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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토리얼] 코로나 시대의 『환경과조경』
    그저 막막하고 답답하기만 했던 2020년이 저물고 있다. 코로나, 감염, 마스크, 사회적 거리두기, 비대면 수업, 재택근무 정도의 대여섯 단어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옆 방 동료와도 화상으로 회의를 하고, 테이블에 투명 칸막이를 세운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마스크로 얼굴을 덮은 채 공원을 산책하는 역설. 초현실적인 시절을 현실적으로 살아내야 하는 감염 도시의 역설적 풍경이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김모아 기자가 10월호 코다(CODA)꼭지에 말한 것처럼, 커뮤니케이션, 편집, 디자인, 교정, 마케팅이 긴박한 호흡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월간지 작업은 불안과 긴장이 감도는 팬데믹 상황과 공존하기 쉽지 않았다. 1월호 첫 쪽에 호기롭게 외친 “한국 조경의 다음 50년을 설계한다”는 편집 좌표를 찾아나가기 쉽지 않았던 2020년을 보내며 과월호 열한 권을 다시 꺼낸다. 독자의 반응은 편집자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가장 많은 피드백이 도착한 기획물은 10월호 특집 ‘포스트 코로나, 도시의 안녕을 묻다’였다『환경과조경』은 팬데믹과 함께 벌어지고 있는 일상생활, 작업 환경, 공원, 도시의 변화를 짚어보고 다가올 미래의 양상을 조심스럽게 전망해보고자 했다. 조경가, 조경학자, 도시설계가, 도시기획자, 도시학자, 부동산학자, 교통학자, 경영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필자 열아홉 명을 초대한 이 특집을 석 달 넘게 기획한 김모아 기자와 윤정훈 기자는, 지면에 담은 이야기가 혼란스러운 상황을 조금 더 담담히 바라보게 하고 소란 가운데 놓친 중요한 지점들을 알게 해주길 바랐다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10월호는 팬데믹 한가운데 서 있는 독자들에게 『환경과조경』이 전하는 안부이기도 했다. 3월호 특집 지면 ‘공원 아카이브, 기억과 기록 사이’에는 도시경관연구회 보라BoLA를 플랫폼 삼아 활동하고 있는 연구자 일곱 명을 초대해 도시와 공원을 기억하는 방식, 그 기록을 수집하고 보관하여 공유하는 방법을 탐색해보았다. 보라가 진행한 서울의 공원 아카이브 구축 프로젝트는 지난 10월과 11월에 온·오프라인 전시 ‘우리의 공원’(www.ourpark.kr)으로 이어지면서 조경 아카이브의 지평을 개척했다. 밀레니얼 세대가 도시를 사용하는 방식, 도시를 경험하는 기준, 도시를 제작하는 풍경을 두루진단한 4월호 특집 ‘밀레니얼이 만드는 도시’에도 적지 않은 피드백이 있었다. 도시와 밀레니얼의 함수 관계를 짚어보는 것에 더해, 이 지면은 도시의 기획과 운영, 제작과 재생을 횡단하며 도시 비즈니스의 새 영토를 꿈꾸고 있는 밀레니얼 그룹들을 소개했다. 어반플레이를 비롯한 여러 실천 그룹이 전한 생생한 이야기에서 밀레니얼이 바꿔나가고 있는 도시의 일면을 엿볼 수 있었다. 국내 조경가의 최근 작업을 집중 조명함으로써 동시대 한국 조경의 성과를 공론장에 올리고자 한 특집을 세 차례나 마련한 것도 예년과 다른 기획이었다고 자평한다. 1월호에는 ‘제2회 젊은 조경가’ 수상자인 박경탁(동심원조경)의 작업 철학과 경관 제작 방식을 다양한 형식의 지면으로 꾸렸다. 5월호에는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로운 경관의 형태’를 실험하며 글로벌 조경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박윤진과 김정윤(오피스박김)의 근작을 모았다. 8월호 지면은 “살아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는 조경론을 과장과 과잉 없이 구현해온 박승진(디자인 스튜디오 로사이)의 근작으로 풍성했다. 표지에 실은 통의동 골목의 공공 정원 ‘브릭웰’은 조경계 내부에서뿐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널리 주목받은 화제작이었다. 이번 12월호에는 매년 본지가 주최하는 ‘올해의 조경인’과 ‘젊은 조경가’ 선정 결과를 싣는다. 제23회 올해의 조경인으로는 한국조경협회장을 맡아 분야 발전을 위해 노력해온 노환기(비욘드), 제3회 젊은 조경가로는 한국과 중국을 넘나들며 다양한 스케일의 작업을 발표하고 있는 최영준(랩디에이치)이 선정됐다. 최영준의 랩디에이치(Lab D+H)는, 광저우 용칭 지구(Yongqing Fang)도시재생 프로젝트로 올해 미국조경가협회상(2020 ASLA Award)도시설계 부문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비트로 상상하기, 픽셀로 그리기’의 나성진, ‘공간잇기’의 서준원, ‘북 스케이프’의 황주영, ‘풍경 감각’의 조현진, 연재 필자들의 노고에 마음속 깊은 고마움을 전한다. 나성진과 서준원의 연재는 이번 호로 막을 내린다. 이렇게 코로나 시대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며 2020년을 마감한다.
