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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로 상상하기, 픽셀로 그리기] 호밀밭의 파수꾼과 라이노 생태계
  • 환경과조경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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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BIM 에코시스템. 현대 컴퓨테이셔널 디자인의 생태계 다이어그램

 

연재를 시작하며

조경가로서 컴퓨테이셔널(computational) 디자인에 관한 연재를 시작한다. 아무래도 일년 내내 시시콜콜한 단어들을 등판시켜야 할 것 같은데, 그런 지겨운 이야기를 하다보면 3월호쯤에는 이미 거짓말을 잔뜩 하고 있을 거다. 홀필드(J. D.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가 거짓과 가식과 싸우라고 했는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2020년이 되자마자 거짓의 달에 착륙하고 말았다.

 

모두가 컴퓨터를 열두 개쯤 가지고 있지 않은가? 크리스마스에 단지 우울한 감정을 달래기 위해서 산 아이패드 같은 것들을 포함해서 말이다. 로리 올린Laurie Olin 같은 전통적인 조경가가 도면이란 손으로 그려야 한다고 핀잔을 주는 시대는 조금 저물어가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컴퓨테이셔널 디자인이란 주제로 잔뜩 뭔가를 늘어놓는 그런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다.

 

따라서 이 연재는 어쩔 수 없이 따분한 자서전 같은 형식으로 시작하게 될 것이며, 열두 달이 지나면 새롭다는 말을 144번쯤 반복한 한 앵무새의 이야기로 끝나 있을지도 모른다. 지면을 낭비하며 건전한 얘기만 늘어놓는 그런 상급 학교의 젊은이 같은 사람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1년을 보내고 싶지는 않다. 그저 그뿐이다.

 

자서전의 서막은 뉴욕에서 시작된다.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CFO에서 지낼 때다.위대한 개츠비호밀밭의 파수꾼과 비슷한 시작이니 기분은 썩 괜찮다. 이제 서막의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새벽 여섯 시에 던킨도너츠에서 초콜릿 묻은 도넛을 몇 개 사서 사무실에 가서는 가장 큰 컵에 아이스커피를 가득 채우고 다른 사람들이 출근하기 전에 그래스호퍼(Grasshopper)를 독학했다. 그리고 주말이 되면 딱히 만날 사람도, 할 일도 없다는 핑계로 또 사무실로 가서 냉장고에 남아 있는 맥주를 몇 병 훔쳐 마시며 파이선(Python)이니 뭐니 하는 시답잖은 프로그램들을 연습하다 정말로 미쳐버리기 전에 도망 나오곤 했다.

 

West 8에서 일할 때는 로테르담 사무실에 처음으로 출근하던 날부터 회사 서버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궁금해했던 프로젝트들의 파일을 잔뜩 열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놀랄 만한 발견을 했는데, 바로 그곳에 컴퓨터 벌레들이 살고 있었다는 점이다. 스케줄에 따라 일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도 해고당하지 않고! 아이맥iMac(애플 데스크톱 컴퓨터)에 몇 시간씩 렌더링을 걸어 놓고는 언제 출근해서 언제 퇴근하는지도 알 수 없는 그런 종족들 말이다. 나는 그야말로 이때다 싶어 그들의 작업 파일들을 닥치는 대로 해치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또 3ds맥스(3dsMax)니 포레스트팩(Forest Pack)이니 패널링툴(Paneling Tools) 같은 것들을 목적도 없이 잔뜩 배우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살았을까? 사실은 여기서부터가 진짜 영웅담이지만 가장 재미없는 부분이기도 하니 생략하겠다. 나는 꽤 오랫동안 그런 생활을 지속했다. 그리고 통계적으로 그런 경험을 자발적으로 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대체 뭘 하고 싶었을까? 지금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희소의 경험은 희소의 변화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거짓의 달에 착륙하게 된 거다. 2020년을 맞아. ...(중략)...

 

* 환경과조경 381호(2020년 1월호) 수록본 일부 

 

나성진은 서울대학교와 하버드 GSD에서 조경을 전공했다. 한국의 디자인 엘, 뉴욕의 발모리 어소시에이츠(Balmori Associates)와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CFO)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고, West 8의 로테르담과 서울 지사를 오가며 용산공원 기본설계를 수행했다. 한국, 미국, 유럽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귀국 후 파트너들과 함께 얼라이브어스(ALIVEUS)라는 대안적 그룹을 열었다.

 

자료출처

그림 1. https://parametricmonkey.com/2016/06/20/bim-eco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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