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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서재] 빌트, 우리가 지어 올린 모든 것들의 과학
  • 환경과조경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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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죽었다 깨어나도 못 할 일을 잘하게 되는 상상을 한다. 50m만 뛰어도 숨이 차는 내가 수십 킬로미터를 질주하며 러너스 하이(runner’s high)의 경지에 이르는 상상, 중저음의 노래에서 벗어나 듣는 사람도 부르는 사람도 가슴이 뻥 뚫리는 삼단 고음을시원하게 내지르는 상상, 일찍이 수포자(수학포기자)이자 물포자(물리포기자)임을 깨달았지만 영화 속 천재처럼 넓은 칠판을 수식으로 빼곡하게 채우는 상상. 생각만으로도 짜릿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 몇 초 만에 끝나버린다.


천재적인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겐 어렵기만 한 일을 능숙하게 해내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 못해 하루만 뇌를 빌려보고 싶다. 나와는 완전히 다른 식으로 보고 생각할 테니까. 빌트(built), 우리가 지어 올린 모든 것들의 과학(이하 빌트)을 읽고는 저자 로마 아그라왈(Roma Agrawal)의 머릿속은 어떻게 생겼을지 몹시 궁금해졌다. 그는 주목받는 여성 구조공학자다. 성 역할의 구분이 무의미해진 시대에 굳이 여성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게 촌스러워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안전모와 형광 안전 재킷을 걸치고 거대한 교량 공사를 진두지휘하거나, 벌거벗은 여자 사진이 도배된 건설 현장 사무소에서 유한 요소 모델링과 토양 강도 프로파일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아그라왈의 모습은 낯설고 신선하게 다가온다. 그가 주목받는 이유는 여성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그라왈의 주 종목은 고층 빌딩 설계다. 현재 서유럽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영국의 더 샤드(The Shard)를 포함해 세계 각지의 주요 엔지니어링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건물 외에도 터널과 다리, 기차역 등 다양한 공간이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아그라왈은 공학 설계뿐만 아니라 건축 속 숨겨진 과학 원리를 알기 쉽게 설명하는 데도 남다른 재주가 있다(공학이라면 일단 피하고 보던 내가 이 책을 완독했다는 것만으로도 설명은 충분하다). 기둥이나 보 같은 기초적인 구조가 어떻게 중력을 분산하는지를 카드나 당근으로 설명하는 것부터 시작해, 건물의 고유 진동수와 지진의 관계를 유리잔을 깨뜨리는 소프라노의 고음에 빗대고, 건물의 움직임이 만든 에너지를 흡수하는 장치(동조질량감쇠장치)의 원리를 진동하는 포크에 손을 대는 일로 쉽게 이해시킨다.


아그라왈의 이야기를 통해 구조공학자의 역할을 인정하는 차원을 넘어 일종의 경외심까지 갖게 됐다. 건물을 세우고 무너지지 않게 하는 일은 말만큼 단순치 않다. 수많은 변수를 예측하고 이에 관한 대비책을 철저히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다리를 예로 들면 전체적인 골격뿐만 아니라 구조를 이루는 재료에 열이 가해질 때 얼마나 팽창하고 수축하는지 계산해야 한다. 지역 축제 등으로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려 하중이 한 곳으로 집중되는 경우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렇게 고도로 복잡하고 섬세한 작업은 그간 화려한 건물의 외형에 감춰져 왔다. 사람들은 공학 원리 같은 것에 그다지 큰 관심을 갖지 않는다. 건축가만 주목받는 것이 서운하진 않을까. 그러나 아그라왈은 멕시코시티의 토레 마요르(Torre Mayor)가 공학적으로 잘 설계된 덕분에 건물 안 사람들이 지진이 일어나는 줄도 몰랐던 사례를 들며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엔지니어의 꿈이다. 건물이 안전하게 설계되어 거주자들은 건물이 서 있기 위해 동원된 수많은 복잡한 기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 채 자신의 일을 편안하게 계속하는 것 말이다.”2


이번 달 마감과 함께 빌트를 읽었다. 덕분에 잡지에 소개된 파빌리온과 다리가 어떻게 땅을 딛고 서 있는지, 어떤 식으로 결합됐는지 눈여겨봤다. 물론 책을 다 읽은 지 하루도 안 돼 습득한 지식의 9.9할은 휘발되고 말았다.


얕게나마 접한 공학의 세계는 생각 이상으로 흥미롭고, 멋지고, 다 알 수 없어 신비롭다. 아쉽지만 이번 생에 그 멋진 일을 하기에는 영 그른 것 같으니, 상상하는 즐거움으로 만족하기로 한다(다음 생을 기대해 본다). 대신 이렇게 숨은 자리에서 멋진 일을 하는 사람들을 찾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글로 남기는 데 집중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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