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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조경분야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 에코스케이프 2007년 02월

필자도 조경공사 현장에서 기획하는 부서에서 열심히 뛰었고 퇴직하기 전에는 잊혀져 가는 이야기들을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마음으로 서울시 영구문서 서고를 먼지범벅이 되어가면서 약 2년 동안 자료를 정리한 바 있다. 물론 이곳은 출입통제구역이어서 관련 공무원이 아니면 출입이 어려웠기 때문에 필자가 자료정리에 적임자였다고 자임하며, 필자의 정리가 끝난 약 6개월 후에 영구문서들이 경북 청송 문서고로 이관되었던 점을 미루어 본다면 정말 다행이었다고 생각된다. 본고에서는 서울시에서 있었던 굵직한 사건들만 골라 시대별로 소개하고자 한다.

제 1 · 2공화국시대(1945∼1961)
이 기간은 1945년 8월 15일부터 1961년 5월 16일 군사혁명이 일어나기까지 이승만, 장면 정권시대(1년)의 약 16년의 기간이다. 이 기간은 해방, 미군정치하, 주권국가 탄생, 6·25한국전쟁, 4·19혁명 등 우리민족 역사상 가장 격변의 시기였다.
광복이 되면서 해외에서 활동하던 애국지사들이 속속 귀국하기 시작하였는데 백범 김구선생이 항일투쟁을 하다가 중국에서 돌아가신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의사 유골을 모셔와 1946년 7월 6일 국민장을 치른 후 효창공원에 안장하였다. 김구선생은 자서전에서 애국지사의 묘소를 직접 잡았으며 제일 위에는 안중근 의사를 모시기 위해 비워두었다고 밝히고 있다. 다음해인 1947년 9월에는 항일투쟁애국지사 이동녕, 차이석 의사가 안장되었으며 1949년 6월 26일 김구 선생이 피격되어 7월 5일 본인 자신도 효창공원에 묻혔다. 1956년 5월 4일에는 종합경기장 건설계획을 수립하고 착공식을 거행하였지만 “효창공원선열묘소보존회”(회장 김창숙) 등 각계각층으로부터 반대에 부딪쳐 결국 소규모 축구장을 건설하는 것으로 계획이 변경되고 1960년 10월 12일 개장하게 되었는데 이와 같은 연유로 정적공간인 애국지사 묘역과 동적공간인 효창운동장이 공존하게 되는 아이러니컬한 상황이 발생되고 말았다.
1946년 8월15일 서울시 직제에 “공원위원회”를 두는 직제가 발표되었다. 미군정 당국의 “서울시 헌장” 에서 경성부를 경기도 관할에서 분리하여 독립시켜 서울시로 개칭하고 이것을 특별자유시(特別自由市)라고 하며, 서울특별자유시의 직제는 3관, 1처 8개 부, 5개 위원회를 두는 내용이었는데 5개 위원회 중의 하나가 “공원위원회”였다. 공원위원회는 시장이 임명한 5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며 4년간 보수 없이 일하고, 위원회에서 일할 공무원(서기관, 공원감독자)을 직접 임명하며 공원 · 광장 · 길(보도) · 운동장 · 레크리에이션 센터 · 놀이터에 대한 통제 · 관리 · 감독의 권리를 갖는 막강한 기구였다. 그러나 신생국에서 강력한 행정조직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시행되어보지도 못한 채 사장되고 말았다.
한국전쟁 휴전 이듬해인 1954년 8월 5일 서울시는 전재복구계획으로 “수도재건방침 12개항”을 발표하였는데 조경분야에 해당되는 사항은 남산·북한산에 시립공원 설치, 올림픽운동장 설치, 창경원의 동물원 재건 그리고 토지구획정리사업 재개 등 4개항이다. 그러나 세부자료가 없어 당시 신문 등을 통해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남산시립공원조성계획에 따라 1956년 8월 15일 약 25m(81척)에 달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전신입상(全身立像)동상이 건립되었는데 이승만대통령 탄신 80회임으로 81척의 높이로 제작되었다. 동상의 건립비는 2억6백만 환으로 전국 극장에서 입장자 한사람 당 20환씩 1년간 모은 것이었다. 1959년 11월 18일에는 남산 정상에 팔각 정자를 짓고 이승만대통령의 호를 따 우남정(雩南亭)이라고 명명하였다. 낙성식 때 서울시장(임홍순)은 “이 정자는 이대통령의 은덕을 길이 전하고 시민의 관광지로 삼고자 지은 것”이라고 축사를 하였다. 이같이 남산시립공원조성은 이승만대통령을 우상화하는 시설들로 채워졌는데, 동상은 4·19혁명 때 파괴되어 흔적도 남아있지 않으며(현재 남산식물원앞 분수대 자리) 우남정은 팔각정으로 명칭이 바꿔 그대로 남아있다. 북한산시민공원 조성은 자금난 등으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국회의사당 건립 계획도 위치가 남산공원 내로 선정되었다. 국회는 정부수립 후 중앙청 의사당을 사용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중앙청이 심하게 파손되어 태평로에 있던 문화극장을 활용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의사당 건립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1955년부터 국회의사당 신축문제가 자연스럽게 논의되고 그해 5월 5일 국회운영위원회 안에 “국회의사당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대상지를 물색하였는데 중앙청 내, 종묘, 사직공원, 남산공원, 장충단공원이 거론되었지만 당시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는 종묘를 최적지로 주장하였으나 이승만대통령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958년 11월 29일 서울의 중심지이며 지역이 광활하며 전망이 좋고 주위환경이 아름답다는 이유로 남산에 국회의사당을 짓겠다고 국회(운영위원회)가 발표하였다. 그해 5월 25일 국회의사당 건설계획안을 현상 공모하였는데 일본에 유학 중이던 김수근 외 4인의 작품이 당선되었으며 그 범위는 조선신궁의 부지를 그대로 이용하였는데 현재 어린이놀이터부지는 진입광장, 현재 백범광장부지는 대칭 녹지조성, 현재 안중근의사 기념관 주변과 남산도서관이 있는 부지에는 국회의사당 본 건물을 짓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대대적인 남산파괴 계획이었다.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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