  • [칼럼] 코로나 블루, 그린 블루!
    나의 코로나 블루는 새해를 맞이해 기대를 가득 안고 떠난 이스라엘 성지 순례에서 시작됐다. 동네 성당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행사였고 나 또한 설레는 마음으로 참가했다. 그런데 7박 9일 여행의 둘째 날, 서울발 뉴스가 전해준 성지 순례단의 코로나 감염 소식으로 갑작스럽게 모든 한국인이 이스라엘 당국의 입국 금지 조치를 당했다. 텔아비브 공항에 도착한 비행기는 승객을 내리지도 못한 채 다시 한국으로 떠났고, 현지의 많은 한국 순례자들은 여행 및 이동 금지와 격리 조치 예정이라는 급보를 받았다. 당장 숙소를 떠나 달라는 요청이 왔고, 성지는 한국인의 관광을 금지했다. 가장 두려움에 떨게 만든 건 어쩌면 우리가 이스라엘 군부대에 무기한 격리될지도 모른다는 입소문이었다. 당황한 일행은 즉시 순례를 멈추고 긴급 회의를 통해 격리 조치가 이루어지기 전, 아직 입국이 허가된 터키로 탈출하기로 하고 인원을 나누어 간신히 항공권을 예약하는 데 성공했다. 한국에 도착한 뒤엔 2주간 자가격리를 해야 했고, 평생 1주일 이상 쉬어본 적이 없던 나는 집에 갇혀 지내는 내내 답답함과 무기력함 속에서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아마 코로나 블루였던 것 같다. 코로나 블루는 코로나19와 우울감을 의미하는 블루blue를 결합한 신조어로,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일상에 큰 변화가 닥치며 생긴 우울감이나 무기력증을 뜻한다. 며칠 지나지 않아 갑자기 신열이 오르고 오한이 들기도 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드라이브스루 코로나 검사를 받았는데, 음성 진단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이 되었는지 그제야 열이 내렸다. 늘 바깥에서 바쁘게 지내던 내가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요즘 대세인 트로트 열풍에 채널만 돌리면 나오는 송가인의 노래를 듣거나 소위 간 큰 남자들이 한다는 ‘삼식이’ 되기가 고작이었다. 참다못해 마스크를 쓰고 동네 뒷산을 오르내렸다. 하루하루 짙어지는 올리브그린 색의 새싹들과 점점 부푸는 꽃망울들의 뭉그적거리는 몸놀림, 코끝으로 전해오는 이름 모를 식물들의 짜르르한 풀 내음 같은 미시적인 현상을 체감하며 그동안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자연의 경이로움에 새삼 감탄했다. 들뜬 마음으로 숲의 초록과 향기에 몸을 맡기고 자연의 치유력을 믿으며 점차 몸과 마음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불안한 상황은 직장으로 돌아온 뒤에 더욱 확장됐다. ‘자연과의 동거’가 사훈인 회사는 이제 신종 바이러스인 코로나와의 새로운 동거를 준비해야 했다.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직원들이 모두 마스크를 착용하도록 하는 등 코로나 대응 지침을 만들어 시행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재택근무가 가능한지 점검하고 과밀한 지하철을 피해 출퇴근 시간을 유연하게 선택하게 했다. 단체 회식을 금지하고 점심시간에도 가급적 도시락을 싸 오도록 했다. 마스크를 구매해 직원들에게 배급하고 간헐적으로 면역력 향상을 위한 홍삼과 비타민을 지급했다. 대부분의 대면 행사가 취소되고 장기간 회식이 금지되자 직원들의 사기가 저하되었다. 분위기를 전환해보고자 옥상에서 함께 텃밭을 가꿔보자고 제안했다. 직원들과 상추, 오이 등 갖가지 엽채 모종을 심고 함께 자장면을 시켜먹으며 스프링 파밍 데이(spring farming day)를 즐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채소가 자랐을 땐 함께 수확의 기쁨을 나누며 루프 가든 파티를 열었다. 가을이 시작되고 공기가 서늘해져도 팬데믹이 지속되자 사회 곳곳에서 코로나 블루가 점점 짙어졌다. 