되었다. 이것은 근대 도시에서 조경이 ‘생태문화정치’의 핵심으로 떠올랐다는 것을 뜻한다. 뉴욕의 센트럴파크, 런던의 하이드파크, 파리의 뤽상부르공원 등은 이런 사실을 잘 보여준다. 조경은 시민을 위한 도시, 자연이 살아 있는 도시를 만들기 위한 핵심적 실천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조경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지만, 이에 대한 정치의 대응은 여전히 수단적 차원에 머물고 있지 않은가? 정치인들은 조경을 농락하고 조경 전문가들은 거기에 뇌동해서 도시를 계속 망가트리고 있지는 않은가?
사라진 청계천청계천복원사업은 한국의 조경사에서 새로운 장을 연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그런 면을 가지고 있다. 일제 때부터 시작되어 박정희에 의해 완공된 청계천고가도로를 뜯어내어 서울 도심의 면모를 일신했다는 점에서 청계천복원사업은 확실히 한국의 조경사에서 새로운 장을 연 것으로 볼 만하다. 특히 도심 수변공간의 중요성을 크게 일깨웠다는 점에서 청계천복원사업은 큰 의의를 갖는다.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원칙’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청계천이란 무엇인가? 이 점을 올바로 이해하지 않으면 조경은 ‘인공적 자연을 꾸미는 행위’라는 저열한 수단적 차원을 넘어서기 어려울 것이다. 청계천은 이른바 ‘600년 역사도시 서울’을 대표하는 자연유적이자 토목유적이다. 인왕산과 북악산 줄기의 계곡이 청계천의 발원지이다. 중랑천으로 흘러 들어가는 이 자연하천을 커다란 ‘하수구’로 삼아서 서울이라는 도시가 건설되었던 것이다.그런데 청계천만으로 서울의 빗물과 하수를 모두 배수할 수는 없었다. 큰비만 오면 청계천은 넘쳐흘렀다. 그리고 오랫동안 준설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청계천의 범람은 더욱 자주 일어나게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조는 즉위 36년인 1760년 3월에 대대적으로 준설하고 둑을 정비했다. 바로 이 때 둑 위에 버드나무를 심었다. 그 아름다운 경관을 정조 때의 실학자인 유득공은 다음과 같은 한시로 노래하기도 했다(임종국, 「한국사회풍속야사」, 서문당, 1980, 69쪽).
두 줄기 푸른 버들 가이 없는데 (兩行綠柳舊無邊)저물어 돌아가니 아득만하다 (日暮人歸只暗然)
청계천복원사업은 이런 역사와 자연을 조금도 존중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너무나 큰 문제를 안고 있다. 이 때문에 청계천복원사업은 전형적인 ‘개발주의 조경’이 되고 말았다.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시민위원들이 이 문제를 조금이라도 바로잡기 위해 애를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명박 시장과 양윤재 당시 청계천복원추진단장은 올바른 복원에는 관심이 없었다. ‘복원’을 내걸고 ‘개발’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해서 청계천은 완전히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새롭게 ‘명박천’이 들어섰다. 그 특징은 세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홍 성 태 Hong Seong Tae상지대 교수, 참여연대 정책위원장(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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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미군기지 공원화 사업 짚어보기
