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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서재]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
  • 윤정훈 (hoons920@daum.net)
  • 환경과조경 2020년 11월

 

두고두고 오래 보는 책이 있다. 분량이 방대하거나 내용이 어려워서는 아니다. 읽은 부분은 이따금 다시 읽고 아직 읽지 않은 부분은 나중을 위해 아껴뒀기 때문이다.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1씨네21김혜리의 영화의 일기에 연재된 글을 모은 책이다. 김혜리 기자가 한 편의 영화를 보고난 후 늘어놓은 문장 앞에서 나는 자주 멈추고 놀란다. 어떤 영화는 그의 글을 더 잘 읽기 위해 보기도 했다.

좋은 게 왜 좋고 싫은 게 왜 싫은지를 잘 설명하는 건 내게 너무 어려운 일이다. 대화하거나 글을 쓸 때 종종 속으로 당황하고 좌절하는 건 이 때문이다. 두루뭉술한 생각과 감정을 또렷하게 표현할 말들이 떠오르지 않는다. 지식의 밑천이 얄팍하고 생각이 게으른 탓이다. 그래서 평소엔 설명이 필요 없는 그냥을 입에 달고 산다. 많은 이유를 쉽고 간편하게 뭉뚱그려주지만 어쩔 땐 영 개운치 않다. 답답한 순간 중 하나는 깊은 여운을 남기는 책이나 영화를 보고 나서다. 어디가 어떻게 좋은지, 혹은 납득할 수 없는 장면에 대해 잔뜩 떠들고 싶은데 받은 감흥에 비해 내가 구사하는 언어들은 뻔하고 빈약하기 그지없다. 그럴 때면 사전을 찾듯 김혜리 기자의 글에 슬쩍 기댄다.

가령, 왜 나는 귀여운 캐릭터들이 잔뜩 나오는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2015)을 보고 당혹스러울 정도로 서러운 마음이 들었을까? 단순히 주인공의 상상 속 친구 빙봉이 영영 사라져서는 아닐 것이다. 김혜리의 말을 빌려 짐작컨대, “이 예쁜 영화는 놀랄만한 분량과 규모의 파괴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열한 살짜리 여자애가 이사를 가게 되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이야기에는 상실은 성장의 핵심이고 사춘기는 성격이 형성되는 것 못지않게 어린이의 기존 우주가 붕괴되는 시기라는 해석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한없이 명랑한 이야기가 주는 역설적 아련함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회상하기 시작할 때 유년은 끝난다는 걸 어른인 우리는 알고 있다. 모든 체험의 불가역학 일회성과 죽음을 인식하며 비로소 사춘기는 시작된다. 비극도 희극도 아니다. 기쁠 것도 슬플 것도 없다. 하지만 거기에는 어렴풋한 아름다움이 있다.”2

노아 바움백의 프란시스 하’(2012)를 보면서 뜨끔했던 진짜 이유는, “성공이건 실패건 아직 제 삶을 장악하지 못한 채 20대 후반이 다 되도록 제대로 된 1인분의 몫을 다하지 못하는 주인공의 자괴감이 낯설지 않아서였다. 프란시스가 처음으로 온전히 제 것으로 취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체념이라는 대목에서는 한 대 맞은 기분마저 들었다.3 어떤 해석은 공감과 납득을 넘어선다. 내게 김혜리의 문장은 똑같은 생각으로 점철된 하루에 영화가 주는 생생한 감정들을 놓치지 않도록 손에 꼭 쥐여주는 다정함이었다. “각기 상대적 시간을 살아가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의 시간은 무심히 일치한다는 그의 말을 책을 덮을 때마다 실감했다.

책의 서문에서 김혜리 기자는 자신은 영화가 보여준 것을 적어두는 속기사일 뿐이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의 제1 저자는 자신이 아닌 영화라고 밝혀둔다. 표면적으로 보면 평론가 혹은 기자가 하는 일은 일차적으로 시각과 청각이 기능하는 사람이 살아 있다면 하기 마련인 다분히 소극적인 활동”4이다. 이미 온전한 무언가에 약간의 글을 보태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화려한 영상과 이미지에 온 하루를 소진할 때면 이런 생각은 더욱 뾰족해진다. 하지만 스크린 위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어떤 장면은 몇 줄의 문장으로 인해 누군가를 흔드는 하나의 메시지로 남기도 한다. 미처 정의되지 못한 마음과 설명되지 않는 의문은 때때로 다른 누군가의 말과 글에 비로소 안착한다.

순전히 영화가 보여주는 것들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그의 사유와 글의 비결일까? 종종 궁금해하지만 영영 알 수 없을 테고, 알아도 그처럼 잘 보고 쓰진 못할 것이다. 다만 지금처럼 계속 남의 글에 의탁하면서 한 가지는 잘 기억하고 싶다. 이미 완성된 것이라도 최선을 다해 주시하고 구태여 말과 글을 덧대는 일의 유용함에 대해 말이다. 비평이든 편집이든, 어쩌면 영화뿐만 아니라 누군가 만들어 놓은 공간에도.

 

1. 김혜리,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 어크로스, 2017.

2. 같은 책, pp.190~193.

3. 같은 책, pp.196~197.

4. 같은 책,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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