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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A] 일상의 기록, 시대의 기억
  • 김모아 (more-moa@naver.com)
  • 환경과조경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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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의 마지막 페이지를 마주할 때면 낯선 숫자와 친해지는 시간을 갖는다. 올해의 네 자리 숫자는 유독 서먹하다. 2020, 치약 이름도 생각나고 을지로 골목 귀퉁이에 있을 법한 카페 이름 같기도 하다. 데이비드 몽테뉴David Montaigne의 예언과 달리 지구는 어떤 종말의 징조도 보이지 않고 2019년의 마지막 달을 통과하고 있다. 이즈음이면 내 나름대로 새로운 해를 맞이할 준비에 돌입한다. 일 년 동안 함께한 일기장 첫 장을 펼쳐 짤막한 투 두 리스트to do list에서 해낸 것과 해내지 못한 것을 구분한다. 변함없이 게으르게 보낸 지난날을 잠시 반성하곤 곧장 온라인 문구숍에 접속한다. 2020년에 걸맞은 새 일기장을 마련할 시간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일기를 썼던 때가 있었다. 초등학생 시절, 선생님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가 배신당한 기억 때문이다. 비밀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일기장을 반으로 접어두면 읽지 않겠다기에 친구와 싸운 이야기를 구구절절 적었더니, 다음날 친구와 교무실로 소환당해 강제로 화해를 해야 했다. 고자질이라도 한 기분에 친구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이후 선생님의 시선을 신경 쓰다 보니 모범생 같은 소리만 잔뜩 늘어놓게 됐고, 일기는 숙제를 위한 글짓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됐다.

일기 쓰는 일에 재미를 붙인 건 공부 빼면 모든 게 다 재밌었던 고삼 시절이다. 기록하지 않으면 내가 사라질 것 같던 때였다. 등교, 수업, 야자(야간 자율 학습), 하교, 다른 사람과 똑같아 보이는 일상이 반복되던 시기. 남들과는 조금 다른 나의 모습을 기록하는 일은 그 시절의 나를 조금이라도 특별한 사람으로 남기는 일이었다. 그때 들인 버릇이 십 년째 계속되고 있다. 오래된 취미 생활의 산물이 이제 책장 한 칸을 거뜬히 채운다. 게으른 내가 일상을 계속 기록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워 각양각색의 낡은 책등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어떤 변천사가 보이는 듯도 했다.

수험생 시절 선택한 일기장은 먼슬리monthly, 위클리weekly, 프리 노트free note로 구성된, 문구점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형태의 노트였다. 먼슬리에 기록할 일정이라고는 시험, 가족과 친구의 생일 정도가 전부였고 위클리에는 그날 풀어야 하는 문제집 이름과 쪽수가 미션처럼 적혔다. 프리 노트는 온갖 것들의 스크랩북이었다. 일기를 비롯해 수업 시간에 끄적인 낙서, 친구와 나눈 필담, 간단한 감상평을 적은 영화 티켓이 노트를 두툼하게 불렸다. 내용은 고만고만했다. 진로, 성적, 야자 시작 전 먹을 저녁 메뉴에 대한 고민이 줄을 이었다. 그래도 완벽히 똑같은 날들은 없었다.

수능의 압박에서 벗어나 시간이 넘쳐나는 대학생이 된 후에는 일반 노트에 달력이나 글 박스를 직접 그려 마음대로 꾸몄다. 사진과 글 박스의 크기를 고심해 배치한 흔적이 잡지 레이아웃을 고민하는 지금의 내 모습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조경은 종합과학예술이라는 말에 홀려 일기장을 설계 아이디어를 기록하는 곳으로 쓰기도 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 보니 꽤 많은 아이디어가 당시에 봤던 영화나 전시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업무 일정을 정리해야 하는 회사원이 되자, 쓸모없이 느껴졌던 위클리가 다시 절실해졌다. 잡지 일을 시작한 이후로는 매달 마지막 주의 일기장을 채우는 일이 만만치 않다. 한 달 중 가장 치열한 시간의 기억이 사라지는 게 아까워 궁여지책으로 업무 중 사용한 포스트잇을 덕지덕지 붙이고 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는데 급박하게 갈겨쓴 글씨, 메모 옆에 덧붙인 이모티콘 등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종이 기록물의 힘은 묘하다. 필름 카메라와도 비슷한데, 한 번 기록한 것을 수정하려면 반드시 자국이 남고 그렇기에 내용을 신중히 고르고 거듭 정제해야 한다. 이러한 특성이 종이 매체를 전자 매체보다 특별한 것으로 느껴지게 만든다. 일기가 개인의 기록이라면, 잡지는 한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기억하는 매체다. 이 매체와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감각이 더해지면, 잡지 역시 개인의 추억이 깃든 기록물이 될 테다. 지금은 막을 내린 오피니언’(2018)이달의 질문’(2019)의 기획 의도 일부가 이 호흡을 끌어내는 데 있었다. 이를 대체할 새로운 꼭지는 아직 기획되지 않았다. 이러한 시도를 지면에서 계속할지, 독자와의 접점이 좀 더 많은 온라인에서 하는 편이 나을지는 아직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손이 많이 가는 어려운 기획을 거듭하는 이유는, 이것이 종이 매체를 특별하게 만들며 지탱해 온 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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