‘용산을 얻는자 서울을 얻으리라’ 모 일간지에 소개된 기사제목이다. 5월31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에서는 용산 미군반환부지에 대한 활용방안을 두고 파격적인 아이디어들을 쏟아내고 있다. 특히 서울시장 출마를 앞두고 있는 정치인들에게는 용산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차기 대권도 고려해 볼 만한 여지가 있기 때문인지 여러 가지 방안들을 적극적으로 내 놓고 있다. 지난 2006년 3월 14일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포스트 서울포럼’ 토론회에서는 용산미군기지를 두고 ‘국제적인 금융센터로 개발하자’, ‘상하이 푸동 특구와 같은 비즈니스 거점으로 조성하자’, ‘서울의 녹지축으로 남겨두자’라는 의견 등 갖가지 활용방안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제안들이 정치적인 배경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난개발을 막고 친환경적으로 체계적인 개발을 경쟁적으로 주문하고 있다는 데에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만하다.하지만 정부에서는 이미 용산 미군반환부지에 대해서 민족역사공원을 조성하는 것을 골자로 한 공원화 사업을 발표한 상태이다. 이에 따라 국무총리실 소속 국무조정실 산하에 ‘용산민족 · 역사공원건립추진위원회’가 발족되었으며 지금까지 3차례의 회의가 진행되었다. 노무현 대통령도 국회시정연설을 통해 “용산의 미군반환부지를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국가주도의 민족역사공원으로 조성하겠다”고 발표한 만큼 용산미군기지를 공원으로 조성한다는 원칙에는 변화가 없을 것 같다.따라서 본고에서는 용산 미군기지에 대해 이전결정 이후 공원화하기까지의 과정 및 추진현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용산미군기지 이전배경1882년 청나라 군대가 용산에 주둔한 이래 지금까지 서울 도심에 외국군이 주둔하고 있는 문제가 지속되어 왔다. 이에 1987년 노태우 대통령후보가 용산미군기지 이전을 공약으로 제시하였고, 미국 측에 이를 요구하였다. 미국도 주한미군의 안정적 주둔여건 확보와 한·미군사협력 관계를 유지·강화시키기 위해서 한국측 요구가 합당하다고 판단하였고, 1988년 3월 용산기지 등 서울도심에 위치한 미군기지 이전문제에 관해 한·미 양국간 협의가 시작되었다.1990년 한·미간에 합의각서와 양해각서가 체결되어 협의를 추진하였고, 1992년에는 용산 골프장과 행당동 소재 이사벨, 서울클럽 등이 한국측에 반환되었다. 그러나 과다한 이전비용과 세부이행에 대한 합의 지연으로 인하여 1993년 우리 정부는 사업여건이 성숙할 때까지 이 사업을 보류할 것을 미국측에 요청함으로써 사업진행이 중단되었다.2001년에는 용산미군기지내 미군 숙소 건립문제가 사회적 이슈화가 되어 한 · 미간에 용산미군기지 이전계획이 다시 논의되기 시작하였으며, 그 결과 2004년 8월에는 용산기지이전 및 LPP 수정협의서가 한·미간에 가서명되었고, 2004년 10월 26일에 최종서명이 되어 2004년 12월 9일 국회에서 의결되었다.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2월 용산반환부지는 녹지로 유지하되, 지상·지하를 입체적으로 잘 활용하여 동북아 명소로 개발하겠다는 구상을 개진하였으며, 이후 국무조정실 주한미군대책기획단에서는 공원화기획자문위원회를 설치하여 공원을 조성하는 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했고(10차례 회의 개최후 2005년 7월 해산), 마침내 정부는 국가주도로 용산기지에 공원 조성을 추진키로 하고, 2005년 10월 국회 시정연설을 통해 “용산의 미군반환부지를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국가주도의 민족역사공원으로 조성하겠다” 고 발표했다.
용산민족·역사공원건립추진위원회 용산민족·역사공원건립추진위원회는 지난 2005년 11월 10일 국무총리실 소속 국무조정실 산하에 설치되었다. 역사 · 민족, 문화, 건축, 도시계획, 조경 등 각계의 민간전문가 16명과 총리, 관계부처 장관, 서울시장 등 정부위원 1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공원의 주제 및 명칭, 공원 기본구상 등 용산공원 건립 추진에 관한 중요정책을 심의하게 된다.지금까지 총 3차례에 걸쳐 회의가 진행되었는데 1차회의(2005년 11월 10일)에는 위원회 운영계획과 용산기지 일반 현황 등이 논의 되었으며, 2차회의(2005년 12월 15일)에는 용산공원 건립추진위원회 운영세칙과 2006년도 용산 공원건립 추진 업무계획, 반환부지내 국방부 활용계획 등이 논의되었다. 지난 1월 23일 진행된 3차회의에서는 2차회의 이후의 활동 결과를 보고 받고, 주제·명칭, 조경·건축, 복합개발 등 3개의 소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2004년 2월 공원화기획자문회의에서 논의된 각종 논의 결과를 종합한 공원 조성 기본방향을 심의하였다.