노심초사하는 마음에 조금이나마 직원들의 마음 치유에 도움이 될까 싶어 가평 깊은 산자락에 위치한 회사 연수원을 무료로 개방해 가족들과 특별 휴가를 다녀오도록 했다. 국내외 여행이 어려운 시기, 단풍이 짙은 계곡 사이 한적한 숲 속의 연수원은 코로나 시대의 여행지로 제격이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정착되고 모든 단체와 모임이 비대면 방식으로 바뀌었다. 조경 분야도 예외일 수 없었다.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의 심사와 시상식 역시 온라인으로 진행되었고, 서울정원박람회, 대한민국조경박람회, LH가든쇼, 경기정원문화박람회도 오프라인 행사를 취소하거나 연기하고 불가피한 상황에서는 제한된 인원만 참석하는 방식으로 개최됐다. 주목할 만한 점은 정원 조성과 전시 같은 필드 행사는 취소되지 않았고, 한국조경협회의 ‘학교 치유정원 조성사업’과 같이 녹지를 통한 힐링 프로젝트의 수요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코로나 블루의 처방책으로 백신의 신속한 개발과 함께 조경가들이 만드는 공원과 숲길, 정원 같은 그린 인프라 사업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19 사태가 한 해 가까이 지속되며 일상의 변화가 우리 사회 모든 영역에서 빠르게 일어났다. 자주 다니던 동네 마트, 음식점, 영화관, 학원에 가는 것을 꺼리게 되고, 소비와 관련된 물리적 공간이 온라인 플랫폼 기반의 다양한 서비스로 대체되면서 이른바 언택트 소비가 일상화됐다. 학교는 수업을 디지털 원격 학습 방식으로 대체했고, 등교하지 않는 학생들의 일과는 저소득층 가정과 맞벌이 부부에게 또 다른 걱정거리가 됐다. 재택근무가 급증하면서 전통적인 근태 중심 관리 방식이나 워크숍, 단체 회식에 기반을 둔 직장 문화도 크게 바뀌고 있다. 산업 현장에 디지털 워크플레이스(digital workplace)개념이 도입되며 일자리가 더욱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부정적인 전망도 보인다. 전반적으로 4차 산업혁명이 가속화되고 인공 지능, 챗봇, 빅데이터, 태그 정보, 5G, 가상 및 증강 현실 기술의 발전으로 스마트화가 급속하게 진전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변화의 갈림길에서 여전히 꽃과 나무 같은 아날로그적 감성을 무기로 삼고 있는 조경 분야는 과연 위기를 맞이한 것인가, 또 다른 기회를 마주한 것인가. 건강과 위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밀폐된 실내 공간을 피해 사람들은 산책과 등산을 즐기려 가까운 공원과 산으로 몰려간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가능한 외부 공간의 필요성이 한층 높아지는 상황은 곧 오픈스페이스 소비의 확산을 의미한다. 코로나 블루를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이 공원과 정원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소비재로서의 공원과 자연의 수요가 폭증하고 있는 현상은 조경 분야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코로나 사태가 끝나면 사회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전문가들은 예상되는 거대한 변화를 기점으로 BC(Before Corona)와 AC(After Corona)로 시대를 구분 지을 정도다. 숲(green)과 물(blue)을 다스리고 오염된 도시에 건강한 자연을 심는 조경가야말로 이 시대의 코로나 블루를 치유하는 진정한 그린-블루 히어로가 아닐까?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사회 전반적으로 지식 체계를 비롯한 과거 모든 질서를 새롭게 구축해야 하는 시기에 살고 있다. 작은 바이러스에서부터 동물과 식물을 아우르는 위대한 자연, 그리고 겸손한 자세로 자연을 경외하는 인간의 공생 인식이 필요한 시대다.
