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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경산업분야의 태동기 이야기
    조경산업분야의 태동기우리나라 조경의 역사는 삼국시대이전부터 시작되었고 1963년 문화재보호법에 의한 문화재관리국이 설치되어, 현충사 같은 유적지등이 정비되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의해 산업단지가 개발되고, 경부고속도로 공사가 이루어지면서 조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긴 했지만, 현대조경실무의 본격적인 시작은 역시 1972년 5월에 신설된 대통령 경제비서실에 조경담당비서관제도가 생기면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970년대 마산·이리의 수출 자유지역, 구미·포항·울산의 석유화학공단조성, 그 외에 여천화학공단, 창원 기계공단 등 대규모의 공단사업이 전국적으로 생기고, 경부고속도로 공사와 더불어 새마을 운동의 확산, 1·2차에 이은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72~1976), 제1차 치산녹화10개년계획(1973-1982) 등이 본격화되면서, 근대조경분야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다. 1973년 경주보문관광단지 개발도 조경실무가 본격화하는데 일조하였고, 1974년 7월2일 반관반민성격의 국영기업체인 한국종합조경공사가 설립됨으로 해서, 조경실무는 비로소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1974년 9월 28일, 건설업법시행령에 특수공사로 조경공사가 삽입되었고, 한국종합조경공사가 정식으로 건설업면허를 취득하여 사업을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함으로써, 법적 뒷받침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더불어 문화재보호법 개정으로 인한 문화재수리업(조경업)이 1974년 10월4일 처음 등록이 되었으며, 1976년 과기처에 조경분야도 기술자격제도가 실시되어 조경기술사, 조경기사 1·2급이 배출되기에 이르렀다.재무부 회계제도과에 의해 조경하자관련 규정 및 조경공사 잡비율 책정에 관한 계약사무처리규정이 신설되었다. 한편 1977년에는 조경분야 기술용역업 신설 및 용역요율이 책정되어 과기처에 기술용역업을 12월 14일에 등록할 수 있게 되었다. 건설업으로 본 조경 실무영역의 발전조경관련 건설업은 1958년 건설업법제정이후, 임업·조원공사란 이름으로 조금씩 진행되다가, 1974년 한국종합조경공사가 발족된 후, 국무총리령에 조경관련 사업의 업무를 대행할 수 있도록 근거가 마련되어 조경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또한 1975년 법률 제2851호로 단종건설업면허제도가 도입되고, 1980년 7월에 조경식재공사업과 조경시설물설치공사업 면허가 신설되어 조경식재공사업면허 80개사와 조경시설물설치공사업면허 67개사가 면허를 발급받아 사업을 시작하였다.그 후 법률 제3501호에 의해 1981년 12월 31일 단종공사업은 전문건설업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조경전문건설업체의 품위유지와 상호협력의 강화차원에서 1985년 7월 20일 대한전문건설업협회 내에 조경식재공사업협의회와 조경시설물설치공사업 협의회가 창립되었다.또한 한국조경수협회는 1967년 산림청의 인가를 얻어 사단법인 한국관상수생산협회로 출범하였던 것을 1983년에 (사)한국관상수협회로 명칭변경하였다가 1991년에야 (사)한국조경수협회로 개칭되게 되었는데, 이 조직 내에는 조경수생산유통심의위원회와 관상자원 유통센터추진위원회를 설치운영하고 있으며, 현재 전국 15개지부에 1,200여 회원을 갖고 있다.1982년에는 건설업체에 대한 신규면허요건이 자본금의 대형화로 강화되면서, 한국종합조경에서만 단독으로 종합조경성격의 공사를 대행해오던 것을 폐지하고 새로운 면허를 내어줌으로써 신규 종합조경면허 업체수는 11개 업체로 늘어났다. 이때 등록한 업체들은 한국종합조경(대표 이헌수), 한림종합조경(대표 한현구), 효자종합조경(대표 유상식), 상우종합조경(대표 박민식), 에덴녹화산업(대표 김영구), 한영종합조경(대표 김기산), 그리고 동아종합환경(주), 대능종합건설, 현대건설, (주)신성, 덕수종합건설(현재 두산건설의 전신) 등이다.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시대적 배경에 따른 조경분야의 발전 과정
