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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우연석 인터뷰: 아버지 이젠 편히 쉬세요 조경가 우정상
  • 에코스케이프 2016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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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상 교수의 아들 클릭비 우연석

 

“아버지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 위해 노력하셨다. 어느 분야건 자기 생각만 추구하다 보면 한 순간 멈추게 되지 않나? 아버지는 계속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당신 것으로 만들려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새로운 걸 받아들이고 거기에 발 맞춰가되 본인을 잃지 않고 융합하려는 분이셨다. 주무시다가도 생각나는 게 있으면 일어나서 스케치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故 우정상 교수는 슬하에 1남 1녀의 자녀를 뒀다. 우연석은 그중 둘째다. 그가 아버지 하면 떠올리는 첫 이미지는 ‘그리는 모습’이었다. 우 교수와 실무를 함께한 이들이 떠올리는 마지막 모습도 ‘그리는 모습’이었으니 집에서나 밖에서나 얼마나 설계 작업에만 매진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우 교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가 커피 마시는 것과 흡연, 등산 외엔 오로지 설계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우연석 씨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도 조경설계와 연관된 것이 대부분이다. 설계는 우정상 교수의 생활 그 자체였다. 


건축가가 되길 바란 아들의 가수 데뷔, 그래도 “일단 해봐” 

우 교수는 아들이 건축을 전공하기를 바랐지만, 우연석은 1999년에 ‘클릭비’라는 7인조 밴드의 멤버로 데뷔해 가수와 엔터테인먼트 사업가로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우 교수는 아들이 건축을 하고 본인이 조경을 하는 콜라보 작업을 꿈꿔왔고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계속 그러한 바람을 전해왔다. 


하지만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우연석은 돌연 귀국, 음악을 하겠다며 가수 데뷔를 선언했다. 연예인을 하겠다는 말을 듣고 우정상 교수는 “네가 지금 하려는 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인지 조금 더 생각을 해 보고 진지하게 고민해 봐라”라고 말했다. 아들의 연예계 진출을 반기진 않았지만 아들의 생각을 우선 존중하고 함께 진지한 고민을 했다. 


“아버지와 다르게 나는 손재주가 없었다. 공부하라고 유학을 보냈을 때도 아버지가 원하는 공부가 아닌 음악 쪽으로 빠지게 됐다. 당연히 한국으로 돌아와 음악을 한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반대하셨다. 하지만 나중엔 가장 많이 지지해 주신 게 아버지다.” 


자식들이 무언가를 원했을 때 우 교수가 한 말은 “일단 해봐”였다. 우연석은 “아버지는 뭐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으셨던 것 같다. 어떤 의견이든 긍정적으로 받아주셨다”며 자신의 뜻을 지지해 준 아버지에게 감사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금은 내가 건축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만약 아버지와 같이 작업을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며 말을 흐렸다. 아버지의 작은 바람을 이뤄주지 못한 아쉬움과 그리움이 교차했는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손에서 놓지 못한 펜과 도면 

우연석의 기억 속엔 항상 식탁에서 조명을 켜놓고 새벽 내내 펜을 잡고 도면을 그리는 아버지의 모습이 남아 있다. 그는 “아버지는 워커홀릭이셨다. 새벽에 자다 깨서 물을 마시러 나오면 항상 일을 하고 계셨다. 그 모습밖에 기억에 남지 않는다”며 일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심지어 투병 중일 때도 조경설계 이야기를 하고, 운명하기 전까지 일에서 손을 놓지 못했다. 병원에 누워 있을 때는 아들을 시켜 집에서 도면을 가져오라 하고는 병실에서 도면을 그렸다. 그 모습이 남자로서 봤을 때는 멋있다고 느꼈지만, 한편으로는 가족을 위해서 평생을 바쳤다고 생각하니 아들로서는 마음이 짠하고 아팠다고. 


“아들 입장에서 아버지가 연세가 드셨을 때 이제 그만 일을 손에서 놓고 여생을 편하게 보내셨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고 죄송스럽다. 평생 가족을 위해 희생하셨던 아버님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일상으로 돌아오기가 어려웠다.”


커피와 담배 그리고 산 

우정상 교수는 커피를 좋아했다. 그것도 오로지 믹스 커피만 즐겼다. 우연석은 “아버지가 술을 한 잔도 못 마시기 때문인지 그나마 커피와 담배를 즐기면서 휴식을 취하신 것 같다”고 말했다. 주변인들 모두 하나 같이 커피 이야기를 빼놓지 않는 것을 보니 정말 커피를 많이 마셨던 모양이다. 우 교수는 마지막까지 습관처럼 매일 한 잔씩 커피를 마셨다. 우연석은 산소를 찾을 때마다 아버지가 생전에 좋아하던 담배와 커피만은 꼭 챙겨서 가고 있다. 


우연석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또 다른 아버지의 모습은 일 만큼 산을 타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이다. 병상에 눕기 전까지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에베레스트, 킬리만자로 등의 산을 올랐다. 가족들은 등산을 만류했지만 산에 대한 그의 열정을 꺾을 수 없었다. “원체 자기관리에 철저하셨던 분이라 무리하지 않고 본인의 페이스에 맞춰서 무탈하게 다녀오셨다.” 우 교수가 산에 오를 때마다 가족들은 마음을 졸였다. 


아버지가 걸어온 ‘조경’ 분야가 더욱 발전하길 

우연석이 아버지가 하는 일에 대해서 아는 건 조경은 건물을 지으면 외적인 부분을 더 빛나게 해주는 것이란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어릴 때는 아버지가 나무심는 사람인 줄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 우연석은 아버지가 조경설계를 하다 보니 다양한 곳을 가볼 기회가 많았는데, 특히 제주도를 많이 갔고 그중 호텔 조경설계 작업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우정상 교수 가 설계한 곳 중 호텔이나 규모가 큰 곳을 갔을 때는 폭포나 연못 등을 보면서 “야 이런 것까지 다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한 분야에서 평생을 바치고 생을 마감한 후에 나에 대해서 인터뷰를 한다면 정말 잘 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아버지한테 모든 걸 받기만 했다. 가족을 위해서 온전히 본인을 희생하시고 마지막까지 가족들에게 모든 걸 주고 떠나신 아버지께 감사한 마음뿐이다. 아버지가 몸 담아 오신 조경이 앞으로 더 많이 발전해서 더 나은 세상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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