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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웃거리는 편집자] 마지막 수업
  • 환경과조경 2021년 2월

언제부턴지 모르겠지만 바닥을 살피는 습관이 생겼다. 정확히는 바닥에 있는 무언가를 확인하는 행동이다. 사람, 자동차, 쓰레기, 길 위엔 많은 것이 있다. 개중 대체로 작고 움직이지 않는 것들을 본다. 실은 보고 싶지 않다. 그런데 보지 않으려 하니 오히려 눈이 더욱 밝아진다. 일단 눈에 띄고 나면 그게 뭐가 됐든 한때 살아 있던 것만은 아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나는 길 위의 쓰레기를 보면 마음이 놓이는 사람이 되었다. 쓰레기는 떨어지기 전후의 이야기를 상상하지 않아도 되니까.


어떤 날은 날개, 어떤 날은 꼬리였다. 친구와 걷다 골목 한가운데 맨홀 위에 펼쳐진 날갯죽지와 깃털을 보았고, 4차선 간선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줄무늬를 이루는 등허리와 꼬리의 털을 보았다. 운이 안 좋다느니 조심성이 없다느니 같은 말은 할 수 없었다.


길 위에 놓인 것들을 생각하다 전설처럼 이름만 전해져 오는 존재들이 떠올랐다. 이를테면 이빨을 드러내는 것들, 날카로운 발톱과 뿔 같은 게 달린 것들. 혹은 작고 징그러운 것들, 쉽게 부서지는 것들. 수백 년에 걸쳐 이룩한 도시의 규칙과 질서, 안전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살기 좋은 곳이라는 말은 오직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거였다.


그래서 인간이 아닌 생물체가 살만한 곳을 만들라는 생물체 설계공모’(26~47)는 좀 충격이었다. 일차적으로 사람을 배제하고 어떤 공간을 만들라는 요구 자체가 낯설었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은 크게 새삼스러워졌다. “인간이 아닌 생물체를 의뢰인으로 선택하고 그의 요구 사항을 규정하고 의뢰인의 삶을 개선하는 장소, 구조, 사물, 체계 또는 과정을 설계하라는 공모의 전제는 생태 공간’, ‘서식지 조성같은, 그간 수없이 배우고 들어온 말을 다르게 풀어쓴 것뿐이었다.


한 유튜브 영상을 보고도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 20편의 짧은 영상으로 구성된 마지막 수업시리즈. 영상 속 과학자들은 사람들이 별로 궁금해하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데 열심이었다. 영장류학자 이윤정은 긴팔원숭이가 특히 좋아하는 나무 열매를 알려주었고, 극지 연구자 이원영은 젠투펭귄이 친구들과 소통할 때 내는 꽉꽉소리를 따라했다. 그들은 영상에 직접 출연하지 못하는 동물을 대변하는 듯했다. 해충으로 여겨지는 곤충이 왜 해충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인도네시아 숲 인근 전깃줄에 왜 원숭이들이 죽은 채 매달려 있는지, 바이러스와 잘 공존하고 있던 박쥐가 왜 전염병의 원흉으로 지목받게 됐는지 따위의 이야기였다.


생태학자 김산하는 야생동물의 정의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동물을 이야기할 때 너무 당연한 말처럼 생각하면서도 잊고 있는 게 뭐냐면, 동물은 서식지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냥 있어야 하는 정도가 아니라 동물=동물+서식지의 개념이라는 거죠. 서식지와 동물이 아예 하나의 개념으로 묶여 어떤 관계망을 갖지 않고서는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동물, 그것이 야생동물입니다.” 뿐만 아니라 흔히 피라미드 구조의 먹이사슬 정도로 생각하는 생태계에는 포식, 피식, 공생, 편리공생, 별 상관없는 사이, 기생과 같은 온갖 관계가 무수히 중첩되어 있어서, 어떤 동물의 멸종은 하나의 소우주가 사라지는 것, 모나리자 같은 명화가 불타없어지는 것과 같다고 호소했다. 이윽고 덧붙인, 현존하는 포유류 중 4%만이 야생동물이라는 숫자가 무척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여기저기서 더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든다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더 아름답고 친환경적인 도시, ‘사람 중심의 스마트 도시, 자율 주행의 상용화가 코앞이라는 소식이다. 잘 닦인 길을 보며 길 위의 모나리자들을 생각했다. 그들이 한때 머물렀을 바위틈, 땅속의 굴, 물풀이 무성한 늪, 우거진 덤불을 생각했다. 문득 누군가 바라고 기대하는 모든 것들이 그저 시시하게만 느껴졌다.

 

‘마지막 수업’은 2020년 생명다양성재단이 주최한 생태 교육 프로젝트다. 김산하, 이윤정, 이원영, 장이권, 최재천이 강사로 참여해 짧지만 굵직한 이야기를 전달한다. 강의 영상은 생명다양성재단 유튜브 채널에서 볼 수 있다. www.youtube.com/c/TheBiodiversityFound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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