    조경이 우리나라에 학문적으로 도입되어 체계적인 교육과 연구를 통해 전문업으로 법적인 인정을 받고 출발한지 30여년이 지났다. 되돌아보면 한국의 조경은 지난 30여 년간 세계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빠른 속도로 양적, 질적 성장을 이루었다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 아시아권에서는 한국이 홍콩, 이스라엘, 일본과 함께 조경 선진국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에 환호할 시점은 아직 아니다. 예를 들어 2001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세계조경가협회(IFLA) 학술대회 기조연설에서 미국 메사추세츠대학교의 페이보스(Julius Gy. Fabos)교수는 선진국 수준의 조경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인구 6,000명당 1명의 조경전문가가 확보되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의 연구에 토대를 둔다면, 우리나라의 인구를 감안할 때 적어도 8천명의 조경전문가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학계나 국가가 인성하는 조경전문인력은 지금의 2배 이상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가능하다. 이는 한국 현대 조경이 아직 사회적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알려주는 하나의 지표라고 볼 수 있다.한국조경이 청년에서 이제는 어엿한 장년의 모습으로 넘어가는 이 시점에서 지난 30여년의 성과를 정리하고 새로운 시대적 환경에 대처할 수 있는 전략을 개발하는 일이 우리의 조경학과 조경업에 요청되고 있다. 이때 우리는 21세기의 시작에 대해 환호하기 이전에 지나온 시간에 대해 뒤돌아봄으로써 한국 현대 조경의 발자취를 반성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일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이에 필자는 1945년 해방이후부터 1980년대까지의 조경관련제도 및 정책의 변화, 조경교육의 변화, 조경업의 변화 등 일련의 변화추이를 당시 사회, 경제, 문화, 정치적 측면과 비교하여 시계열적으로 정리, 고찰함으로써 동 기간의 조경의 변천과정과 우리나라 환경분야 발전에 끼친 영향을 정리하고, 나아가 향후 우리나라 조경발전의 방향의 모색을 위한 기초자료 제공을 목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해보았다. 2. 시대적 배경(1) 사회적 배경1945년 광복이후 6.25를 거치면서 우리나라는 격변의 시기를 맞이하여 알아 볼 수 없을 정보도 파괴되었으며, 휴전이후는 전후 복구 사업이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이후 유신정권이 들어서면서, 차관, 외채에 대한 우려들이 높았으며, 부실기업이 상당히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광주대단지 철거민 등의 폭동이 터지고 그와 아울러서 70년, 71년에는 전반적인 부문에서 부르주아 개혁을 요구하는 이른바 자율화, 민주화 선언들이 경제인, 언론인,법조인에게까지 일어나면서 사람들의 정치의식이 높아지고 그때 통일문제가 서서히 터져 나오는 혼란의 시기였다.1972년 제 1차 국토종합개발계획의 시행에 따라 인구의 증가는 물론, 도시화율도 50.1%에서 85.9%로 늘어났다.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던 공업단지도 1971년 102㎢에 불과 했던 면적이 495㎢로 4.8배나 증가하였다. 주요 사회간접자본인 교통망과 수자원개발도 적극적으로 추진되어 고속도로는 3.1배, 항만하역능력은 21.9배, 그리고 다목적 댐은 36배에 달하는 급격한 용량증대를 이룩하였다. 또한 농경지, 임해공단, 항만조성을 목적으로 바다를 매립하여 약 1,000㎢의 국토가 새롭게 조성되어 국토의 모습은 나날이 변해가고 있었다.이어 1973년 새마을 운동의 시작으로 지붕이나 담장, 도로 개선과 같은 일들이 주요 내용으로 추진되었다. 이러함에 따라 국토개발기반은 크게 확충․ 정비되었으며 생활환경도 대폭 개선되었다. (2) 경제적 배경해방이후부터 1960년대 초까지 자본, 기술, 자원이 전무후무 했던 나라였다. 농업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식량을 1~2백만톤씩이나 사와야 했다. 국토구조를 보면 산지가 67%, 도로 및 하천, 기타가 약 11%, 농경지가 약 22%에 불과하여 경제적인 효용 면에서도 농사지을 땅이 그리 넓지 못했다. 또한 분단으로 인하여 북한의 끊임없는 도발을 받으며 엄청난 방위비를 지출하면서 경제건설을 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본 고는 요약문입니다)
    • / 2007년02월 / 30
  • 조경연대기; 태동부터 1980년대까지
    e-매거진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 2007년02월 / 30
  • 조경학의 태동 및 성장