  • [풍경 감각] 아무도 감각하지 않는 풍경
    설계 회사에 몸담고 있을 때 처음으로 완공된 정원을 기억한다. 큰 역할을 한 건 아니지만 과정 전반을 담당한 첫 프로젝트였고, 완성된 첫 공간에서 일에 대한 보람을 느꼈다던 선배들이 생각나 빨리 실물을 확인하고 싶었다. 오월의 봄바람과 햇빛을 받아 빛나는 정원은 정말 아름다웠다. 확인 차 가져간 도면 뭉치가 초라해 보일 정도로. 그런데 조용한 실망감이 찾아왔다. 정원에 있던 사람들의 반응 때문이었다. 그들은 설계가가 의도한 대로 벤치에 앉아 쉬고 허브의 향기를 맡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공간을 감각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중략) *환경과조경392호(2020년 12월호)수록본 일부
  • [비트로 상상하기, 픽셀로 그리기] 파라메트릭 플랜팅 Ⅲ
    현실 계절이 변했다. 사실 많은 것이 변했지. 마스크부터 기후 변화까지. 낯선 풍경과 새로운 용어들. 그림책에 그려질 법한 비현실이 현실이 되고. 인스타에 쌓여가는 사진들. 시간이 지나며 바뀌고 색이 바래는 관계들. 현실은 새로운 현실로 변해간다. 내 오늘의 소모가 부정적인 내일로 소멸될 거라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제이슨 므라즈가 평화를 말했던가. 피델 카스트로가 평등을 말했나. 무대 위의 정의는 소란이 끝나면 기억 속으로 부패한다. 썩어 문드러지지. 다른 건 없다. 필요에 따라 유행이 모습을 달리할 뿐, 트렌드가 뭐람. 그래서 혁명의 깃발을 들고 벌판을 질주하면 역사의 주역이 될 수 있나? 괜한 칼로리만 소모할 뿐이다. 목이 말라 물을 찾고 지하수 고갈을 조금이라도 촉진시키겠지. 재미다. 그저 재미라고. 재미가 아니라도 재미라고 말해야 하는 게 사회의 룰이라고. 그렇게 매일 밤 재미를 더하고 인생의 별을 따서 술잔에 기울이고 다음 날 적당히 얼버무리면 되는 거라고. 수련은 끝났다. 의미의 유통기한이 다했지. 아이스라테니 진정한 식재 설계니 다 합의된 관계 안에서만 유의미할 뿐이고, 그냥 서로의 피드에 적당히 좋아요만 눌러주면 되겠지. 현대 사회에서 새로움을 얘기하고 진정함을 말하고 옳고 그름을 말하는 건 바보다. 그냥 재미있다고 말하라고. 대충 재미있다고 얘기하는 게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매너라고. 재미있는 파라메트릭 플랜팅 연재는 오늘 끝난다. 우리에게 실낙원이 있을까? 진정한 재미를 보여 줄 수 없는 게 유감이다. 습작 지난 습작들을 이어서 소개한다. 우리는 수련이라는 명목하에 서로 연극을 했고, 자연스레 불완전한 그림들이 작업대에 쌓였다. 먼지가 덮여 인생의 구석에 내몰리기 전에, 채도가 바래 온전한 의미마저 상실되기 전에 우울한 작업의 기록을 남긴다. 기록은 진정한 파라메트릭 식재 설계의 테스트베드 1장과, 실제 대상지에 적용한 디자인 예시 1장의 조합으로 다섯 개의 습작을 병렬로 배치했다. 설계 이전에 테스트베드를 만드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포레스트 팩을 사용한 뒤 왠지 흰 가운을 걸친 연구원이 된 듯한 느낌에 콘셉트에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 정원 설계 프로세스에 대한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파라메트릭 키드의 관점에서 보면 지난 정원 설계의 과정은 상당히 직관적이고 우연적이다. 작가들은 개인의 취향이 투영된 독자적 스타일을 정립하고, 프로세스를 통해 설계를 발전시키기보다 클라이언트와의 취향 매칭을 하는 느낌이었다. 따라서 우선 정원 설계의 팔레트들을 스타일에 따라 테스트베드로 아카이빙해 명료한 디자인 베이스를 만들고, 대상지의 맥락과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최적의 테스트베드 옵션을 도출한 뒤, 대상지에 적용한 시뮬레이션을 비교해 상호 만족하는 최종 설계안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럴듯한가? 아니, 재미있는 망상일 뿐이다. 수련생이란 늘 부족한 현실감에 어설픈 환각을 즐기기 마련이다. 테스트베드 1장. 프렌치.유러피안 스타일 그림 1은 테스트베드 1장으로 프렌치-유러피안 스타일의 팔레트다. 이상한 이름인 줄 알지만 어쩔 수 없다. 