공원조성 기본방향3차회의에서 심의된 공원조성 기본방향에 따르면, 용산 미군반환부지는 지상시설을 최소화하는 녹지중심의 공원으로 복원하며, 특히 남산과 한강을 연결하는 녹지축을 유지할 예정이다. 남북으로 남산-해방촌-용산공원-한강을, 동서로는 한남뉴타운과 용산역을 연결할 예정이고, 향후 서울시 계획대로 남산과 종묘공원이 연결될 경우 강북 전역에서 녹지축을 따라 한강으로 이동이 가능할 전망이며, 주변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지상·지하 복합개발이 검토될 전망이다.그리고 용산공원은 착공은 있으나 준공은 없는 ‘늘 자라나는 공원’, ‘도시와 함께 대화하는 공원’으로서 장기간에 걸쳐 단계적으로 조성될 계획이다. 용산 미군기지가 완전 이전되는 2008년 말까지 준비 및 계획을 완료하고, 2015년까지 공원기반을 형성할 예정이다.정부는 위에서 논의된 기본방향을 바탕으로 전국민이 함께 참여하는 축제 속에 공원이 조성되도록 아이디어 공모 및 각종 토론회 등을 통해 공원 구상을 구체화하여 나갈 계획이다.
정리 : 손석범 기자 자료 : 용산민족·역사공원건립추진위원회(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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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위의 조경
5·31 지자체 선거를 앞두고 열기가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후보자 등록이 한창이고 여기저기서 홍보하랴 험담하랴 말들도 많다. 정치인들의 경우 예나 지금이나 조금이라도 플러스 요소가 되는 부분이 있다면 민심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기 십상이었으니 최근 들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으로 떠오르고 있는 환경에 대해 정치가들이 무심할 리는 만무하다. 일반 시민들이 환경에 대해 가장 쉽게 체감하고 느낄 수 있는 생활권 경관에 관여하고 있는 조경분야의 경우라면? 다양한 정치적 권력에 휘둘릴 수도 있고 간섭이나 압박에 쉽게 노출되어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다.이번호 특별기획은 선거특집으로 ‘정치 안의 조경, 정치 위의 조경’을 타이틀로 해 준비했다. 진행하며 청탁을 위해 연락을 취하다보니 관심을 가지면서도 기명으로 정리되어야 하는 민감한 원고에 압박을 느끼기도 하고 어려운 주제에 부담스러워 하기도 했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결국 실무자들에 대한 설문이었다. 실명으로 밝히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설문을 통해 정치권력과 조경에 대한 실무자들의 다양한 생각을 들어 볼 수 있었다.
정치권력과 조경· 권력의 속성상 일정부분 성과를 홍보하고, 과시하기 위하여 공공부문에 이를 반영하고자 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가장 대표적인 가시적 성과로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나 공원 등 대중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상징적 시설을 설치하는 것이 아닐까. 특히 최근 지방분권형 자치제 이후, (선거를 의식하여) 단기간에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평가 받을 수 있다는 측면 때문에 조경의 규모나 물량 또한 많이 늘어나고 있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 정치권력과 조경은 일정부분 서로 필요에 의해서 (좋은 의미에서) 조경이 확대되는 입지이다.· 조경의 입지는 점점 나아지고는 있지만 탄탄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즉, 정치적으로 이용만 당하고 실제적으로 득은 정책입안자나 다른 분야에 빼앗기고 문제가 터질 경우 조경분야에게 떠넘겨져 득은 잃고 실만 챙기는, 실속 없이 덩치만 커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의 생각도 든다.· 많지 않은 예산으로 단 기간에 시민들의 큰 호응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에 타 분야에 비해 정치적 바람을 타고 비교적 빨리 성장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현실에서 아쉬운 부분은 단지 선거나 정치권력자의 정책도구로서 환경적 문제가 중요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조경과 관련된 개인 나름대로의 의지가 있었다 하더라도 조경에 대한 마인드에 의해서가 아니라 결국 그 의도는 치수, 환경정책 측면에서 활용된 하나의 수단이었을 뿐이라는 점이다.