    지나간 날들의 사건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과거의 연장선상에 현재가 존재하고 있고 또 현재의 상황이 앞으로 출현할 미래의 거울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서 과거의 사건들을 정리해 본다는 것은 바람직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 하겠다.과거의 일은 역사속의 사건들을 의미한다. 우리는 역사속의 사건들을 기록과 구전을 통해 알 수 있다. 특히, 기록으로 남겨진 역사적 사건들은 이른 바 정사(正史)와 야사(野史)로 구분된다.역사학에서 볼 때, 정사(正史)는 정부 기관에 의해 공적으로 편찬(관찬官撰)된 기록이고, 야사(野史)는 그 이외의 모든 사적 형태로 편찬(사찬私撰)된 기록을 의미한다. 따라서 정사는 진실 되고 믿을 만한 기록이며, 야사는 신뢰성이 떨어지는 기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거 왕조시대의 경우를 보면 야사가 정사보다도 더 정확한 진실을 담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것은 정사에 기록된 사건들에 대해 야사를 남긴 사람들의 역사적 관점이 오히려 객관적이고 보편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야사의 내용들은 정사의 기록에 비해 다소 자유로운 기술방식에 의해 쓰여 지는 경우가 많으므로 재미를 더하기도 한다. 특히 야사는 숨겨진 이야기 혹은 감춰진 이야기라는 점에서 많은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역사이다.조경분야는 조경이라는 용어로 태동이 된 후 이제 35년의 역사를 지니게 되었다. 한 세대를 지나고 있는 조경분야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며, 이미 10년을 기준으로 한국조경학회에서는 조경분야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정리해 왔다. “조경시공”지가 계획하고 있는 조경야사는 앞으로 계속되어질 속편에 의해, 그간의 조경분야에 관련된 숨어 있는 많은 이야기들이 발굴되어 자세한 기록으로 남겨지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졌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 글은 태동기부터 1980년대까지 조경 학술분야와 관련하여 일어났던 주요하고 굵직한 사건들을 중요한 사안별로 한번 정리하는 것으로 구성하였다. 참고로 이글은 한국조경학회지 11권 2호에 실려 있는 우리나라 조경분야 10년 발전약사(문석기), 동지 20권 4호의 한국조경학회 20년사, 한국의 조경 1072-2002(한국조경학회 창립30주년 기념집) 등의 자료를 활용하여 작성하였음을 밝혀둔다. 조경학 이전우리나라에서 조경이라는 용어는 1960년대 후반 서울대학교 임학과의 과목으로 개설된 “조경학” 강좌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오늘날의 쓰여 지고 있는 용어로 조경이 처음 사용된 것은 70년대 초, 정확히는 1972년으로 보여 진다.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내에 조경디자인 전공과정이 1972년에 설치되었는데, 아마 이것이 조경이라는 용어가 오늘의 조경의 개념으로 확대되어가는 최초의 계기가 아닌가 하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시기 이전에도 조경과 관련된 학문적 분야가 현재의 상황에 비교하면 매우 제한적이고 단순하지만 이미 대학에서 학과목으로 개설되어 진행되어 왔다.이른 바 이 시기는 조경학 이전의 시기로서 조원(造園)이라는 용어로 정의되는 조원학의 시대라 부를 수 있을 듯하다. 조원이라는 용어는 오늘날에도 일본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로서, 일정시대에 그 틀이 만들어진 우리나라의 현대교육의 형성과정을 통해 볼 때 조원이라는 용어는 아마도 일정시대에 사용되었던 용어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조원이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된 예로 확인되는 것은 해방 후 대학에서의 조원학 강좌 개설을 통해서 이다. 대학에서의 조원학 강좌 개설은 1945~1946년경에 시작되었다. 이때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학과에 처음으로 조원학 강좌가 개설되었으며, 1947~1948년경에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임학과에 조원학 강좌가 개설되어 안재준과 이경환에 의해 강의가 진행되었다.1958년 이후에는 조원설계 과목이 서울대학교 임학과에 개설되었으며, 1960년대에 들어서는 여러 대학의 임학과, 원예학과 등의 학과에서 조원학 강좌가 설강되어 강의가 진행되었다. (본 고는 요약문입니다)
    • / 2007년02월 / 30
  • 서울시 조경분야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필자도 조경공사 현장에서 기획하는 부서에서 열심히 뛰었고 퇴직하기 전에는 잊혀져 가는 이야기들을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마음으로 서울시 영구문서 서고를 먼지범벅이 되어가면서 약 2년 동안 자료를 정리한 바 있다. 물론 이곳은 출입통제구역이어서 관련 공무원이 아니면 출입이 어려웠기 때문에 필자가 자료정리에 적임자였다고 자임하며, 필자의 정리가 끝난 약 6개월 후에 영구문서들이 경북 청송 문서고로 이관되었던 점을 미루어 본다면 정말 다행이었다고 생각된다. 본고에서는 서울시에서 있었던 굵직한 사건들만 골라 시대별로 소개하고자 한다. 제 1 · 2공화국시대(1945∼1961)이 기간은 1945년 8월 15일부터 1961년 5월 16일 군사혁명이 일어나기까지 이승만, 장면 정권시대(1년)의 약 16년의 기간이다. 