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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서재] 목소리를 드릴게요
  • 윤정훈 (hoons920@daum.net)
  • 환경과조경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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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200m, 직경 20m에 육박하는 대형 지렁이가 나타났다. 땅 속에 살다 비 오는 날이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붉은 색의 미끌미끌한 생명체. 흙과 함께 낙엽과 분변을 먹고 건강한 토양을 생산하는 생물. 다만 거대 지렁이는 땅 속 대신 지상을 다니며 휘발성 유기화합물을 먹는다. 석유를 이용해 만든 모든 것을 집어 삼키며 도시를 이루는 대부분의 구성물을 분변토로 만든다. 숲과 동물에는 무관심하다. 인류는 지렁이들을 피해 땅 속으로 들어간다. 우주에서 누군가 보낸 거대 지렁이 덕분에 지구는 리셋reset된다. 지상에 남은 인간의 흔적은 작물을 재배하는 농장뿐, 숲과 건강한 토양이 회복된 지구는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물이 자유롭게 사는 곳이 된다. 정세랑 소설집 목소리를 드릴게요의 두 번째 단편 리셋의 세계관이다.

많은 장르 소설이 그렇듯목소리를 드릴게요가 그리는 미래는 돌이키기엔 너무 늦어버린 상황이다. ‘리셋에서 인류는 계속된 자원 고갈과 멸종을 일으키다 거대 지렁이의 심판을 받게 됐고, ‘모조 지구 혁명기의 미래 지구는 각종 혐오와 폭력, 재난이 범벅된 여행 기피 행성이 됐다. ‘7교시의 배경은 여섯 번째 대멸종 이후의 지구다. 체제를 바꿔 겨우 살아남은 미래 인류는 현대사 수업을 들으며 생명 존중에 대한 감각이 전무했던 과거 인류를 부끄러워한다. 실제로 정세랑은 지금의 우리가 19세기와 20세기의 폭력을 역겨워하듯” “23세기 사람들이 21세기 사람들을 역겨워 할까봐 두렵다고 고백했는데, 그래서인지 소설은 망한 지구와 인류라는 인과 관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기발한 상상력과 재기발랄한 인물을 보는 재미도 있지만 어떤 대사 앞에서는 뒤통수가 따끔해진다. “너 그러다 망한다? 그렇게 원칙도 윤리도 없이 막살다가 망한 다? 너 같은 놈들 때문에 지구가 끝난 거다?”

삶이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면 지금의 지구는 비극이다 못해 구역질이 날 지경이다. 인간의 얼굴을 하지 않은 존재들이 놓인 상황이 그렇다. 2010년대에만 열대 우림 등의 서식지 감소, 사냥 및 밀렵, 기후 변화, 공해, 외래종 침입 등으로 467종의 생물이 멸종됐다.2아프리카 북부흰코뿔소는 암컷 두 마리만 남았다. 마지막 수컷이 죽기 전 채취해 둔 정자로 종을 복원한들 무슨 소용일까. 뿔과 상아 때문에 산 채로 얼굴 앞부분이 잘려 버려진 코뿔소와 코끼리 사체가 아프리카 초원에 널려 있고, 값싼 라면과 과자를 만드는 데 쓰이는 팜유 때문에 매년 수천 마리의 오랑우탄이 죽는다. 부리에 플라스틱 고리가 끼어 굶어 죽는 새들도 허다하다. 감금, 학대, 도살, 살처분이 횡행한 공장식 축산업은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많지만 교통 및 운송 부문보다 14.5%나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함에도 그 궤도가 수정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일상의 풍요와 분주함은 이 같은 폭력에 노출된 얼굴들을 가리고, 사진과 동영상으로 소비하는 귀여운 동물은 일종의 환각제로 역할할 뿐이다.

그런데도 정세랑은 어차피 망한 거 그냥 이대로 살기보다는 어려운 희망에 대해 끝까지 쓰고 싶다고 말한다.3여섯 번째 단편 목소리를 드릴게요는 의도치 않게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초능력을 갖고 태어난 인물들의 이야기다. 사람들에게 살의를 느끼게 하는 목소리를 가진 승균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신의 성대를 제거하기로 한다. 후기에서 작가는 스스로의 유해함을 신중하게, 더불어 기꺼이 제거하기로 마음먹는 주인공의 목소리를 받아 적고 싶었다고 이야기했다.

거대 지렁이가 온 건 아니지만 팬데믹으로 전 세계 산업 경제가 마비되면서 지구의 숨통이 잠시나마 트이고 있다. 베네치아 운하에는 백조와 돌고래 심지어 해파리까지 나타났고, 인도 루시쿨야 해변에는 관광객 출입이 금지되자 올리브 바다거북 80만 마리가 산란을 위해 돌아왔다. 이동 제한으로 교통량이 감소하고 공장 가동이 중지되어 탄소 배출량과 미세 먼지 농도도 크게 줄었다. 고작 몇 달 만의 일이다. 코로나19와 같은 바이러스의 원인도 결국 야생 동물의 서식지 파괴와 관련 있다는 점은 백신 개발보다 더 근본적인 예방책을 떠오르게 한다. 책을 덮고 나와 닮지 않은 존재를 위협하는 내 유해함에 대해 생각했다. 쓰지 않아도 될 플라스틱과 비닐, 먹지 않아도 될 음식, 그러니까 정말로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작가의 말처럼 너무 늦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1. 정세랑, 목소리를 드릴게요, 아작, 2020.

2. 이성규, “지난 10년간 멸종된 동물은?”, 사이언스타임즈 2020110.

3. blog.naver.com/bandinbook/221833248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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