정치적 수단으로서의 조경· 이제는 지자체들이 도시에 앞다투어 친환경 공간을 조성하고 있어 덕분에 전국적으로 과거에 비해 업무도 많아지고 조경가의 참여기회와 폭이 크게 늘었다. 늘어나는 조경인구를 생각하면 어쨌든 긍정적인 일이지만 그보다 우선 우리의 정체성과 전문성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서울의 경우 한강고수부지, 여의도공원, 청계천, 서울숲, 용산공원 등 이젠 초기의 신선함마저 잃을 정도로 예정된 선거후보자들이 정치적인 목적하에 각종 환경/조경 아젠다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 동안에 진행되었던 프로젝트를 볼 때 아쉬운 점은 정책과 사업의 기획, 구상 및 계획단계에서 역량있는 (참다운 방향으로 이끌어줄 수 있는) 조경가의 참여와 정도가 너무도 부족하다는 점이다.· 프로젝트 진행시 나름대로 설계사 입장에서는 매우 강하게 설계개념과 맥락의 이유를 들어 반대해도 이리저리 변경되기도 하고 설계자의 의도와 다른 공간이 생기기도 하며, 전혀 생뚱맞은 시설이 들어서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 대부분 권력자들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며 개인적 취향을 반영할 것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최소한 국가에서 시행하는 프로젝트의 경우 힘있는 정치가나 국회의원이 조경에 대한 확고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거나 조경설계의 의도를 수용할 수 있다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 창출될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조경가의 생각보다 때로는 정치가들의 생각이 더 앞서갈 때도 있으며, 수정과정을 거치다보면 초기안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다. 설계자라고 해서 처음의 주장만을 관철시키기 보다는 최종적으로 어떤 것이 보다 나은 안으로 발전할 수 있는지가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정치적 수단으로서의 대표적 조경 사례로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명박 서울시장의 청계천 복원사업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청계천 복원사업의 역사학적, 생태적 복원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명박 시장의 최대 치적이라는 부타이틀을 차지할 정도로 정치적 의미를 부여받았고, 여러 이견을 무시하고 단기간에 (임기내에) 완공하였으며, 그 복원 아닌 복원에 조경을 앞세웠는데 그렇게 포장해 버릴만한 사업은 아니었던 것 같다.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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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캠프 하야리아(Hialeah) 반환부지를 공원으로 만들자
하야리아 부지의 역사와 시민단체부산의 미군 하야리아 캠프 부지는 역사적으로 많은 수난을 겪은 곳이다. 1911년 조선총독부의 토지수용령으로 일제에 의해 강탈된 후 경마장(1930년)으로 사용되었으며, 중일전쟁 발발 후 일본 군사훈련소(1937년)로 사용되었다. 1945~1950년 미군이 주둔한 바 있으며, 잠시 미군 철수 후 1950년 7월 한국전쟁으로 인해 미군이 공식적으로 주둔하게 되었다.1970년 1월 ‘징발재산정리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근거로 헐값으로 토지보상(당시 땅값과 토지사용료 합쳐서 당시 기준지가의 1/5) 후 지속적으로 미군캠프로 사용되었으며, 1994년 9월 주한미군 주둔군협정(SOFA) ‘하야리아 반환’ 의제가 채택되기도 했다.이후 2002년 3월 한미 연합토지관리계획(LPP)협정 체결로 강서구 녹산으로 이전이 추진되기도 했으나 2004년 8월 제11차 한미 미래동맹정책회의에서 강서구로의 이전은 취소되고 2005년 조기반환이 결정되었고, 이어 부산시 자연녹지 및 근린공원 결정이 고시된 후 같은 해 10월 주한미군기지이전관련 특별법과 12월 하야리아 부지 매각을 내용으로 하는 평택특별법이 통과되기도 했다.2005년 5월에는 부산시에서 기본 및 실시설계 용역이 착수되었고, 같은 해 8월 부대의 폐쇄발표가 있었으며, 9월에는 부산시민 152만명이 무상양여 촉구 서명운동을 펼치기도 했다.2005년 12월 국회 행자위에서는 부지이전 비용의 70%를 정부에서 부담하기로 결정하였고, 2006년 현재, 문화재 지표 및 환경오염여부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질 예정으로, 오는 8월 완전 폐쇄될 예정이다.