이 기간은 해방, 미군정치하, 주권국가 탄생, 6·25한국전쟁, 4·19혁명 등 우리민족 역사상 가장 격변의 시기였다.광복이 되면서 해외에서 활동하던 애국지사들이 속속 귀국하기 시작하였는데 백범 김구선생이 항일투쟁을 하다가 중국에서 돌아가신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의사 유골을 모셔와 1946년 7월 6일 국민장을 치른 후 효창공원에 안장하였다. 김구선생은 자서전에서 애국지사의 묘소를 직접 잡았으며 제일 위에는 안중근 의사를 모시기 위해 비워두었다고 밝히고 있다. 다음해인 1947년 9월에는 항일투쟁애국지사 이동녕, 차이석 의사가 안장되었으며 1949년 6월 26일 김구 선생이 피격되어 7월 5일 본인 자신도 효창공원에 묻혔다. 1956년 5월 4일에는 종합경기장 건설계획을 수립하고 착공식을 거행하였지만 “효창공원선열묘소보존회”(회장 김창숙) 등 각계각층으로부터 반대에 부딪쳐 결국 소규모 축구장을 건설하는 것으로 계획이 변경되고 1960년 10월 12일 개장하게 되었는데 이와 같은 연유로 정적공간인 애국지사 묘역과 동적공간인 효창운동장이 공존하게 되는 아이러니컬한 상황이 발생되고 말았다.1946년 8월15일 서울시 직제에 “공원위원회”를 두는 직제가 발표되었다. 미군정 당국의 “서울시 헌장” 에서 경성부를 경기도 관할에서 분리하여 독립시켜 서울시로 개칭하고 이것을 특별자유시(特別自由市)라고 하며, 서울특별자유시의 직제는 3관, 1처 8개 부, 5개 위원회를 두는 내용이었는데 5개 위원회 중의 하나가 “공원위원회”였다. 공원위원회는 시장이 임명한 5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며 4년간 보수 없이 일하고, 위원회에서 일할 공무원(서기관, 공원감독자)을 직접 임명하며 공원 · 광장 · 길(보도) · 운동장 · 레크리에이션 센터 · 놀이터에 대한 통제 · 관리 · 감독의 권리를 갖는 막강한 기구였다. 그러나 신생국에서 강력한 행정조직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시행되어보지도 못한 채 사장되고 말았다.한국전쟁 휴전 이듬해인 1954년 8월 5일 서울시는 전재복구계획으로 “수도재건방침 12개항”을 발표하였는데 조경분야에 해당되는 사항은 남산·북한산에 시립공원 설치, 올림픽운동장 설치, 창경원의 동물원 재건 그리고 토지구획정리사업 재개 등 4개항이다. 그러나 세부자료가 없어 당시 신문 등을 통해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남산시립공원조성계획에 따라 1956년 8월 15일 약 25m(81척)에 달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전신입상(全身立像)동상이 건립되었는데 이승만대통령 탄신 80회임으로 81척의 높이로 제작되었다. 동상의 건립비는 2억6백만 환으로 전국 극장에서 입장자 한사람 당 20환씩 1년간 모은 것이었다. 1959년 11월 18일에는 남산 정상에 팔각 정자를 짓고 이승만대통령의 호를 따 우남정(雩南亭)이라고 명명하였다. 낙성식 때 서울시장(임홍순)은 “이 정자는 이대통령의 은덕을 길이 전하고 시민의 관광지로 삼고자 지은 것”이라고 축사를 하였다. 이같이 남산시립공원조성은 이승만대통령을 우상화하는 시설들로 채워졌는데, 동상은 4·19혁명 때 파괴되어 흔적도 남아있지 않으며(현재 남산식물원앞 분수대 자리) 우남정은 팔각정으로 명칭이 바꿔 그대로 남아있다. 북한산시민공원 조성은 자금난 등으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국회의사당 건립 계획도 위치가 남산공원 내로 선정되었다. 국회는 정부수립 후 중앙청 의사당을 사용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중앙청이 심하게 파손되어 태평로에 있던 문화극장을 활용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의사당 건립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1955년부터 국회의사당 신축문제가 자연스럽게 논의되고 그해 5월 5일 국회운영위원회 안에 “국회의사당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대상지를 물색하였는데 중앙청 내, 종묘, 사직공원, 남산공원, 장충단공원이 거론되었지만 당시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는 종묘를 최적지로 주장하였으나 이승만대통령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958년 11월 29일 서울의 중심지이며 지역이 광활하며 전망이 좋고 주위환경이 아름답다는 이유로 남산에 국회의사당을 짓겠다고 국회(운영위원회)가 발표하였다. 그해 5월 25일 국회의사당 건설계획안을 현상 공모하였는데 일본에 유학 중이던 김수근 외 4인의 작품이 당선되었으며 그 범위는 조선신궁의 부지를 그대로 이용하였는데 현재 어린이놀이터부지는 진입광장, 현재 백범광장부지는 대칭 녹지조성, 현재 안중근의사 기념관 주변과 남산도서관이 있는 부지에는 국회의사당 본 건물을 짓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대대적인 남산파괴 계획이었다.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