대림 아크로ACRO 갤러리 모델 하우스에 적용했던 패턴인데, 전체 콘셉트가 화려한 유럽의 느낌에 모던한 라이프 스타일을 더하는 방향이어서 숨겨왔던 화려함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다. 일단 모든 걸 수국에 맡겼다. 정말이지 수국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강렬한 블루 계열보단 화이트와 핑크 계열이 더 이국적이라고 생각했고, 그중에도 화이트를 메인으로 할 때 유러피안 감각과 모던한 느낌을 연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화이트 60퍼센트에 핑크 40퍼센트 정도로 메인 수종을 구성하고, 보라색에게 카운터 역할을 맡긴 뒤 짙은 녹색으로 배경 볼륨을 채웠다. 수련생에게도 나름의 직감이란 게 있는 법이다. 이후 스타일에 대한 의사 결정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배열은 수국의 독자적인 볼륨을 살리면서 자연스러운 느낌을 주기 위해 덴스(dense)알고리즘을 사용했다. 비정형 배치에 클러스터와 스캐터가 자연스럽게 혼합되는 패턴이며, 70퍼센트 정도의 밀도로 영역을 채우는 비교적 여유로운 배치다. 교목은 수국의 하이라이트를 빼앗지 않기 위해 배제했고 대신 소관목을 추가해 불규칙한 리듬을 더했다. 마지막으로 조형 화분과 체스 모형을 더해 그림 2와 같이 유러피안 스타일로 대상지에 발전시켰다. ...(중략) *환경과조경392호(2020년 12월호)수록본 일부 나성진은 서울대학교와 하버드GSD에서 조경을 전공했다.한국의 디자인 엘,뉴욕의 발모리 어소시에이츠(Balmori Associates)와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CFO)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고, West 8의 로테르담과 서울 지사를 오가며 용산공원 기본설계를 수행했다.한국,미국,유럽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귀국 후 파트너들과 함께 얼라이브어스(ALIVEUS)라는 대안적 그룹을 열었다.
  • [공간잇기] 이야기경관, 그 새로운 시작
    나를 담은, 나를 닮은 장소 “내 추억도 서울의 역사가 될 수 있다는 점이 새로웠어요.” ‘2019 스토리스케이프(Storyscape)’1 연구 전시를 본 박준서 어린이가 방명록에 남긴 소감이다. 도시의 주인공인 평범한 개인들의 사라져가는 일상 속 공간에 대한 기억을 가치 있는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 연구자의 의도를 어린이의 눈높이로 파악했다는 점이 반가운 순간이었다. 연구 전시의 주제는 어렵지 않게 이야기경관으로 정할 수 있었지만, 연구 성과를 전시 공간에 풀어내는 일은 매우 낯설었다. 이야기경관 개념을 처음 선보이는 매개체로 활용하는 방향으로 전시를 기획했다. 심층 인터뷰와 현장 답사를 통해 연구자의 가족 구성원들이 경험한 도시 생활사(11월호 참조) 연구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가족들이 경험한 130년의 다양한 서울 동네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이를 시간과 공간으로 분류하고 도시사적 연구를 기반으로 이야기의 지층을 탐구하는 과정은 색다르고 신나는 경험이었다. 이야기경관은 이야기(story)와 경관(landscape)의 합성어로, ‘이야기가 있는 경관’이라는 의미로 고안한 용어다.2 도시 및 경관 연구의 바탕 위에 사회과학적 생활사 연구를 접목하는 시도는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공간잇기가 추구하는 연구의 지향점은 도시민의 일상 속 삶의 이야기를 통해 도시 경관 연구의 깊이 있는 확장을 모색하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 시대적, 사회적 배경 속에서 어떠한 유기적 관계를 맺고 도시가 어떤 변화를 거듭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고, 이야기경관이라는 새로운 명제를 제시함으로써 도시 지층 탐색의 가능성을 찾고자 했다. 평소에 궁금했지만 너무 일상적이고 평범해서 묻거나 함께 가보지 않았던 가족들의 애착 장소를 구술 기록하고, 이야기에 나타나는 장소적, 역사적 맥락을 파악하기 위해 각 시대의 사회, 경제, 정치적 사료를 조사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광범위한 작업이었다. 