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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로 상상하기, 픽셀로 그리기] 파라메트릭 플랜팅 Ⅲ
  • 환경과조경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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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성진

 

 

현실

계절이 변했다. 사실 많은 것이 변했지. 마스크부터 기후 변화까지. 낯선 풍경과 새로운 용어들. 그림책에 그려질 법한 비현실이 현실이 되고. 인스타에 쌓여가는 사진들. 시간이 지나며 바뀌고 색이 바래는 관계들. 현실은 새로운 현실로 변해간다.

 

내 오늘의 소모가 부정적인 내일로 소멸될 거라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제이슨 므라즈가 평화를 말했던가. 피델 카스트로가 평등을 말했나. 무대 위의 정의는 소란이 끝나면 기억 속으로 부패한다. 썩어 문드러지지. 다른 건 없다. 필요에 따라 유행이 모습을 달리할 뿐, 트렌드가 뭐람. 그래서 혁명의 깃발을 들고 벌판을 질주하면 역사의 주역이 될 수 있나? 괜한 칼로리만 소모할 뿐이다. 목이 말라 물을 찾고 지하수 고갈을 조금이라도 촉진시키겠지. 재미다. 그저 재미라고. 재미가 아니라도 재미라고 말해야 하는 게 사회의 룰이라고. 그렇게 매일 밤 재미를 더하고 인생의 별을 따서 술잔에 기울이고 다음 날 적당히 얼버무리면 되는 거라고.

 

수련은 끝났다. 의미의 유통기한이 다했지. 아이스라테니 진정한 식재 설계니 다 합의된 관계 안에서만 유의미할 뿐이고, 그냥 서로의 피드에 적당히 좋아요만 눌러주면 되겠지. 현대 사회에서 새로움을 얘기하고 진정함을 말하고 옳고 그름을 말하는 건 바보다. 그냥 재미있다고 말하라고. 대충 재미있다고 얘기하는 게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매너라고. 재미있는 파라메트릭 플랜팅 연재는 오늘 끝난다. 우리에게 실낙원이 있을까? 진정한 재미를 보여 줄 수 없는 게 유감이다.

 

습작

지난 습작들을 이어서 소개한다. 우리는 수련이라는 명목하에 서로 연극을 했고, 자연스레 불완전한 그림들이 작업대에 쌓였다. 먼지가 덮여 인생의 구석에 내몰리기 전에, 채도가 바래 온전한 의미마저 상실되기 전에 우울한 작업의 기록을 남긴다. 기록은 진정한 파라메트릭 식재 설계의 테스트베드 1장과, 실제 대상지에 적용한 디자인 예시 1장의 조합으로 다섯 개의 습작을 병렬로 배치했다. 설계 이전에 테스트베드를 만드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포레스트 팩을 사용한 뒤 왠지 흰 가운을 걸친 연구원이 된 듯한 느낌에 콘셉트에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 정원 설계 프로세스에 대한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파라메트릭 키드의 관점에서 보면 지난 정원 설계의 과정은 상당히 직관적이고 우연적이다. 작가들은 개인의 취향이 투영된 독자적 스타일을 정립하고, 프로세스를 통해 설계를 발전시키기보다 클라이언트와의 취향 매칭을 하는 느낌이었다. 따라서 우선 정원 설계의 팔레트들을 스타일에 따라 테스트베드로 아카이빙해 명료한 디자인 베이스를 만들고, 대상지의 맥락과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최적의 테스트베드 옵션을 도출한 뒤, 대상지에 적용한 시뮬레이션을 비교해 상호 만족하는 최종 설계안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럴듯한가? 아니, 재미있는 망상일 뿐이다. 수련생이란 늘 부족한 현실감에 어설픈 환각을 즐기기 마련이다.

 

테스트베드 1. 프렌치.유러피안 스타일

그림 1은 테스트베드 1장으로 프렌치-유러피안 스타일의 팔레트다. 이상한 이름인 줄 알지만 어쩔 수 없다. 대림 아크로ACRO 갤러리 모델 하우스에 적용했던 패턴인데, 전체 콘셉트가 화려한 유럽의 느낌에 모던한 라이프 스타일을 더하는 방향이어서 숨겨왔던 화려함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다. 일단 모든 걸 수국에 맡겼다. 정말이지 수국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강렬한 블루 계열보단 화이트와 핑크 계열이 더 이국적이라고 생각했고, 그중에도 화이트를 메인으로 할 때 유러피안 감각과 모던한 느낌을 연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화이트 60퍼센트에 핑크 40퍼센트 정도로 메인 수종을 구성하고, 보라색에게 카운터 역할을 맡긴 뒤 짙은 녹색으로 배경 볼륨을 채웠다. 수련생에게도 나름의 직감이란 게 있는 법이다. 이후 스타일에 대한 의사 결정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배열은 수국의 독자적인 볼륨을 살리면서 자연스러운 느낌을 주기 위해 덴스(dense) 알고리즘을 사용했다. 비정형 배치에 클러스터와 스캐터가 자연스럽게 혼합되는 패턴이며, 70퍼센트 정도의 밀도로 영역을 채우는 비교적 여유로운 배치다. 교목은 수국의 하이라이트를 빼앗지 않기 위해 배제했고 대신 소관목을 추가해 불규칙한 리듬을 더했다. 마지막으로 조형 화분과 체스 모형을 더해 그림 2와 같이 유러피안 스타일로 대상지에 발전시켰다. ...(중략)

 

환경과조경 392(2020년 12월호수록본 일부

 

나성진은 서울대학교와 하버드 GSD에서 조경을 전공했다한국의 디자인 엘뉴욕의 발모리 어소시에이츠(Balmori Associates)와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CFO)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고, West 8의 로테르담과 서울 지사를 오가며 용산공원 기본설계를 수행했다한국미국유럽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귀국 후 파트너들과 함께 얼라이브어스(ALIVEUS)라는 대안적 그룹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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