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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서재] 적당한 거리의 죽음
  • 환경과조경 2018년 11월


 

적당한 거리의 죽음2.jpg
기세호 | 스리체어스 | 2017

 

취재차 한 아파트를 방문했을 때였다. 막 입주가 시작된 단지의 정문에는 입주를 환영합니다라는 호의적인 플래카드가, 단지 외곽 쪽에는 인근에 들어설 추모 공원을 결사반대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해당 아파트가 안산 화랑유원지 인근에 위치한 탓에, 두 현수막은 묘한 대비를 이루며 공존하고 있었다.


도시에 새롭게 들어서려는 묘지, 봉안당, 화장장 등에 적대감을 표출하며 반대하는 모습을 도시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지역 이기주의, 초등학교 사회 과목의 주관식 문제에 단골처럼 등장하던 낫 인 마이 백 야드NIMBY만의 문제는 아닌 듯싶다. 적당한 거리의 죽음에 따르면 죽음과 관련된 공간이 홀대받는 현상의 이면에는 죽음을 강하게 기피하는 경향이 자리한다. 돌아보면 가장 많은 사람이 살고 죽는 도시에서 죽음을 떠오르게 하는 곳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서울은 기껏해야 종합 병원 장례식장 정도다.


하지만 반대로 현실에는 수많은 형태의 유사 죽음이 있다. 죽음에 대해 사색한 한 인문학자의 말에 따르면, “사람을 두고는 악착같이 기피되는 죽음이란 낱말이 사물이나 사람 목숨과 직접 관계없는 현상에 붙을 때는 오히려 심하게 남용되는 경향이 있다. 소리가 낮아지는 것을 소리가 죽는다’, 사람의 기가 꺾이는 것도 기가 죽는다’, 음식 맛이 좋을 때도 맛이 죽인다고 표현한다. 이는 사람의 목숨과 관련된 죽음이란 낱말이 극단적으로 기피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역설적 사례. 비단 언어 습관만이 아니다. “죽음의 본래적 의미에 대해서는 몹시 터부시하면서도 편리하게 소비 가능한 죽음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감각하고,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연상 작용은 완벽하게 차단하면서 나와는 상관없는 안전한, 반복 가능한 가짜 죽음은 흥미롭게 느낀다.1영화나 드라마 속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토론의 장을 벌이다가도, 죽음 그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꺼려한다. 순수하게 죽음에 대해 생각하다 요즘 사는 게 어떻냐는 사소한 질문에 죽음이란 무엇인가라고 입을 떼는 순간, 누군가는 당신에게 조용히 자살 예방 핫라인 번호를 건네줄지도 모른다.

 

저자는 한 사회가 죽음을 얼마큼 자연스럽게, 혹은 성숙하게 받아들이는지의 정도를 도시와 묘지 간의 물리적 거리로 측정한다. 도시화에 따라 세계 여러 도시 속 묘지들이 점차 도시 밖으로 밀려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대도시에서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은 아니다. 파리의 묘지는 추모 공간이면서 동시에 시민의 휴식처이자 안식처다. 파리 도심에는 여러 개의 공원형 묘지가 있는데, 그중 페르 라셰즈Pere Lachaise는 매년 350만 명의 방문객이 찾는 유명 관광지다. 무려 세 개의 지하철역이 연결된 초초초 역세권, 거대한 묘지와 주거·상업 공간이 함께 있는 생경한 풍경이다. 페르 라셰즈는 봉안당과 화장 설비까지도 갖추고 있으며, 더 신기한 건 사람들이 이런 풍경을 익숙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산책을 하다가 조용히 담소를 나누는 곳, 오랜 친구를 만나 간식을 나눠 먹거나 벤치에 앉아 가벼운 탭댄스를 출 수도 있는 곳, 그리고 그 곁에는 죽은 이들을 기리는 추모객들이 헌화를 하는 곳, 파리의 묘지에는 삶과 죽음이 조용히 공존한다.”2파리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죽음을 삶의 일부이자 연장선으로 받아들인다. 한편 서울 도심의 대형 묘지는 개발의 압력으로 추방되었으며, 현재는 동작구의 현충원이 유일하다. 같은 공원형 묘지지만 파리와는 사뭇 다르다. 휴식 차 들르거나 즐겨찾는 곳보다는 견학 장소, 국가적 행사가 이루어지는 엄숙한 공간으로 인식된다.

 

적당한 거리의 죽음은 죽음의 공간을 상실한 서울과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파리를 비교함으로써, 파리가 묘지를 도시의 일부로 지켜낸 배경과 한국에서 묘지가 설 자리를 잃는 과정을 면밀하게 살핀다. 저자는 파리처럼 서울 땅에 다시 묘지를 만들자고 하지 않는다. 대신 어떻게 하면 죽음을 좀 더 가까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점차적인 해법을 고민한다. 지하철역이나 관공서에 작은 봉안당을 두거나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추모비를 세우는 등 타인의 죽음을 수용하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죽음은 우리에게 등을 돌린 또 다른 삶이다.” 필자가 책의 첫머리에 인용한 릴케의 말처럼, 이 도시에서도 죽음을 또 다른 삶의 형태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날이 올까.

 

10월 한 달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다. 한 달의 1/3은 서울정원박람회 개최에 여념이 없었고, 1/3은 환경조경대전 수상작을 살피느라, 1/3은 부단히 11월호를 준비하는 날들이었다. 11월호에는 조경계의 큰 두 행사인 서울정원박람회와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에 주요 지면을 할애했다. 두 행사의 주제는 조경의 사명 격으로 일컬어지는 도시재생(과 미래의 조경)’, 산뜻한 가을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서울) 피크닉이다. 하지만 올해로 15회를 맞는 공모전과 이제 명실상부 서울을 넘어 한국을 대표하는 정원박람회로 거듭난 행사의 제목으로는 다소 심심해 보인다. 도시적 트렌드와 대중성이 십분 고려된 두 행사의 주제는 조경의 대중적 현주소를 말해 주기도, 한계를 드러내기도 하는 것 같다. 다음번에는 실험 정신을 발휘해 좀 더 색다른 운을 띄워보는 건 어떨까? 적당한 거리의 죽음의 저자는 건축과 도시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부분에 관심을 두었다고 한다. 도시 속에서 감추어지고 기피되는 것들(죽음, 소외, 단절, 범죄 등)을 재해석한 주제도 시도해볼 만하다.


행사는 별 탈 없이 성황리에 진행됐다. 공모전도 예년보다 많은 작품이 제출되었고, 서울정원박람회도(때아닌 태풍이 불어 닥쳤던 하루이틀을 빼고는)선선한 가을 하늘 아래 축제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다. , 남들 즐길 때 일한 것이 억울해서 괜히 우울한 주제를 꺼내 든 것은 절대 아니다

 

**각주 정리

1. 기세호, 『적당한 거리의 죽음』, 스리체어스, 2017, pp.9~10.

2. 위의 책,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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