가족들과 나는 같은 시기 같은 공간에 대한 추억을 공유하고 있어 연구자로서 관찰과 참여를 동시에 해야 했고, 그것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연구의 모든 과정을 연구 전시의 콘텐츠로 활용하기 위해 구술사 기록 형식을 취했고, 녹음, 영상, 녹취록 작성, 가계도를 활용한 관계도와 옛집 도면 그리기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낡은 앨범 속의 옛 사진들이 큰 역할을 했다. 평범한 역사 “제 이야기는 연구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요. 그저 평범하게 살았거든요.” 인터뷰이를 섭외할 때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소시민의 일상과 공간을 연구하는 내게는 그 평범한 일상 이야기가 소중한 자원이다. 한 명 한 명을 섭외할 때마다 그들의 일상과 삶을 담는 그릇인 마을이 얼마나 가치 있는 연구 대상인지 설명하는 데 늘 심혈을 기울였다. 서울의 도시 공간을 연구하기 위해 친외가 가족들의 생활사 인터뷰를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가족들은 자신들의 이야기가 연구에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다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개인의 평범한 일상에 대한 생활사 연구는 사회과학, 특히 인류학 분야에서 자주 쓰인다. 알프 뤼트케는 생활사 연구를 역사 속 대다수 이름 없는 사람들의 매일의 삶이 일궈낸 일상의 역사이자 “역사 속의 일상(historishe alltage)”이라고 정의했다.3 평범한 개인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화두로 끄집어낼 기회를 확대해 준다는 그의 말은, 재개발과 재건축으로 사라져가는 도시 공간에서 개개인의 삶의 흔적을 발굴하고, 도시를 통해 연결된 그들의 장소를 공간 속 시간의 켜로 연결하고자 하는 연구자의 목적과 맞닿아 있다. 장소는 개인들의 정감 어린 기록 저장고이며 현재에 영감을 주는 찬란한 유산이라고 한 이-푸 투안의 주장도 맥락을 같이 한다.4 ...(중략) *환경과조경392호(2020년 12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2019년 12월 5일부터 2020년 1월 11일까지 성수동 우란문화재단에서 ‘2019 스토리스케이프’ 연구 전시를 진행했다.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문화예술 인력을 육성하기 위한 ‘우란이상’ 프로그램의 후원 작가로 선정되어 우란문화재단의 소장품을 매개로 연구 주제를 확장했다. 재단 소장품인 마이클 울프의 ‘인포멀 솔루션’에 담긴 도시 공간과 소시민의 일상이 있는 도시의 찰나성과 연속성에 주목했고, 도시 공간의 서사성과 소시민적 이야기에 기초한 도시 연구 방식을 섬세히 풀어냈다. 연구는 2019년 5월부터 같은 해 11월까지 진행됐으며, 연구자의 4대에 걸친 가족을 통해 바라본 130년 서울의 도시 생활사를 연구 전시로 발표했다. 2. 서준원, “역사와 이야기가 있는 서울, 내 고향”(미발표 연구 자료), 2017, pp.8~17. 3. 알프 뤼트케 외, 나종석 역, 『일상사란 무엇인가』, 청년사, 2002, pp.15, 65. 4. 이.푸 투안, 구동회·심승희 역, 『공간과 장소』, 대윤, 1995, p.249. 서준원은 열다섯 살부터 대학 졸업 후까지 뉴욕에서 약10년간 생활했다.파슨스 디자인 스쿨(Parsons School of Design)인테리어디자인학과에서 다양한 주거 공간에 대해 공부했고,한국인의 생활 환경에 대한 관심으로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치고 박사를 수료했다. SOM뉴욕 지사, HLW한국 지사, GS건설,한옥문화원,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등에서 약16년간 실내외 공간을 아우르는 디자이너이자 공간 연구자로 활동했다.한국인의 참다운 생활 환경을 위한 디자인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품고 다양성이 공존하는 도시 공간 연구를 위해 곳곳을 누비며‘공간 속 시간의 켜’를 발굴하는 작업을 긴 호흡으로 해오고 있다.
