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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서재] 사월의 미, 칠월의 솔
  • 환경과조경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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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 문학동네 | 2013

 

당신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다. 7층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데, 문이 닫히기 직전 한 아이가 뛰어 들어왔다. 아이는 어떤 버튼도 누르지 않았고, 당신과 함께 7층에서 내렸다. 그간 본 적 없는 아이가 같은 층에서 내린 게 이상했던 당신은 계단실로 향한 아이가 어디로 가는지 몰래 지켜본다. 아이는 열심히 계단을 오른다. 그리곤 9층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사라졌다. 아이는 왜 7층에서 내렸을까? 대학교 4학년 시절, 늘어져 가는 수업 분위기를 띄워 보고자 교수님이 던졌던 질문이다. 당시 구글이나 애플 등 세계적 기업이 입사 면접에서 사용한다고 알려져 유명해진 브레인 티저brain-teaser형 질문이었는데, 몇몇 학생이 교수님이 기대한 반응을 보이며 열심히 오답을 던졌다. 숫자 7을 좋아해서, 계단 올라가는 걸 좋아해서,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리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님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답은 아이의 손이 버튼에 닿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를 이해하려면 아이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유연함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의 문제였을 것이다. 당시의 나는 그 주에 쏟아진 과제로 매우 피곤했고, 다음날 있을 시험을 위해 쪽잠이라도 자야 했기에 문제의 깊은 뜻에 감탄할 여유가 없었다. 순발력 없는 나는 그 유명한 기업에 입사하지 못하겠구나 하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이 질문을 다시 떠올린 건 1년여가 흐른 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를 봤을 때다. 섬세하고 따뜻한 이야기로 공감을 끌어내기로 유명한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선택한 이야깃거리는 우리나라 드라마의 단골 소재인 ‘뒤바뀐 아이’. 다행히 죽은 줄만 알았던 사람이 눈 밑에 점 찍고 돌아온다거나 복수를 위한 칼을 가는 이야기는 아니다. 사랑스러운 아내, 귀여운 아들과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건축가 료타는 어느 날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내용인즉슨 6년간 키워온 케이타가 자신의 친자가 아니라는 것. 놀랄 새도 없이 료타는 자신의 친아들 류세이를 만나고 혼란에 빠진다. 영화는 료타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보여주며 료타가 진짜 ‘아버지’가 되어 가는 과정을 그려 나간다. 이야기는 료타를 중심으로 흐르는데, 카메라 앵글은 이따금 아래에서 위를 향한다. 아이의 시선이다. 료타가 케이타의 마음을 확인하는 매체도 아이의 시선을 담은 사진 몇 컷이다. 케이타가 찍은 사진 속 료타의 모습 대부분은 소파에 누워 잠든, 아이를 등진 모습이다. 료타는 그제야 케이타의 외로움을 이해한다. 영화 막바지, 료타는 케이타를 따라 달린다. 길이 갈리고 케이타는 높은 길, 료타는 낮은 길을 따라 계속 달린다. 그 높이차로 인해 처음으로 두 사람의 눈높이가 같아진다. 눈을 마주치며 한참을 달리고 나서야 양 갈래 길이 합쳐지고 료타는 케이타를 안아 든다. 조금이나마 서로를 이해하게 된 순간이었다.

 

총 열한 편의 단편 소설로 구성된 『사월의 미, 칠월의 솔』에서 가장 좋았던 단편은 “깊은 밤, 기린의 말”. 이 역시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에 대한 이야기다. 발달 장애를 지닌 아이 태호와 가족의 이야기를 태호의 누나와 형의 눈을 빌려 그렸는데, 그 세상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폭력적이다. 아버지는 비관적이며, 어머니는 태호와 소통하려 끝없이 노력한다. 이 노력은 인내보다는 집착에 가깝다. “엄마는 태호가 자기 말을 알아들을 때까지. 그리고 설사 태호가 자기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해도 계속 중얼거릴 생각이었다. 병원과 집을 오가는 자동차 안에는 엄마가 중얼거리는 단어와 문장이 가득했다.”1 일방적인 말로 가득한 자동차의 모습과 “세게 말한다고 듣는 사람이 새겨듣는 건 아니”2라던 태호 어머니의 말이 겹쳐져 참 아이러니했다. 어머니의 노력은 매번 실패하고 결국 새로운 소통로를 찾는다. 답답한 마음을 시로 풀어내는 것. 시는 “아무리 하찮고 사소한 말”이라도 다 들어주는 머리맡의 귀가 되어주고,3 이를 통해 어머니는 어릴 적 꿈꿨던 시인이 된다. 태호에게도 ‘소리’나 ‘언어’따위 없이도 소통할 수 있는 친구가 생긴다. 태호가 좋아하는 치킨집 근처 애견센터에서 발견한 강아지 ‘기린’이다. “옆에 누가 있어도 도통 알아차리지 못”하던 태호는 기린의 기척만은 느끼고, ‘기린’이라는 단어를 듣기만 해도 손뼉을 치며 웃는다. 하지만 어느날 어머니는 기린을 애견센터로 돌려 보낸다. 기린이 시각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형과 누나와 함께 기린을 찾아 나선 태호는 기린이 버려진 줄도 모르고, 애견센터 유리창 너머의 기린을 발견하곤 마냥 즐거워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남매의 귀에는 낑낑거리는 기린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유리창이 두꺼워 그럴리가 없”4는데도. 

편집부와 독자 사이에 놓인 유리창에 대해 생각해본다. 때때로 자료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뒤지다 보면 화면 가득한 문자들이 피곤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필요한 몇 줄의 문장을 찾기 위해 살펴야 하는, 스크롤을 서너 번 내려도 끝나지 않는 화면이 부담스럽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종종 잡지가 한 달 동안 읽기에 너무 벅찬 양의 정보를 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서운해진다. 책장 가득한 글의 양이 문제라면, 원고 분량을 줄이면 해결될까. 그렇다면 원고에 남겨야 하는 반드시 필요한 정보는 어떻게 선별해 낼 것인가. 생각을 이어갈수록 유리창은 불투명해지고, 그 너머 독자의 얼굴도 흐려져 간다.

 

1. 김연수, “깊은 밤, 기린의 말”, 『사월의 미, 칠월의 솔』, 문학동네, 2013, p.45.

2. 위의 책, p.45.

3. 위의 책, p.52.

4. 위의 책,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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