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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서재] 우리가 이 도시의 주인공은 아닐지라도
  • 윤정훈 (hoons920@daum.net)
  • 환경과조경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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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론 스트리밍에서 유튜브 프리미엄으로 갈아탄 친구가 한 음악 채널의 선곡 목록을 추천해줬다. 타이틀은 우리가 이 도시의 주인공은 아닐지라도’. 실린 노래도 좋았지만 남 얘기 같지 않은 제목에 더 마음이 갔다. 저 정도 워딩 실력이면 카피라이터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요즘 유튜버들은 못 하는 게 없네. 그로부터 몇 주 후, 같은 제목의 책을 발견했다. 그 영상은 일종의 마케팅 수단이었다. 유튜버와 출판사가 제휴해 책 제목으로 플레이 리스트를 만든 것이다. 영상의 조회수는 (2020327일 기준) 75. 중복 스트리밍을 감안하더라도 7천도 7만도 아닌 75만이라니. 이젠 북토크 같은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스마트폰이 막 나왔을 때만 해도 페이스북이 세상을 제패할 줄 알았다. 근데 웬걸? 몇 년 사이에 메인 플랫폼이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로 바뀌었다(페이스북이 발 빠르게 인스타그램을 인수했기 때문에 여전히 대세인 건 맞다). 블로거들이 아무리 성심성의껏 포스팅을 해도, 맛집 검색은 이제 초록 창보다는 인스타그램 해시태그다. 스마트폰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는 바보가 됐지만 수족처럼 사용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건 만족스럽다. 유튜브 덕분에 한 시간이나 되는 출근길이 지루할 틈이 없고, 카카오톡으로 송금이 되니 보안 카드를 주섬주섬 찾을 일도 없다. 하지만 기술이 훨씬 더 발전하면? 지금이야 엄마한테 유튜브 구독하는 법을 알려주지만 내가 엄마 나이가 되면? 언젠가는 새로운 플랫폼에 접근도 못하는 날이 오겠지.

세상은 수시로 가득한 대입 전형 같은 게 되었다. 모든 게 너무 빨리 변해서 보통 이상의 정보력이 없으면 그 흐름을 따라잡지 못한다. 흐름을 못 따라잡으면 놀랄 만큼 뒤처진다. 끊임없이 새로고침되는 SNS 피드 어디에도 남보다 앞서는 방법은 나와 있지 않다. 나의 도태와 패배를 암시하며 광고를 해보라고 부추길 뿐이다.”2 LTE 통신망으로 촘촘히 연결된 사회에는 편리하고 누릴 것투성이지만 적지 않은 피로감이 뒤따른다. 탁월한 통찰력을 발휘해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프리랜서나, 눈팅만 하던 전자 기기를 협찬받아 언박싱하는 유튜버를 볼 때 드는 은근한 패배감에 잘 대처해야 한다. 디지털 세계뿐인가. 한강의 야경은 낭만적이기 그지없지만 불빛이 나오는 건물 중 어느 하나도 내 것이 아니다. 강의 남쪽에도, 북쪽에도.

수학 시간에 배운 정규분포 그래프를 기억하는지? 평균값을 중심으로 몰려 있는 그 무수한 점들에 자꾸 눈이 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내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기왕이면 멋있게 살고 싶은데 열정도, 재능도, 의지도, 배짱도 평균 언저리를 웃돌 뿐인 상태. 저 제목처럼 주인공도 뭣도 아니라면? 박찬용의 답은 별수 있나”. 그는 주인공 되기를 부추기는 대도시 게임에서 열정 아닌 적당한 열심으로 자기 삶을 영위한다. 자신이 뭘 하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포르쉐의 신형 911 발표회 같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아도, “긍정적인 기운으로 인생이라는 코트에 파워 서브를 넣기는커녕 어딘지 모를 곳에서 날아오는 공포의 서브를 계속 리시브로 받아치는 삶이어도, 일이 궤도에 오르고 해야 할 일을 어떻게든 해냈을 때 찾아오는 작은 기쁨을 알기 때문이다. SNS보다 흥미로운 일이 일어나는 도시 구석구석을 관망하며 나름의 의미를 찾고 애착이 가는 소박한 공간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동묘의 개쩌는 빈티지 숍에서 힙스터들을 구경하고, 오래된 중국집에서 그냥 낡은 맛일 뿐인 볶음밥을 음미하면서 말이다. 참고로, 책의 표제와 소제목을 연결하면 그럴듯한 처방이 된다. ‘우리가 이 도시의 주인공은 아닐지라도’-‘(1)해야 할 일을 합니다’-‘(2)산란한 마음이 유행병처럼 들어도’-‘(3)도시 생활은 점입가경이지만’-‘(4)어쩔 수 없이 여기 사람이니까’.

어렸을 때 상상하던 어른 된 내 모습과 지금이 너무 달라서 약간 소름 돋을 때가 있다. 기자는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만 뭐랄까, 어떤 직업이든 멋있는 어른일 줄 알았지. 사명감은 무슨, 커리어는 무슨. 적당한 노동의 대가로 최소한의 품위는 누리며 살자는 마음이다. 스트레스 푸는 방법이 다이소에서의 탕진잼이고, A4 한 장 분량의 원고를 못 써서 젤리를 폭식하는 어른이 될 줄이야. 이번 마감 때 먹은 젤리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불어난 몸무게가 알려줄 테니 그런건 나만 알기로 하고, 이번 달도 해야 할 일을 해냈음에 안도한다. 마감이 끝난 주말에는 을지로 만선호프에 가기로 했는데 코로나 덕분에 무기한 연기됐다. 아껴뒀던 킹덤2’나 봐야지.

 

1. 박찬용, 『우리가 이 도시의 주인공은 아닐지라도』, 웅진지식하우스, 2020.

 

2. 같은 책,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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