  • [북 스케이프] 캉디드와 정원과 “알 이즈 웰”
    한 해를 마무리하며 살짝 의기소침해질 때면 영화 ‘세 얼간이(Three Idiots)’(2011)를 본다. 긴가민가한 인도식 영어와 전혀 못 알아듣는 힌디어 사이에서도 “알 이즈 웰(All is well)”만큼은 잘 들린다. 주인공 란초는 큰 문제에 부딪쳤을 때 가슴에 손을 얹고 “알 이즈 웰”을 되뇌면 이를 해결해 나갈 용기를 얻는다고 한다. 그를 보고 있자면 볼테르(Voltaire)의 소설 속 인물 캉디드(Candide)가 생각난다. 학부 시절 프랑스 문학 수업을 들으며 이해에 앞서 일단 시험을 위해 외우고 봤던 구절들이 있다. 가령 카뮈의 『이방인』에서 어떤 이유로 뫼르소가 살인을 했는지, 사르트르의 『구토』에서 로캉탱은 왜 구역질을 해대는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르셀은 마들렌 한 조각에 뭐 그렇게 호들갑인지, 그리고 볼테르의 『캉디드』에서 “하지만 우리의 정원을 가꾸어야 합니다(Mais il faut cultiver notre jardin)”1라는 마지막 문장은 무슨 뜻인지 등이 그 예다. 정원에 대한 강연을 마무리할 때 인용하면 상당히 있어 보이는 구절이지만 캉디드가 이 말을 하기까지 많은 일이 있었다. 그는 베스트팔렌 지방에 있는 툰더 덴트롱크 남작의 성에서 남작 누이의 사생아로 태어났고, 그곳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곳이라고 믿었다. 타고난 성품이 유순하고 해맑았고(캉디드는 프랑스어로 순박하다는 뜻이다), 또 가정 교사 팡글로스가 그렇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팡글로스는 자기도 잘 모르는 철학적 내용을 말하는 인물인데, 이는 라이프니츠의 낙관주의와 예정 조화설을 패러디한 것이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고, 이 세상은 (신이 만들었으니) 수많은 가능한 세계 중 가장 최선이라는 것이 팡글로스의 주장이다. 맞는 말 같지만 코는 안경을 걸치기 위해 만들어졌기에 사람들은 안경을 쓰고, 돼지는 잡아먹히기 위해 태어났기에 사람들은 일 년 내내 돼지고기를 먹는다는 그의 논지는 공허하다. ...(중략) *환경과조경392호(2020년 12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캉디드』의 번역서는 여러 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대부분 성이나 저택에 속한 정원 외부에 있는 사냥터, 숲, 초지를 지칭하는 프랑스어 parc를 ‘공원’이라고 번역했으나, 이형식이 번역한 펭귄클래식 본에는 ‘파르크’라고 표기되어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조경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고, 배경이 베스트팔렌임을 고려하여 독일어 발음으로 적었다고 한다. jardin은 역자에 따라 정원, 혹은 밭으로 번역되었다. 2. www.etymonline.com/word/optimism 황주영은 서울대학교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19세기 후반 도시 공원의 모더니티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파리 라빌레트 국립건축학교에서 박사후 연수를 마쳤다.미술과 조경의 경계를 넘나들며 문화사적 관점에서정원과 공원, 도시를 보는 일에 관심이 많으며,이와 관련된 강의와 집필, 번역을 한다. 그러는 동안수많은 책을 사거나 빌렸고, 그중 아주 일부를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