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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서재] 어느 언어학자의 문맹 체류기
  • 환경과조경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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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에서 외국인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언어학을 연구하는 백승주 교수는 문맹이 되기로 결심한다. 1년간 상하이 푸단 대학교의 한국어 교환교수로 파견되자 중국에 가기 전까지 어떤 중국어도 익히지 않기로 한 것이다. 지금껏 그가 가르친 학생들은 한국어를 말할 줄도 읽을 줄도 모르는 이들이었다. 백지 상태에서 낯선 땅에 발을 내디딘 학생들의 마음을 헤아려보기 위해, 의 상태에서 다른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을 탐구하고자 실험 대상이 되기를 자처한다.


외국 생활은 긴장의 연속이다. 식당에서 음식을 시키는 것뿐인데 몸은 잔뜩 움츠러든다. 한국에서는 자연스럽게 사장님을 외치면 그만이지만 낯선 나라에서는 말도 안 통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이뤄내야 하기 때문이다. “워 야오이베워 야오아이씨.” 상하이 도착 이틀째, 백 교수는 방에서 워 야오 이베이 빙더 메이스카페이”(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 주세요)를 연신 연습한다. 다음 날 찾은 스타벅스에서 연습한 문장을 말하는 데 성공하지만 돌아오는 건 예상치 못한 질문이다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점원은 계산대 옆에 나란히 서있는 컵들을 가리킨다. , 그란데, 벤티, 컵 사이즈를 묻는 거였다. 더 준비된 말이 없던 백 교수는 가리키기를 시전해 그란데사이즈를 주문한다. 그는 음료를 기다리며 가리키는 행위에 담긴 복잡한(?) 소통의 과정을 분석하기 시작한다. 가리키기는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일, “‘나와 상대방이 모두 공동으로 한 사물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동시에 다른 이의 관점에서 그 사물을 보는과정이므로, 일종의 초능력을 발휘한 셈이다(과장된 표현 같지만, 인간과 DNA98퍼센트 일치하는 침팬지는 가리키기에 담긴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어느 언어학자의 문맹 체류기속 이야기들의 흐름은 이런 식이다. 읽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마주한 낯선 문화와 도시 풍경은 산만하면서도 복합적인 의식의 흐름을 따라 재편된다. 현지인에게 당연한 음식 문화나 거리 풍경은 이방인의 온갖 잡다한 지식,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나 유년 시절의 희미한 경험 등을 소환한다. 명나라의 반윤단이 자신이 죽인 정적이 강시로 나타날까 두려워 만든 구곡교를 거닐며 좀비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고, 중국 식당에서는 냉수를 주지 않는 게 기본이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물 좀 주소를 부른 가수 한대수를 호출한다. 다소 뜬금없어 보이지만 나름의 알고리즘을 따라 전개되는 이야기는 공공장소에서 본의 아니게 듣는 남 얘기 같다. 하필 그게 엄청 흥미진진하거나 솔깃한 정보여서, 나도 모르게 귀를 더 쫑긋하게 되는 것이다.


북쪽으로 공산주의 (혹은 그러한 체제에 속했던) 국가를 세 개나 둔 자본주의 국가(하지만 같은 한자 문화권에 속하며, 일제 식민지기와 제국주의, 독재 체제를 경험한 나라)에서 나고 자란 덕분일까, 백 교수는 현대 중국 이면에 놓인 모순을 도시 곳곳에서 면밀히 포착해낸다. 자본주의의 결정체인 상하이 세계금융센터의 외벽에 중국의 오성기가 떡하니 붙어 있고, 사람들을 검열하는 경비원들이 즐비한 상하이의 거리에는 집마다 적나라하게 널어놓은 빨래가 휘날리며, 난닝구와 사각 팬티만을 걸친 자유분방한 차림의 아저씨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고급 백화점에 난 큰 창을 통해 보게 되는 것은 마오쩌둥의 생가다. “과거의 마오가 고급 백화점으로 둘러싸인 자신의 옛집을 바라본다면 어떨까? 마오가 받는 충격은 원숭이 혹성에서 겨우 탈출하여 지구로 돌아왔는데, 그 지구가 유인원이 지배하는 세상이 된 것을 발견하는 영화 혹성탈출의 주인공이 느끼는 충격과도 유사하지 않을까.”2


상하이의 풍경은 낯선 이방인의 몸을 통과하면서 지극히 주관적이고 예상치 못하게 깊은 방식으로 그려져,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토록 사적이고 편향된 기행문이라니. 웬만한 객관적이고 정확한 정보보다 상하이에 대한 뚜렷한 인상을 각인시킨다.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친구가 들려준 모로코의 밤, 그가 거닐던 사막이 어떤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사막보다 더 깊게 남았던 건 같은 이유 때문일까?

 

각주 정리

1. 백승주, 어느 언어학자의 문맹 체류기, 은행나무, 2019

2. 같은 책,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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