이렇게 수많은 논란의 역사속에서 결국 하야리아 캠프는 반환되고 시민공원으로의 조성을 준비중인데, 이 근저에는 부산시민들의 많은 애착과 노력이 묻혀있다. 그간 부산시의 시민들은 다양한 형태로 하야리아 캠프의 반환운동을 비롯해 시민공원에 대한 염원을 담은 시민운동을 펼치기도해 주목할만하다.1988년부터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시민운동단체는 하야리아 부대앞에서 반환을 요구하는 상시적인 시위를 벌여왔으며, 1993년 5월에는 부산진구의회의 하야리아 부대 이전촉구 결의안을 발표하였다. 같은 해 11월에는 민주주의 민족통일 부산연합 자주통일위원회 산하에 ‘미 하야리아 부대 반환과 평화적 전환을 위한 부산연합 연구 소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1994년 11월에는 <부산땅 하야리아 되찾기 운동> 연구 결과 발표 및 시민대책위원회 결성이 제안되었다.1995년 2월 24개 시민사회단체들이 참가하여 ‘부산지역 미군기지 반환을 위한 시민대책위원회 결성준비모임’을 가졌고, 1995년 3월 6일 ‘우리 땅 하야리아 등 되찾기 시민대책위원회’가 정식으로 결성되었다. 같은 해 6월 김영삼 대통령 부산 방문 시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하야리아 부대문제를 정부차원에서 해결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고, 1995년 정기국회에서는 공원용 부지 12만평을 무상양여 하기로 결정하기도 했다.1999년 4월에는 미문화원 반환이 결정됨에 따라 ‘우리땅 하야리아 등 되찾기 시민대책위원회’와 ‘아메리칸 반환을 위한 시민대책위원회’가 <미국점유 부산땅 되찾기 범시민추진위원회>로 통합하기도 하였으며, 1995년부터 2002년까지 꾸준히 매년 인간띠 잇기대회, 토론회, 자료집 발간, 초청강연회, 집회 등 다양한 반환활동을 전개하였다.2000년의 16대 총선에서 출마자들은 하야리아 부지의 시민공원을 공약으로 책정할 정도로 관심을 받기 시작했으며, 2004년 7월에 개최된 FOTA 8차 회의에서는 하야리아 부지 2005년 조기 반환이 발표되었다. 같은 해 9월 8일 73개의 시민사회단체가 참가하여 ‘하야리아 부지 시민공원 추진 범시민 운동본부’를 결성하였고, 11월에 국방위원회를 방문하여 하야리아 등 반환받는 미군기지에 대한 무상양여를 요구하기도 했다.2004년 12월 28일 중앙도시계획위원회는 하야리아 부지 100%를 공원용지 지정하려고 한 부산도시기본계획안을 부결시켜 기존 공원부지 55%, 주택용지 25%, 상업용지 20% 유지되었으며, 2005년 1월 이해찬 총리의 하야리아 무상양여 불가 입장 발표에 따라 부산시, 시의회, 시민사회는 단체 토론회를 개최하고 이해찬 총리를 규탄, 하야리아 무상양여 시민공원 조성을 위한 민관협의기구 구성 제안하였다.이후 2월부터 하야리아 무상양여 시민공원 조성을 위한 1차 서명운동을 전개하며, 국회 행자위원회에 반환미군기지 지원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였다. 2005년 5월 22일 부산광역시와 시민단체가 연대하여 ‘하야리아부지 시민공원조성 범시민협의회’를 발족하였고, 6월 ‘반환미군기지 활용방안을 위한 공청회’를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개최하였다. 7월 국회에 제출된 주한미군기지 이전지역 지원에 관한 3개의 특별법안에 대해 국무총리실, 행자부는 무상양여 불가 입장을 발표하였고, 이에 8월 무상양여를 촉구하는 2차 시민서명운동에 돌입하였다. 9월 15일 ‘152만 서명보고 및 하야리아부지 무상양여와 시민공원 조성을 위한 시민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이와 같은 노력에 따라 12월 1일 ‘공여지중 공원을 사용될 경우 정부 70% 지원할 것을 시행령에 정하기로 여야가 합의되어 [주한미군공여구역주변지역 등 지원특별법안]이 국회행정자치위에서 통과되었다.2006년 2월 1일 부산광역시에 ‘부산시민공원조성 추진단’이 발족되었고, 2월 9일 [주한미군공여구역주변구역등 지원특별법안]이 국회 본회에서 가결되었고, 3월 3일 [주한미군공여구역주변구역등 지원특별법안]이 공표되어 시행은 6개월 후인 9월 3일부터 발효될 예정이다.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